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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용식 찰럼
작성일 2015-05-15 (금) 17:49
분 류 칼럼 논단
국정원의 소리 없는 ‘脫정치’ 개혁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간된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의 자서전 ‘힘든 선택들’에는 이런 장면들이 나온다. 전임 콘돌리자 라이스 장관의 유일한 요청은 장관차 운전기사를 계속 고용해 달라는 것이었고, 그는 그렇게 했다. 모든 직책에 ‘내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기보다 ‘내부 최적임자’를 찾았다. 또 한 가지는, 때로는 중앙정보국(CIA) 국장 자서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보와 외교가 함께 움직였다. 이런 내용을 떠올리는 이유는 전환기를 맞은 국가정보원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국정원이 모처럼 정쟁(政爭)에서 벗어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댓글 사건으로 정치 중립성은 훼손됐고, 간첩 증거조작 사건으로 역량은 의심받았다. 1961년 중앙정보부 창설 이후 국가안전기획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정원은 ‘국가 정보기관’보다 ‘정권안보 기관’으로 인식돼 왔다. 수천 명의 정보·공작 전문가를 지휘하는데, 문외한인 대통령 최측근들이 임명됐다. 이병호 현 원장 전까지 32명 중 김만복 전 원장이 유일한 내부 발탁 사례지만 불행히도 외부 출신보다 더 ‘정치적’, 때로는 ‘비전문적’이어서 되레 국정원에 누를 끼쳤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5년마다 정권이 바뀌면서 정치권 줄대기와 편가르기, 인사 난맥이 되풀이됐다. 이처럼 ‘정치’는 만악의 근원이었다. 그때마다 ‘탈(脫)정치’ 개혁안을 내놨지만 공염불에 그쳤다.

이런 국정원사(史)를 돌아볼 때 최근 국정원과 정치권의 관계는 이례적이다. 국정원은 지난달 29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북한 고위관리 15명이 올해 처형됐다는 등의 정보를, 13일에는 현영철 처형 등의 정보를 보고했다.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 관측은 하루 만에 오판으로 드러났지만 별다른 비판이 없었다. 이처럼 국정원이 정치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김정은 체제의 비이성적 징후가 높아지고 있다. 정확한 북한 정보를 기초로 대북 전략을 추진하고, 국민에게도 실상을 최대한 알릴 필요성이 더 커졌다.

최근의 변화는 이 원장이 ‘비(非)수첩인사’이고, 뼛속까지 ‘정보맨’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병기 전임 원장이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옮겨가지 않고 계속 재임했더라면, ‘성완종 리스트’의 사실 여부나 이 전 원장의 역량과 무관하게 또 한 차례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정보기관에서는 최고책임자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업무 대부분이 비공개여서 감시나 견제가 어렵고, 사욕(私慾)에 휘둘릴 수도 있다. 게다가 정보 수집은 기본적으로 ‘훔치는’ 일이다. 도청, 미행, 포섭, 매수, 공작 등 비법적(非法的) 활동도 불가피하다. 다양한 첩보를 퍼즐 맞추기 하듯 맞춰 전체 그림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책임자의 능력에 따라 진흙에서 진주를 찾을 수도, 거꾸로 역공작에 휘둘릴 수도 있다.

이 원장의 역량은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이력에 비춰 정치적 행보나 다음 자리를 노리고 개인적 행보를 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는 국정원의 정치 개입을 ‘역사적 범죄’라고 했다. 힐러리 장관처럼, 자신의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지 않고 내부에서 적임자를 발탁했다. 모든 정보는 필요한 모든 곳과 공유하고, 국민에게도 알리려 한다. 과거 원장들에게선 찾아보기 어려웠던 모습이다. 이 원장은 안기부 2차장을 끝으로 1996년 퇴직한 지 20년 가까이 됐고, 올해 75세다. 대통령의 측근 권력자가 아님을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지금 국정원 개혁을 위해 긍정적 측면이 훨씬 크다. 또 어느 전임자보다 국내외 정보 공작을 수행·지휘했던 경험이 많다. 이번 기회에 정치권과의 절연(絶緣)을 이뤄내야 하는 이유다.

미국 CIA와 FBI는 1970년대 워터게이트 사건을 계기로 정치권과의 관계를 재정립했다. 댓글 사건까지 겪은 국정원도 ‘이병호 체제’가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정치 관여 소지를 뿌리째 도려내야 한다. 이미 소리 없이 진행 중이다. 청와대와 여야 정치권도 이런 노력을 적극 지원하는 한편, 엉뚱한 사람을 보내 국정원을 망치는 역사적 죄악을 다시는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CIA, 모사드, MI6 수준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10년간의 햇볕정책 와중에 훼손된 대북 정보 역량이 대부분 복구됐고, 오히려 유능한 젊은 인재들이 많이 충원됐다고 한다. 이런 일들이야말로 진정한 개혁이다.
 
 이용식 / 문화일보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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