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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영인
작성일 2015/06/17 (수) 22:13
ㆍ조회: 874   
미국 CIA “바지 속 90만 달러 내놔라”

공항서 걸린 김형욱 ‘박정희 약점’ 털어놔

 JP “너도 나도 혁명한 죄인, 서울로 가자” … 김과 ‘페블비치 대좌’… 그게 마지막이었다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44>김형욱의 미국 망명

실각한 김형욱 은밀히 망명 준비 스위스 비밀계좌로 재산 빼돌려 “날 건드리면 박정희 상처 받는다”

미국에서도 큰소리 치고 다녀 “김형욱 그냥 뒀다가 큰일 나겠다” JP “브라질 대사로 가라” 제안

김형욱 전 중 정 부장이 1977년 6월(왼쪽·오른쪽)과 10월(가운데) 미국 하원 프레이저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73년 미국 망명 4년 만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두려워하는 개인은 김대중이었고

 가장 두려워하는 집단은 미국 국회”라고 주장했다. 그가 막대한 재산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사실도 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중앙포토]

갖은 권세를 부렸던 김형욱은 1969년 10월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됐다. 그의 월권에 대한 비판이 사방에서 쏟아지자 박정희 대통령도 그를 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 전국구 국회의원(8대)을 한 차례 시켜줬지만 그의 마음은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졌다.

 73년 4월 명예박사학위를 받는다는 명분으로 대만에 건너간 김형욱은 바로 미국으로 도망갔다.

 그는 정권의 압박 때문에 망명(亡命)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김형욱은 정보부장 시절 해외로 많은 재산을 빼돌렸다.

그 돈이 쌓여서 이제 밖에 나가도 편안하게 살 수 있겠다 싶어지자 미국으로 달아나버린 것이다. 그가 해외로 빼돌린 돈은 엄청났다. 정확한 액수는 모르지만 아마 수천만 달러는 되지 않을까 싶다. 김형욱이 돈을 해외로 밀반출하는 데는 유명 여배우가 가담했다.

정보부장에 있으면서 이곳저곳에서 수탈한 달러를 그 여배우가 여러 차례 나눠서 홍콩으로 운반했다. 홍콩 공항에 상주하던 한국 정보부 요원들이 도와줘서 세관의 조사를 받지 않고 비행장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 돈은 홍콩을 거쳐 스위스에 있는 김형욱의 비밀계좌로 옮겨졌다.

 김형욱은 뉴욕 근교 뉴저지주 알파인의 고급주택가 저택에서 살았다. 억만장자들이 모여 산다는 미국 최고의 부촌(富村)이다. 그곳에서 조용히 살았으면 괜찮았을 텐데 거기서도 제 성격이 나왔다. 자신이 마치 대한민국을 움직이던 사람이고, 대단한 정보를 가진 것처럼 미국에서 행세했다. “나를 건드리면 박정희 대통령이 상당히 상처를 받을 거다”라며 큰소리를 치고 다녔다.

그 당시 내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중앙정보국(CIA) 고위 관계자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스위스 은행에서 90만 달러(미국 소비자물가 지수 기준 현재 가치로 약 400만 달러)를 현금으로 인출한 김형욱이 이 돈을 바지 속 양 다리에 칭칭 감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뉴욕에 도착해서 존 F 케네디 공항을 빠져나오려는데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김형욱이 돌아보며 왜 그러냐고 묻자 상대방이 신분증을 보여줬다. 미 CIA 요원이었다. 연방수사국(FBI) 요원 한 명도 그 뒤에 있었다. 그들은 김형욱을 공항 사무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 바지 좀 벗고, 다리에 감은 돈을 풀어달라. 모두 90만 달러 맞지?”

1961년 5·16 직후 김종필 중정부장(왼쪽)과 김형욱. 두 사람은 육사 동기 이자 거사 동지였다. [중앙포토]

 미 CIA는 김형욱이 스위스 제네바 은행에서 돈을 찾아서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뉴욕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형욱은 숨겨놨던 돈을 몽땅 꺼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를 시내 사무실로 데려간 CIA 요원은 “우리의 신문(訊問)에 대답을 다 해준다면 이 90만 달러를 몰수하지 않고 돌려주겠다”고 했다. 미 CIA 측은 박정희 대통령의 문제점에 대해 다 이야기하라고 요구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견제할 수단으로 김형욱을 이용하려 한 것이다. 꼼짝없이 걸려든 김형욱은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털어놨다.

 하지만 막상 신문을 해보니 CIA로선 써먹을 만한 정보가 별로 없었다. 이미 CIA가 다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큰소리 치던 김형욱이 실제로는 정보가치가 별로 없는 인물임을 CIA도 알게 됐다. 김형욱은 90만 달러를 돌려받았지만 그때부터 CIA는 그를 낮게 평가했다. 다만 어디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늘 감시는 하고 있었다. 그가 미국에 온 한국 기업인에게 돈을 뜯어내는 장면들도 모두 CIA 감시망에 걸려들었다.

 나는 허튼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김형욱을 그냥 두면 큰일을 내겠다 싶어서 그를 한국으로 데리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77년 4월 5일 평의원이었던 나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아프리카·중남미 11개국 순방을 마치고 미국 캘리포니아 페블비치 골프장에 들렀다. 도착하자마자 뉴저지에 살고 있는 김형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여기 페블비치에서 만나자”고 하자 그는 “내가 왜 거기 가느냐”고 했다. 나는 “오라면 와. 안 오면 내가 그리로 쳐들어가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틀 뒤 그가 찾아왔다.

 발 밑으로 파도가 부서지는 페블비치 해안가 바위 위에 함께 걸터앉아서 그를 설득했다. “이놈아, 너나 나나 조국에 대해서는 죄인이야. 5·16혁명이라는 죄가 될 수도 있고, 공이 될 수도 있는 일을 했어. 만일 3000만 국민이 다 ‘못 살겠다, 원인을 만든 놈을 없애자’고 격분한다면 가장 먼저 목이 달아날 사람이 혁명한 우리들이야. 3000만 명이 다 다른 나라로 망명을 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한반도를 떠날 수 없어. 죄를 잔뜩 짊어진 놈이 무슨 큰소리를 내.”

 그러자 김형욱은 흥분해서 박 대통령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마구 퍼부어댔다. 나는 “너 발작증이 심하구나. 대통령을 그렇게 함부로 욕하면 되느냐”고 야단을 쳤다. 그리고 한참 그를 달랬다. “머리를 정상화시켜. 너는 혁명할 때 박정희 대통령과 같이 죽겠다고 선서를 했어. 그런 놈이 이렇게 터무니없이 엉뚱한 짓을 하고 다니면 되느냐. 내가 다 씻어줄 테니 두 말 말고 서울로 들어가자. 가서 대통령께 ‘한때 생각을 잘못했는데 죽을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한마디만 해. 그리고 너 브라질 대사로 가라. 내가 주선해 줄게.”

 내 제안에 김형욱은 “브라질? 이왕이면 구라파(유럽) 어디를 주지 않고, 저 지구 끄트머리에 박아놓으려고?”라며 발끈했다. 나는 “영어도 못하면서 무슨 구라파 대사냐. 브라질은 포르투갈어 쓰니까 영어 못해도 통해. 거기가 편하고 좋아”라고 설득했다. 내 얘기에 그가 솔깃했다. 나는 “즉답을 하지 말고 전후좌우 잘 따져보고 대답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저녁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했다. “김형욱을 브라질 대사로 좀 보내주실 수 없습니까. 만나서 얘기하니 좀 누그러졌습니다.” 박 대통령도 “아, 본인이 가겠다면 못할 거 없지”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음날 김형욱과 골프를 함께 쳤다. 그의 마음이 상당히 동요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원래 그는 나보다 골프를 잘 치는데, 그날 따라 공이 안 맞아서 90타를 넘게 쳤다.

 그런데 수그러드는가 싶었던 김형욱이 뉴저지로 돌아가서는 태도를 돌변했다. 내게 전화를 걸어 “너한테 속을 뻔했어. 날 구석에 박아놓고서 제거하려고 그러지? 누굴 바보로 만들려고 하느냐”며 펄펄 뛰었다. “내가 미쳤느냐. 박정희한테 귀여움을 받게”라더니 욕을 해대며 생야단을 부렸다. 아마도 그새 주변의 누군가가 김형욱의 마음을 돌려 놓은 듯했다. 그는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네 멋대로 해라. 그런데 생각이 달라지거든 언제든지 가겠다고만 해라”며 말을 끊었다.

 그게 김형욱과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뒤 김형욱은 77년 6월 미국 하원의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일명 프레이저위원회)에 증언자로 나섰다. 그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있는 소리, 없는 소리를 끄집어내서 픽션을 만들었다. 김형욱은 79년 10월 프랑스에 여행을 갔다가 스위스 제네바까지 행적은 있었는데 그 뒤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게 사라졌다.

◆프레이저위원회=정치·군사·정보·경제·교육 등 한·미 관계의 모든 국면을 검토하기 위해 구성된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 위원장인 도널드 프레이저(미네소타주) 하원의원의 이름을 따서 프레이저위원회로 불린다. 76년 10월 박동선 사건을 계기로 77년 5월 구성돼 30만 달러의 예산을 들여 18개월간 활동했다. 김형욱·박동선 등 37명이 청문회 증인으로 서면서 언론과 여론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프레이저 위원장은 79년 상원의원 예비선거에선 패했다.

● 소사전 박동선 사건=1976년 10월 미국 워싱턴포스트(WP)가 “한국 정부가 재미실업가 박동선(사진)씨를 내세워 연간 50만~100만 달러의 뇌물로 미국 의원과 공직자를 매수했다”고 보도하면서 불거진 사건. ‘코리아게이트’라고도 한다. WP가 미국의 청와대 도청설을 추가 보도하면서 한·미 간 외교문제로 비화됐다. 이후 미국 의회는 서울에 있던 박동선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한국 정부가 이를 거부했다. 박동선은 면책특권을 받는 조건으로 증언에 응했고, 78년 2월과 4월 청문회에서 미 의원 32명에게 약 85만 달러의 선거자금을 제공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의원 3명이 징계받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김형욱 “난 부자 아니다” …

씨티은행 “재산 2000만 달러”

프레이저보고서 속 ‘김의 진실’

1977년 6월 22일 미국 워싱턴 의회의 하원(下院) 레이번 빌딩. 경호원 2명의 호위를 받은 회색 양복 차림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청문회장에 입장했다. 프레이저위원회 증언대에 그가 처음 서는 날이었다. 3시간 전부터 줄 서서 입장한 250여 명의 방청객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그는 준비한 성명서를 통역(안홍균)을 통해 읽은 뒤 청문위원들의 질문을 받았다. 박동선 사건과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질의응답이 주로 오갔다. 망명 뒤 미 중앙정보국(CIA)과 접촉했던 사실도 밝혔다. 그는 “처음엔 여러 CIA 친구들을 만났지만 75년이 마지막 접촉이었다”고 증언했다. 구들링 위원은 그에게 “어떻게 재산을 미국으로 반입해왔는가”라고 물었다. 김형욱은 “나는 부자가 아니어서 갖고 올 것이 많지 않았다. 암시장의 한계로 15만 달러를 한국에서 반출하는 데 2년이 걸렸다”고 답했다. 위원회 측은 그의 첫 증언이 유용하고 믿을 만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조사가 이어지면서 그의 재산 출처가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위원회가 78년 10월 말 활동을 마치며 발간한 ‘한미관계조사보고서’(일명 프레이저보고서)에 따르면 처음에 김형욱은 260만 달러를 미국으로 가져왔고 그 절반을 도박으로 날렸다고 시인했다. 하지만 씨티은행은 미국과 해외계좌에 있는 그의 재산 총액이 1500만~2000만 달러로 추정된다는 자료를 위원회에 제출한다. 보고서는 “그의 재산에 대해 밝혀진 내용으로 인해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어느 정도 털어놓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됐다”고 썼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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