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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홍묵 칼럼
작성일 2017-07-30 (일) 02:00
분 류 칼럼 논단
말(馬) 세탁과 말(言) 세탁

‘말(馬) 세탁’이라는 생경한 말이 등장해 세간이 떠들썩합니다. 삼성 측이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에게 사 준 말 세 필 살시도, 비타나V, 라우닝1233을 살바토르, 블라디미르, 스타샤로 갈아치운 일을 두고 생겨난 용어입니다. 이를 두고 삼성 측은 “최순실 씨가 독단적으로 말을 팔았다”고 주장하는 한편, 정씨는 “삼성이 모를 리 없다”고 진술해 앞으로 삼성 이재용 부회장과 최순실 씨 재판에 치열한 논란이 예상됩니다. 엉뚱한 일, 생뚱맞은 말에 또 세상이 시끄러워질 판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말(馬)은 사고 팔 수 있지만 사람의 말(言)은 쉬 바꿔서는 안 됩니다. 말 바꾸기, 이른바 말(言) 세탁은 그 사람의 인격과 신뢰에 금이 가게 합니다. 또 청문회나 민·형사 사건에서는 위증죄가 성립됩니다. 본인도 그렇지만 상대방에게는 훨씬 더 치명적인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부터 일구이언(一口二言)이면 이부지자(二父之子)라며 금기로 삼았습니다.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면 두 아버지의 자식이라고 백안시했습니다. 하긴 요즘은 아버지가 둘인 자녀도 드물지 않은 세상이 됐지만.

말 뒤집기는 장삼이사들 간에는 허다하지만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그러나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정치인·법조인, 인성과 인격을 다듬는 교육자·종교 지도자,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인·사회운동가들의 말 세탁은 전파력과 파급효과가 엄청나게 큽니다. 새 정부가 지난 19일 발표한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는 적폐를 청산하고 부패를 일소하려는 의욕이 가득 찬 가운데, 100일도 안 돼 바뀐 약속·공약이 적지 않아 과연 ‘약속 끝까지 지키겠습니다’(청와대 영빈관 현수막)라는 약속이 제대로 지켜질까 걱정스럽습니다.

문 대통령은 이 계획에서 178조 원에 달하는 ‘증세 없는 복지’를 공표했습니다. 청와대는 그러나 하루 만인 20일 당·정·청이 증세 방안을 협의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복지 재원 마련을 위해 부자 증세(연간 소득 2,000억 원 초과 거대 기업, 연봉 5억 원 이상 고소득자 대상)가 불가피하다는 민주당 추미애 대표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김부겸 행정자치부 장관도 “표 때문에 증세 문제를 덮어 두고 복지 확대를 밀고 갈 수는 없다”며 증세 문제의 공론화를 주장했습니다. 벌써 ‘대통령의 공약 파기’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한술 더 떠 추 대표는 초대기업 초고소득자에 대한 과세를 ‘명예 과세’라고 이름붙이며 “이번 증세는 조세 정의의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사탕발림을 했습니다. 김태년 정책위 의장도 “이번 핀셋 증세는 국민 90% 가까이가 지지하는 사랑 과세, 존경 과세, 착한 과세”라며 “형식적으로는 증세지만 내용은 과거 정부의 부자 감세를 정상화하는 조치”라고 드레싱 했습니다. 자유한국당은 ‘포퓰리즘’ ‘세금 폭탄’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여야 간 공수(攻守)가 바뀐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말의 번롱(弄)은 유치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있을까요.

취임 두 달 반이 넘도록 내각 구성을 제대로 못하고 야당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상황은 문 대통령이 대선 때 내건 ‘인사 5원칙’ 공약 때문입니다. 5대 공직 배제 기준(위장 전입, 논문 표절, 세금 탈루, 병역 면탈, 부동산 투기) 중 하나라도 위반한 경우 고위직에 등용하지 않겠다고 한 문 대통령은 “역대 가장 깐깐한 인사 검증을 했던 민정수석이 저 문재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국회 청문회 대상 인사 22명 중 15명이 한 가지 이상을 위반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지 궁금합니다.

‘까도 까도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았다가 흠집투성이로 밝혀진 전례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흠결 많은 고위 공직자들이 펼칠 미래는 어떤 세상일까요? 법무법인에서 월 3,000만 원의 ‘용돈’을 받던 인사가 새로운 군대를 만들고, 수십 건 논문을 표절한 교수가 교육을 개혁하고, 다운계약서로 산 아파트에서 12억 원의 차익이 생긴 ‘운이 좋은’ 교수가 방송 통신을 장악하면 현재의 적폐 인사가 과거의 적폐를 청산하려 한다는 비아냥거림은 어떤 말로 돌려댈지 두고 볼 일입니다.

새 정부는 이번 발표에서 당초 공약이나 약속을 살짝 바꾸기도 했습니다. 한미 간의 전작권환수 시기를 임기 내→조속한 시점으로, 최저임금 1만 원 인상은 당장→1년 간 성과 보고 판단으로, 통신 기본료 폐지는 전체→노인·저소득층만으로 시기·방법·대상을 바꿨습니다. 공무원 81만 명을 늘리겠다는 방침은 일반직 공무원이 아닌 안전 분야(소방·복지)만 증원하겠다는 취지로 말을 돌렸습니다. ‘전략적 모호성’으로 시간을 벌자는 전략인지 잘 모르겠지만 발효 숙성한 묵은지처럼 입맛 당기는 말은 아닙니다.

문 대통령은 이밖에도 나라다운 나라 건설을 위한 수많은 포석을 했습니다. △군 복무 기간(21개월) 18개월로 단축 △전교조 합법화 △지방경찰제 실시 △성과연봉제 폐지 △누리과정 예산 전액 국고 지원 △고교 무상교육 2022년 전면 실시 △4대 강 재자연화(再自然化)△대입전형료 인하 △도시재생 뉴딜사업(5년간 50조 원 투입) 시동 △가야사 연구·복원 국정과제 추진……. 대부분 공약 사안이지만 즉흥적 과제도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말이 바뀔지 속단할 수는 없지만, 일단 던져진 공이니 좋은 결실을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 대통령의 이런 스타일을 송호근 교수(서울대 사회학과)는 ‘뻥 축구’라고 비유했습니다. 골키퍼나 수비수가 상대 진영으로 공을 내지르면 발 빠른 공격수의 드리블 슛이나 장신 선수의 헤딩슛으로 더러 골인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상대 수비 진영(야권) 이 지리멸렬한 상태에서는 가능성이 더 큽니다. 하지만 뻥 축구는 공이 사이드라인 밖으로 새거나 크로스바를 넘는 똥 볼 아니면 골대를 맞고 튀어나오는 불운이 더 많습니다. 일단 질러 놓고 공을 쫓아가게 하는 뻥 축구의 한계를 지적한 것입니다.

말을 자주 바꾸면 백성은 자칫 헛배만 부르다가 영양실조로 절망합니다. 말의 중요성은 옛부터 누누이 강조되어 왔습니다. 과거에는 설화(舌禍)를 경계했지만, 오늘날에는 말 한마디에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외교 등에 엄청난 파문과 풍선효과가 생겨 나라 안의 소란은 물론 나라끼리의 분쟁 전쟁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정치인 사상가 시인 소설가와 종교인들은 연설이나 작품을 통해 말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 운(運)을 망치고 싶지 않으면 말(言)을 다듬어라.(윌리엄 셰익스피어, 영국 소설까)
  • 말의 정확성은 중요하다. 틀렸거나 오해를 유발하는 말은 돌발행동만큼이나 비극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제임스 터버, 미국 유머작가)
  • 막대기나 돌은 내 뼈를 부러뜨릴 수 있다. 하지만 말은 마음을 무너뜨린다.(로버트 펄검, 미국 작가·목사)
  • 모두가 세상의 변화를 꿈꾼다. 그러나 자신의 변화를 생각하고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레오 톨스토이, 러시아 작가)
  • 내가 말하지 않은 것 때문에 상처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캘빈 쿨리지, 미국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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