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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016/11/07 (월) 17:36
ㆍ조회: 481   
월남 최후의 탈출자, 이대용 장군

월남 최후의 탈출자, 이대용 장군

살아있는 영웅,살아있는 귀감

1. 재월한국인 철수 및 안전확보

북월군이 파리휴전협정을 위반하고 북위17도선을 넘어 남침 총공세를 취하자 베트남공화국(남월)은 패망위기를 맞이했다. 주월 한국 대사관은 우리정부의 지시에 따라 1975년 3월말, 재월한국인 철수본부를 설치하고 육군 현역 준장이며, 주월 한국 대사관에 파견되어 경제협조실장(경제공사)직책을 수행하고 있는 이대용 공사를 재월한국인 철수본부장에 임명했다.

당시 재월한국인수는 외교관 21명, 외교관가족 59명, 농업사절단 20명, 의료사절단 21명, 수자원사절단 4명, 그리고 순수 민간인 1,009명이었다. 재월한국인 철수계획에 따라 1975년 4월 26일까지에 재월한국인 총수의 약 80%인원을 철수시키고 약 200명이 남아있었다.

이들 잔류 민간인 대부분은 개인재산처리가 잘 안되어 쉽게 떠나지 못하고 동분서주하면서 각종 부동산의 재산처리를 하고 있는 한국인들이었다. 한국대사관 가족전원은 이미 철수가 끝났고, 21명의 한국외교관 중 8명은 철수를 끝내고 13명이 남아있었으나, 미국 측과의 합의에 따라 이들 13명은 미국 대사관 책임 하에 미군 헬리콥터로 철수하겠금 되어있었다.

미국 국무장관 키신져는 소련 외무장관을 중간에 내세워 북월 정부 측과 비밀교섭을 해서 사이공에 투입된 미군이 미국  민간인과 미국대사관 직원들의 철수작전을 완료할 때까지는 사이공 외곽에 있는 북월 공산군이 절대로 사이공시내에 진격해 들어가지 않는다는 확실한 보장을 받아놓고 있어, 미국 측은 상당히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헬리콥터에 의한 사이공으로부터의 미국인 철수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미국 측이 한국 대사관 직원 전원을 철수시키겠금 한-미 합의가 이루어져서 한국대사관 외교관의 마지막 철수 및 잔여 한국 민간인 철수도 보장된 상태였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했다. 1975년 4월 29일밤, 재월 미국인철수의 총책임자인 주월 미국 마틴 대사는 ‘지금 북월 공산군 대부대는 사이공 시내로 진격해 들어왔으며, 그 선두는 주월 미국 대사관 수백 미터 거리에 진격해 왔다.’ 라는 사실무근의 잘못된 첩보를 접하고 철수작전을 조기에 끝내기로 결심했다.

1975년 4월 29일 밤 20시 50분, 이대용 한국인철수본부장은 마틴 대사를 보좌하고 있는 베넽 공사를 만나서 주월 미국 대사관 별관마당에 집결하고 있는 한국 외교관 11명을 포함한 약 180명의 한국인들을 수시로 날아오고 있는 헬리콥터에 조속히 태워 철수시켜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베넽 공사는 상황이 위급하니 이대용 철수본부장만 자기가 지명한 미국 대사관직원의 경호안내를 받으며, 지금 당장 대사관 옥상의 헬리콥터장으로 가서 헬리콥터를 타고 떠나라고 했다. 한국인 전원의 철수지원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이대용 철수본부장은 이를 거부했다.

철수본부장이 부하직원과 한국 민간인들을 생사의 갈림길에 내버려두고, 혼자서 살려고 도망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어쨌든 한국인 모두를 철수시키겠금 어떤 대책을 강구해 달라고 간청했다.

미국측이 한국인들을 철수 못시키고 철수작전을 중단한다면 한국인들이 살아남을 길은 오직 하나 주월(사이공) 프랑스 대사관이나, 주월 영국 대사관에 긴급교섭을 해서 그들 대사관안으로 들어가는 길 뿐이었다. 프랑스나 영국은 북월 하노이에도 대사관을 설치하고 있어 남월, 북월 모두에게 대사관이 있는 상태임으로 사이공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이나 영국 대사관도 치외법권이 인정되어 북월 공산군이 절대로 침입하지 못하게 되어있었다.

이대용 철수본부장은 외교관 공사의 높은 직함이 있고, 프랑스 대사관이나 영국 대사관 고위층과 개인친분 관계가 두터움으로, 적극 노력하면 그 교섭이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지며, 그것을 위해 전심전력을 기우릴 수가 있다고 판단했다. 1975년 4월30일 새벽 4시 30분경, 미국 측은 한국인, 독일인, 기타 여러 나라 국민들을 버리고, 철수작전을 중단하고 떠났다.

이대용 철수본부장은 대사관 부하직원들을 데리고 어둠속에서 한국인들을 집합시키고 상황설명을 긴급히 하고, 대사관 참사관, 1등 서기관 등을 대동하고 이리저리 달려가 교섭 끝에 드디어 교섭이 성공되어 잔류 한국인 160여명을 치외법권 지역인 프랑스 대사관 병원에 대피시켜 안전을 확보하고, 이날 정오에 북월 공산군이 노도와 같이 사이공에 쳐 들어와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감행할 때 한국인은 한명도 피해 없이 모두 안전하게 생명을 보전할 수가 있었다.

2. 외국 외교관 앞에서의 의연한 사생관

1975년 5월 1일 오전 8시 30분경 주월 일본 대사관 와타나베 참사관은 우리나라 김동조 외무장관으로부터 이대용 철수본부장 앞으로 보내온 전문을 가지고, 프랑스 대사관 병원에 있는 이대용 철수본부장을 찾아왔다. 전날 일본 대사관 통신망을 통해서 이대용 철수본부장이 보낸 전문에 대한 본국정부의 응답전문이었다.

이 자리에서 일본 와타나베 참사관은, 북한 김일성 공산정권의 고위인사들은 점령군과 함께 이미 사이공에 들어와 있으며, 북월 공산 정권 및 프랑스 대사관과 교섭을 벌이고 있는 중이며, 곧 북한정권 인사들이 이곳으로 와서 이대용 철수본부장을 위시한 9명의 한국외교관을 데리고 북한으로 가게 될 것이니, 그리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 이라고 했다.

후진 공산국들은 국제법을 어기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에 이대용 철수본부장은 초긴장을 했다. 군인된 몸으로서 항상 간직하고 있는 사생관, 언젠가는 필연코 가야 할 죽음의 길, 이제 그 시기가 온 것이다. 가야 한다. 깨끗하게 가야 한다. 이 장군은 권총을 꺼냈다.

대한민국 육군 장군에게 지급한 38구경 5연발 리벌바 권총이다. 실탄 5발이 장전되어 있다. “와타나베씨 고맙습니다. 나는 북한에 불법으로 강제로 끌려가 대한민국 외교관으로서 명예를 더럽히는 것 보다는 확고한 국가관, 사생관에 입각해서 자결할 결심입니다. 북한공산요원들이 나를 끌고 가려고 이곳에 나타나면은 그들을 쏴 죽이고 나머지 한발로 자결할 것입니다.”

초긴장 상태에서 생사를 초월한 이 장군의 안색은 너무도 진지했다. 와타나베 참사관은 이 장군의 손을 잡고 자결할 생각을 말아 달하고 하며 울었다. 옆에 있던 이규수 참사관도 울고 있었고, 서병호 영사도 울고 신상범 서기관도 울고 있었다. “확고한 나의 이 결심을 아무도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어서 돌아가 주십시오. 와타나베씨” 한참동안 눈물로 만류하던 와타나베 참사관은 돌아갔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일까. 북한공산정권 요원들은 나타나지를 않았다.

3. 사이공 치화 형무소에서의 항거투쟁

베트남 공산정권 외무부는, 사이공에 잔류하고 있는 한국 외교관들에게 ‘1975년 6월 18일 오전 10시 사이공 탄손눝 공항에 나가서 태국 방콕으로 가는 국제적십자사 수송기를 타고 출국하라.’는 통보를 한국 외교관들에게 보내왔다.

한국 외교관들은 국제적십자사 사이공 지사장의 인솔 하에 사이공 탄손눝 공항에 제시간에 나갔으나, 수송기에 탑승하려는 직전에 권총을 찬 베트남 관리들이 나타나서, ‘남조선인들의 출국을 보류한다.’고 해서 한국외교관들은 출국하지 못하고 다시 시내숙소로 되돌아가는 사건이 있었다.

그 후에 초긴장이 감도는 우여곡절 끝에 1975년 10월 3일 베트남 공산정권의 안닝노이찡(安寧內政, 보위부)은 이대용 장군을 불법 체포하여 악명 높은 기요틴(단두대)까지 있는 사이공 치화 형무소에 투옥, 수감했다.

이대용 장군을 체포할 때, 베트남 공산정권이 발부한 체포영장을 한국말로 읽어 내린 베트남 관리는, 김일성대학과 김책공과대학을 졸업한 ‘즈엉징 특(DUONG CHINHTHUC : 2004년 8월 현재, 그는 주한국 베트남 대사관 특명전권대사임)’ 이었으며, 그는 이대용 장군 앞에서 “성명 이대용, 직업 외교관, 베트남 혁명사업을 방해했기에 체포함. 1975년 10월 3일” 그리고 구속영장에 서명한 베트남 공산관리의 직책과 이름을 읽었다.

이대용 장군이 수감된 감방은 사형수나 장기수를 수감하는 격리감방이었다. 햇빛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열악한 감방이며, 방안에는 뻥 뚫려진 지저분한 악취가 진동하는 변소가 있을 뿐, 사방은 두터운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식사는 하루에 아침, 저녁 두 끼이며, 점심식사는 없었다. 한 끼의 식사는 밥 한 컵 정도이고 반찬은 호박소금국 또는 라믄(베트남 야채)소금국 한가지뿐이며, 한 끼의 부식은 한 컵 정도였다. 이 열악한 급식 및 감방생활은 북한이나 소련의 정치수용소의 급식 및 감방생활을 연상케 했다.

1975년 10월 10일 베트남 공산정권의 안닝노이찡 요원들은 치화 형무소로 와서 이대용 장군을 신문했다. 한국말 통역은 체포당시의 통역인 ‘즈엉징 특’이 했다. 안닝노이찡 요원은 한국에 대해 원한이 사무치는 것인지 또는 이장군의 기를 꺾어버리려는 속셈인지, 언성을 매우 높이며, 남조선 박정희 집단은 맹호사단, 백마사단, 청룡여단 등을 베트남 침략군으로 보내 수많은 베트남 양민을 학살하여 천인공노할 큰 범죄를 저질렀다는 말을 길게 하고 “그대(이 장군)는 총살형에 해당한다.”고 큰소리로 외친 후 “그러나 지금이라도 과거를 청산하고 진보적 민주주의(공산주의)편에 가담해서 인민들을 위해서 일 하겠다면 과거를 관대하게 용서하고 인도적 대우를 해주겠다.”고 말하였다.

이대용 장군은 이에 대해 단호하게 반박했다.

“나는 유엔이 제정한 비엔나협정에 의하여 외교관 면책특권이 있으며, 따라서 베트남 정부는 나를 신문할 권한이 없고, 나는 답변할 의무가 없다.”고 말하고 “정치에 있어 이 지구상에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우방도 없다. 교전당사국이라도 외교관은 체포할 수 없으며, 국제법에 따라 모두 서로 본국으로 보내주어야 하는 것이다.”

국제법에 규정한 대로 유엔의 보호를 받는 이장군은 결코 베트남관리들의 신문에 응하지 않겠다고 확고한 발언을 거듭 강조했다. 베트남 안닝노이찡 요원은 “어쨌든 그대는 총살이다.”라고 윽박질렀다. 이대용 장군은 “총살, 총살하는데 할 테면 하라. 그 따윈 협박에 두려워 할 내가 아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그러나 총살하려면 유엔이 주동이 되어 국제규모재판소를 설치하여 국제재판을 한 후에 총살하여야 한다. 베트남 정부는 국제외교관인 나를 재판할 권리가 없다.”라고 못을 박았다. 안닝노이찡 요원과 이대용 장군은 평행선을 그으며, 언쟁만 벌이다가 국제법상 정당한 주장인데다가, 또 이미 나라 위해 죽을 각오가 확고히 되어있는 의연한 정신자세의 이대용 장군의 주장에 대항할 이론적 밑천을 잃은 안닝노이찡 요원은 하는 수 없이 “오늘의 신문은 이것으로 끝내겠소. 곧 2차 신문을 하러 오겠소.”하고 제1차 신문을 끝내버렸다.

한국 정부는 이대용 장군이 베트남 공산정권에 의하여 체포되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어디서 어떤 일을 이 장군이 당하고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어 애만 태우고 있었다. 고립무원 상태에서 무거운 안닝노이찡의 압박이 이 장군에게 가해지고 있었다. 안닝노이찡은 이 장군에게 일광욕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열악한 식사로 인해서 영양실조와 햇빛을 전혀 못 보는 상태에서 갖가지 병이 생겼다.

약 10개월간 단1초도 햇볕을 못보고 좁은 격리감방에 가둬놓으니 미칠 것만 같았다. 안닝노이찡은 이러저러한 갖가지 수단방법을 써서 이 장군을 굴복시켜 사상적 전향을 시키려고 애썼으나 모두가 허사로 돌아갔다. 이런 가운데 이 장군이 형무소측에 계속 항의했더니 실로 297일 만인 1976년 7월 27일에야 일광욕을 15분간 시켜주었다.

영양실조로 체중은 자꾸 줄어서 약 1년 만에 이 장군의 체포 당시의 체중 78kg는 46kg으로까지 내려갔다. 식물인간이 되어가고 있었으나 이를 악물고 참았다. 자살의 유혹이 수없이 찾아왔으나 “자살은 의지가 박약한 자의 행위다. 끝까지 투쟁하여야 한다.”고 자신을 격려하며 강철 같은 의지력으로 버텨나갔다. 한국 정부와의 연락이 전혀 되지 않고, 사이공 시내에 있는 교민과도 서로 소식을 알 수가 없는 상태에서 홀로 고독하게 베트남 안닝노이찡과 투쟁하고 있는 이 장군에게 수감되어...

1년 9일이 되는 1976년 10월 12일 깜짝 놀랄 기적 같은 소식이 들어왔다.

우리정부에서 백방수단을 강구하며 1년간 애써온 결과, 치화 형무소 간수가 우리 편을 들어 사이공에 있는 우리 교민회장의 편지조각을 이 장군에게 가져온 것이다. 극비로 이 쪽지를 보내니 이 장군의 건강상태, 북한요원으로부터 신문 받았는지의 여부, 특히 보안에 유의하면서 답신을 써 보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때부터 이 비밀루트를 통해서 이 장군은 어렵사리 가끔 한국 외무부 장관, 그리고 가족 또 때에 따라서는 한국 대통령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식은땀을 흘리며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면서 보내는 편지라서 그 횟수는 아주 적었다. 이 극비 통신루트로 인해서 우리 정부는 이 장군의 1년간의 필사적인 확고한 투쟁정신과 태산 같은 부동의 사생관, 국가관, 군인관, 애국심을 모두 파악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이 장군을 구출하라고 정부 해당 각 부서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1977년 2월 음력 명절 때 치화 형무소에서는 모든 수감자들에 대한 가족, 친지 면회가 특별히 허용되었다. 외국인 수감자들에 대한 면회는 그 나라 교민회원들이 하도록 허용되었다. 치화 형무소에 수감된 약 5,000명의 수감자들은 모두 형무소 광장에 모여서 즐거운 약 2시간의 면회를 하며 가족, 친지들이 들고 온 음식을 나누어 먹고 대화를 나눈 뒤 나머지 각가지 차입품을 들고 형무소 감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유독 공산당에게 전향을 거부하고 있는 이대용 장군만은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1977년 9월3일 베트남 국경일에도 치화 형무소 수감자 전원에게 가족, 친지, 교민들에 의한 면회가 허용되었지만, 이대용 장군과 수일 후에 총살이 집행되는 와하우교 반공청년장교 5명만은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 후 해마다 음력 명절과 국경일에는 치화형무소 수감자 전원에 대한 가족, 친지, 교민들에 의한 면회가 있었으나, 이대용 장군 한 명만은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대용 장군이 안닝노이찡이 강요하는 소위 인민(공산주의자)편으로의 전향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어, 이 장군이 그들의 압박에 지치고 지쳐 굴복할 때까지 심적 고통을 끈질기게 가하는 수단의 하나로 면회금지를 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장군은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한번도 면회를 못하는 진기록을 남기고 옥사(獄死)하던가 아니면 반송장이 되어 출옥하게 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훗날의 일이지만 이 장군은 치화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4년 7개월 동안 단 한번도 면회를 해보지 못하고 가지가지의 병에 걸린 몸으로 옥문(獄門)을 나서게 된다. 옥중(獄中)에서 ‘어떠한 칠난팔고의 험난한 가시밭길이라도 의연하게 극복하리라’는 철석같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이 장군이지만은 정신력과는 달리 신체는 자꾸만 허약해지고 있었다.

1977년 6월21일부터는 머리가 뜨끔거리면서 잠을 못 이루는 몹쓸 병을 앓기 시작했다. 6월24일 밤에는 거의 한잠도 못 이루고 꼬박 새우다가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정신력으로 극복해 보려고 이를 악물고 애를 썼으나 견디기 어렵게 몸이 쑤셨다. 6월 26일 오후부터는 40도의 고열이 온몸을 쑤시게 하며 감방의 천정이 거꾸로 되었다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면서 빙글빙글 도는 환각에 시달리다가 정신을 완전히 잃었다 깼다를 반복했다. 3일간 식사는 손도 못 대고 물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6월 27일 형무소 당국도 거적대기 위에 누워서 펄펄 끓는 이 장군의 실신상태의 몸을 보고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형무소 본부에서 간부들이 몰려오고, 2명이 밤을 세워가면서 이 장군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6월 28일 오후에는 간수들이 여 의사와 여 간호원을 데리고 감방 안으로 와서 왕진을 하고 갔다. 그리고 병원에 돌아가서 여 의사는 알약을 20여알 보내왔다. 7월 1일이 되면서 고열은 가시고 미열만 계속되었다. 7월 4일이 되어서야 이 장군은 제대로 일어나 식사를 겨우 할 수 있었고 잠시나마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이 장군은 일어나서 런닝셔츠와 팬티를 갈아입으려고 벗었더니 많은 피가 끔직하게 뒷부분에 묻어있었다. 살펴보니 이 장군이 모르는 사이에 둔부 양쪽과 허리 뒷편에 각각 손바닥 크기의 커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피부껍질은 모두 없어지고 시뻘건 살덩어리 위에 피가 엉켜있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열을 1주일간 계속 앓으면 그렇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고열에 신음하면서 정신을 잃었다 차렸다 하며 조잡한 콘크리트 방바닥에 얄팍한 거적대기와 담요 한 장을 깐 채 고통을 이겨내려고 이리저리 몸부림치다가 그렇게 된 것일까 참으로 알 수 없는 큰 상처였다.이런 가운데 이 장군은 가지각색의 잔병에 시달리면서 치화 형무소의 암흑터널 옥고(獄苦)의 세월은 아주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베트남 안닝노이찡은 계속해서 별의별 수단방법을 다 써가며 이대용 장군을 회유, 공갈, 협박했으나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이 장군이 수감되어 약 3년이 된 1978년 9월25일 드디어 북한 노동당 제3호 청사 통일전선부에 속해 있는 중견 간부중 빼어난 일꾼인 궁상현, 박영수(훗날 서울불바다 발언한 자), 한경수의 3명이 이 장군을 신문하기 위하여 평양에서 베트남으로 왔다.

그들 3명중 2명이 7일간에 걸쳐 이 장군을 직접 심문했다.그들은 민족, 혈연, 남북대화 문제들을 들고 나와 이 장군을 회유도 하고 공갈, 협박도 하면서 끈질기게 괴롭혔다. 그들은 이 장군이 사상적 전향을 하고, 북한으로 가겠다는 자의망명서(自意亡命書)를 쓰게 한 후 평양으로 이 장군을 납치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국제법에 의해서 외교관은 체포나 구금을 시킬 수는 없으나, 외교관의 자의(自意)에 의한 타국으로의 망명은 국제법이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군이 북한에 끝내 가지 않겠다고 고집하면 극비리에 사상전향서를 이 장군으로부터 받아, 처자가 있는 서울에 보내주긴 하지만 북한의 극비 거물간첩으로 극비지령을 내려 이 장군의 북한 비밀간첩으로서 서울에 묻어둔다는 차선안(次善案)을 그들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어졌다.

궁상현 일행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그들이 파놓은 함정으로 이 장군을 밀어 넣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헛일이었다. 이 장군은 안닌노이찡에 맞서 싸울 때와 똑같은 이론으로 외교관 면책특권을 내세워 북한 요원들이 국제 외교관을 신문할 권리나 자격이 티끌만치도 없고 국제 외교관인 이대용 장군은 그들의 심문에 답변할 의무가 전혀 없으니, 한마디로 답변하지 않겠다면서 시종일관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그들이 욕지거리를 하면, 이 장군은 이에 맞서 동등한 욕지거리로 대했다.하루는 궁상형이 “이 새끼”하며 이 장군을 때리려고 상의를 벗으며 일어나자, 이 장군도 “야, 이 새끼야, 때릴 테면 때려봐라” 더 큰소리치며 일어서서 그자를 태권도로 때려눕힐 자세를 취했다.나라 위해 이미 죽음을 완벽하게 각오한 이대용 장군은 태권도 유단자이며, 무서운 것은 티끌만치도 없었다. 궁상현은 덤벼들지 못하고 옆에 있는 자가 말려서 이 장군은 격투까지는 가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심문은 헛돌 뿐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투로 미루어 그들은 이 장군이 ‘자의망명서’를 써서 국제 신문기자들에게 공표하고 이 장군이 북한으로 망명 귀순하도록 공작하는 것이 아주 명확히 보였다. 1978년 10월 2일 아침 제6차 신문 때 북한 3호 청사 선임자인 궁상현은 저주스러운 눈길로 이 장군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당신이 여기서는 말을 않고 있지만 어디 두고 봅시다. 다른 곳에 가서는 우리에게 말을 안 하고 못 배길 거요.”하고 협박공갈을 했다.

북월 하노이 같은 곳으로 북송 이감시켜 고문하겠다는 공갈이었다. 이 장군은 코웃음을 치며 “흥!”하고 씩 웃어버렸다. 서리 맞은 잡초들은 단숨에 시들어 가지만, 소나무는 서리 맞고 눈보라 쳐도 웅장하게 버텨나간다. 이 세상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소나무도 있는 것이다.

1978년 10월2일 오후 2시 제7차 신문이 시작되었다. 이 장군은 계속해서 초연하게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꽤 시간이 지난 후 흰셔츠를 입은 자가 “왜 저렇게 외곬일까? 우리말을 왜 모두 적의(敵意)로만 받아들일까?”하고 체념하듯 말했다.선임일꾼 궁상현은 한참 동안 무엇인가를 떠들어 댔다. 이 장군은 딴생각을 하며 그자의 말에 정신을 쏟지 않았다. 그자는 갑자기 언성을 높이면서 “알갔소? 이세가지 중의 하나를 택하시오” 했다.

이 장군은 궁상현이가 말한 세가지를 귀담아 듣지 않아 무슨 말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저 묵묵히 앉아 있었다. 궁상현은 갑자기 큰 소리로 “좋소. 묵비는 중립이요. 중립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소. 여지껏 우리가 말한 것을 당신이 모두 시인한 것으로 해석하고 당신이 북반부 고향에도 한번 가보기를 원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끝내겠소. 가시오.”하였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다. 그냥 나올 수가 없었다. 한마디 해야 했다. “여보시오. 어째서 묵비가 시인이요. 나는 여지껏 당신들이 말한 것을 하나도 시인하지 않고 또 죽어도 북한 땅에는 안 가겠소.”하고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이로써 북한 노동당 3호 청사 통일전선부에 속해있는 궁상현 일행에 의한 이 장군에 대한 신문은 1978년 9 25일 사이공 안닝노이찡 안가에서 시작하여 아무런 성과 없이 1978년 10월 2일 허탕으로 끝나버렸다. 이에 대한 문제는 북한노동당 3호 청사의 높은 간부로 있다가 대한민국으로 1980년대에 극비리에 귀순한 황일호씨의 증언에 의하여 모든 것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1978년 12월25일 베트남공산군이 대병력으로 캄보디아를 침공 1979년 1월 9일에는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을 점령했다.이때 북한 김일성은 캄보디아를 지원하고 베트남 공산국과 적대관계에 들어갔다. 1979년 2월17일 중공군 대부대가 베트남 국경을 돌파 침공할 때도 북한 김일성은 중공편을 들었다.

이로써 북한 김일성 공산정권과 베트남 공산정권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우리정부는 이대용 장군 구출 외교노력에 활기를 더하며 가일층 맹활동을 하였다. 이 결과 이대용 장군은 치화 형무소에서 1980년 4월 11일 석방되어 4월 12일 우리 정부가 보낸 아이젠버그 회장의 전용기를 타고 스웨덴 외무차관 리프랜드를 단장으로 하고, 스웨덴 외무부 비서실장 닐슨과 아이젠버그 그룹의 동경지사이사 겸 하노이 지사장 드웍씨의 안내 및 호위를 받으며 귀국했다.

이와 같이 이대용 장군은 1975년 4월에는 재월 한국인 철수본부장으로서 예기치 않았던 위기상황에서도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한국인 생명을 모두 구하고, 베트남 공산정권의 불법체포, 투옥 중에도 확고한 군인관, 공무원관, 사생관, 국가관을 가지고 국가기밀을 보호하며, 국가에 충성한 그 고귀한 정신은 국가 공무원, 또는 현역군인신분을 가진 장병들이 대대손손 만대에 걸쳐 이어받을 귀감이며 이대용 장군의 그 큰 공은 천추에 빛날 것으로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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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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