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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2005/11/12 (토) 22:58
ㆍ조회: 3488   
" 전자공업 육성을 하고 싶은데 도와 주시오 "

(金玩熙 박사의 증언)

" 전자공업 육성을 하고 싶은데 도와 주시오 "

1967년 9월13일, 오전 10시.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서 金박사의 보고가 시작됐다.
朴正熙 대통령, 朴忠勳 상공부 장관, 申範植 대변인, 韓準石 비서 관 등이 참석했다.
金박사는 생각보다 참석자가 적어 실망스런 마음으로 설명을 시작했다고 한다.
두 시간 반 동안 보고를 진행하던 金玩熙 박사는
처음으로 朴正熙란 인물에 대해 호감이 갔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정말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차트에서 눈을 뗀 적도 없었습니다.
교단에서 많은 학생들을 가르쳐 왔지만
朴대통령만큼 집중해서 듣는 학생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보고를 하면서 보니 다소 전문적인 내용까지도 朴대통령은 이해하는 듯했어요』

보고는 12시30분에 끝나고 金박사는 朴대통령과 식사를 함께 했다.
朴대통령은 金玩熙 박사의 숟가락 위로 깻잎을 얹어주며 말했다.


『金박사, 이거 기억납니까?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金박사가 왔다니까 집사람이 준비한 모양이오』

金玩熙 박사의 회고.

『대통령의 식단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검소했어요.
肉類라고는 유일 하게 갈비찜이 전부였어요.
그 갈비찜도 朴대통령이 거의 다 내 밥 위로 올려주곤 했습니다』

식사가 끝나자 朴대통령은 金玩熙 박사를 서재로 안내했다.
잠시 후 朴대통령은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탁자 위에 놓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金박사, 미국 모토롤라社가 한국에서 이걸 만들겠다고 하면서
공장 부지 매입을 허가해 달랍니다』

탁자 위에 올려진 것은 작은 트랜지스터였다.

『요 쪼매난(조그마한) 것이 한 개 20∼30달러나 하고,
손가방 하나면 몇만 달러가 된다고 합디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면직물밖에 수출하지 못하니 ….
차로 한 곳간을 채워도 손가방 하나만큼도 못하니….
내, 이래서 金박 사를 보자고 한 겁니다.
金박사, 우리나라도 전자공업을 육성하고 싶은데 도와주시오』

金玩熙 박사는 잠시 생각해 본 뒤
『저 혼자 힘으로는 벅차고 미국에 돌아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朴대통령은 비용이 얼마나 드냐고 물었다.

『어림잡아 20만 달러 정도는 있어야 합니다.
일을 시작하려면 우선 10만 달러가 필요합니다』

작별인사를 하고 청와대를 나오려는데
朴대통령이 2000달러가 든 누런 봉투를 金玩熙 박사에게 주었다.
이 액수는 당시 약 100만원에 해당하는 돈으로 미국을 왕복하는 항공료와 비슷했다.
1979년 10월26일 朴대통령이 사망할 때까지
매년 3∼4차례 한국을 드나들게 된 金玩熙 박사에게
朴대통령이 직접 준 돈봉투엔 항상 이만큼의 액수가 들어 있었다.

이날 오후 2시쯤 청와대 현관에서 대통령과 작별 인사를 하려는데
난데없이 상공부 尹禎宇 계장이 나타났다.
朴대통령도 놀랐다.
尹계장은 차트를 들고 金박사를 따라 청와대로 들어온 뒤
집무실 옆에 있는 대기실에 갇혀 있다가 보고가 끝난 뒤에도
경호원들이 무서워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고 털어 놓았다.
꼬박 4시간 동안 대기실에 앉아 있었던 셈이다.
朴대통령도 그 말 을 듣고 껄껄 웃었다.
이날 저녁 라디오와 신문에서는 정부의 전자공업 육성방침을 발표하고 있었다.

1967년 9월 말, 金박사가 미국에 돌아오니
상공부로부터 그에게 10만 달러가 송금되어 있었다.

『가난한 한국 정부가 거액의 돈을 부친 것을 보니
그만큼 朴대통령이 전자 공업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재촉하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밀린 업무를 처리한 뒤 본격적으로 보고서 구상을 하기 시작했지요』
金박사가 세운 목표는 한국 실정에 맞는 「한국형」 전자공업.
그는 다른 나라의 성공사례를 알아보기 위해 미국 內 전문가들에게 조사 용역을 의뢰 하고
한국에 있는 KIST를 통해 전자공업에 관한 한국의 실정을 조사해 달라고 용역을 주었다.

1968년 1월, 金玩熙 박사는 용역처로부터 보고받은 자료를 토대로
「전자공 업센터 설립 계획안-국가의 기초산업과 수출산업으로서의 전자공업 중점 육성책의 근거」란 보고서를 작성했다.

金玩熙 박사가 다시 한국을 찾은 때는 1968년 3월7일, 중간보고를 위해서였다.
이때 金박사는 컬럼비아 대학 공과대학장 헤네시 박사와
음향과 오디오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이자 전기 및 건축학 교수인 해리스 박사,
시장조사 전문업체인 체이스社의 체이스 회장,
방위산업체 하버드 인더스트리를 경영하는 국방전자공업 전문가 헐리 社長 등을 帶同(대동)하고 방한했다.


(대통령의 친서)

1968년 3월7일 金玩熙 박사와 함께 訪韓한 미국인 전자산업 전문가 일행은
9일 동안 국내 전자공업의 실상을 확인하며
상공부 등 관계기관 및 업체와 의견교환을 했다.
金박사는 3월13일, 이들과 함께 청와대를 예방하고 朴正熙 대통령에게 소개했다.

『내 생각에 미국에 親한국적인 인사가 많아야 韓美 관계가 돈독해지고
미국의 지원을 이끌어내 한국의 공업이 안정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朴대통령은 특히 헐리 사장에게
大邱의 병참본부를 돌아보고 개선 방안을 건의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金박사가
5월 말까지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을 무렵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했다.
컬럼비 아 대학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흑인 거주지역 할렘街에서
소요가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학교 당국은 일몰 후와 휴일에는 학교 출입을 금지 시켰다.

그로부터 약 2주일 뒤인 4월18일
朴正熙 대통령과 존슨 美 대통령과의 頂上 회담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리고 있었다.
金玩熙 박사는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는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던 것이다.
5월 초순이 되자 한국 총영사관에서 金玩熙 박사에게 朴대통령의 친서를 보내왔다.

세로 줄이 그어진 두 장의 大統領 用紙에 朴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金玩熙 박사에게!

貴翰(귀한) 감사합니다.
하와이 방문은 많은 在美 교포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아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北美 本土에 계시는 교포들도 똑같이 환영해 주시는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
덕택으로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4월20 일 귀국했습니다.
7월경에 귀국하신다니 또다시 相逢(상봉)의 機(기)를 苦待(고대)하면서-.
貴家庭에 萬福이 깃들기를 祝願합니다.

4월27일 朴正熙 拜>


『朴대통령으로부터 처음 받은 친서였어요.
봉투가 너무 초라해서 대통령이 보내온 서신인지 의심이 갈 정도였지만
내용엔 정감이 깊이 묻어 있더군요』
金玩熙 박사는 그해 7월8일 귀국, 워커힐에 숙소를 정한 뒤
영어로 작성된 보고서를 우리말로 번역하고 있었다.
7월15일, 대통령 비서실로부터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약 두 시간 동안 朴대통령은 金박사에게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사건 이후
미국의 움직임에 관해 상세하게 물어보는 등 다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저녁에 金박사 환영회를 하려 하니 그때 우리 한잔 합시다』라며
봉투 하나를 金박사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金박사, 오랜만에 가족과 같이 왔는데 아이들에게 선물이나 사주시오』
봉투 안엔 100만원과 메모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날 저녁 金玩熙 박사는 다시 청와대로 들어갔다.
朴대통령은 불도 켜지 않은 컴컴한 집무실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었다.
金基衡(김기형) 과기처 장관, 崔亨燮 KIST 소장, 申東植(신동식) 경제제2(과학담당) 수석비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金玩熙 박사는 朴대통령에게 과기처와 KIST 등의 중요성과
과학기술적 이해와 안목 없이는 전자공업을 제대로 육성할 수 없다는 점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전자공업은 다른 산업에 비해 첨단 기술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정책수립은 물론
지원도 어려운 분야입니다.
정책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세계 시장을 선점하고 리드해 가는 기술을 이해하고
그 진행방향을 짐작하여 정책에 충분히 반영시켜야 하거든요.
그러지 않고서는 세계 시장에 발을 붙일 수가 없어요.

다행히 1960년대 말, 세계의 전자공업은 막 출발하려던 기차와 같았어요.
우리는 그 막차 맨 끝칸을 타려고 했던 겁니다.
1970년대를 지나면서 기차의 속도는 빨라졌고
지금은 제품이 시장에 나오면 3개월 뒤엔 다른 제품이 그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변화의 속도가 빨라졌어요.
이런 판에 후진국들 이 제 아무리 흉내내며 따라오려 해도 불가능하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우린 그때 참 운이 좋았던 거죠.
그런 면에서 朴正熙란 분을 대통령으로 만난 것은 한국민들에게 행운이었다고 봐요』

朴正熙 대통령의 환대 속에 청와대를 방문했던 金玩熙 박사는
그때까지 朴 대통령의 협조 요청에 결심을 굳히지 못했다고 한다.
金玩熙 박사의 결심이 선 것은 그날 회식이 끝난 뒤였다.

『그날 자리를 파하고 일어나 청와대를 떠나려는데
朴대통령이 현관까지 배웅하러 나오셨어요.
우리들이 차에 탈 동안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심호흡을 하시더군요.
그리고 차가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계셨습니다 .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朴대통령이 너무나 외로워 보였습니다.
말끝마다 가난한 한국을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朴正熙 대통령을 도와 드려야겠다고 그때 차중에서 결심했던 겁니다』

(우리 김박사)

朴대통령에게 보고할 차트는 25명이 번역하고 7명의 전문가가 투입되어 완성되었다.
1968년 8월1일 오전 9시,
청와대 집무실에는 朴正熙 대통령을 중심으로
金正濂(김정렴) 상공부 장관, 申範植 대변인, 申東植 수석 비서관, 김동수 비서관 등이 배석했다.
金玩熙 박사의 첫번째 공식 보고가 시작되었다.
총 80매의 차트가 모두 넘어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3시간30 분이 걸렸다.
에어컨을 켜지 않아 金박사와 차트를 넘기던 상공부 박임숙 국장의 이마엔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결론에 이르자 金玩熙 박사 는 이런 건의를 했다.

『…이처럼 전자공업은 제품 사이클이 매우 짧아서
국내에서 진득하게 독자 기술을 개발해서는 이미 늦어버립니다.
어떻게 하든 선진기술을 도입해 수 출제품부터 개발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전자공업진흥원을 설립하여 거국적인 지원으로
단기간에 전자공업을 육성해야 합니다. 이상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대통령은 『수고 많았소. 점심들면서 얘기를 계속합시다』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사중에 생긴 에피소드 한 토막.
金正濂 상공부 장관이 金玩熙 박사를 칭 찬할 겸 자신을 낮출 겸해서 한마디를 했다.

『金박사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브리핑에 전문적인 용어가 너무 많아서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면 蓄電器(축전기)와 蓄電池 (축전지)가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식사를 하던 朴대통령이 말했다.

『아, 이 사람아. 축전기는 콘덴서(Condensor)고 축전지는 배터리(Battery ) 아니여!』

金玩熙 박사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식사를 마칠 때쯤 朴대통령은 金玩熙 박사가 제의한 전자공업진흥원에 대해 이런 질문을 했다.

『金박사, 그런데 누가 이것을 추진하지요?』
金박사가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자
다시 『누가 진흥원을 책임지지?』라고 물었다. 金正濂 장관이 대답했다.

『각하, 이 안을 만든 金박사가 아니고는 이 일을 추진할 사람이 없습니다』
朴대통령은 시선을 金玩熙 박사에게 돌린 뒤 신중하게 물었다.

『金박사, 돌아오겠소?』

金玩熙 박사는 순간 당황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설명을 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을 여러 명 지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또 그들과 함께 미국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돌아올 경우 여러 명의 젊은 학자들과 연구 프로젝 트들이 큰 타격을 입습니다.
곤란할 것 같은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金玩熙 박사는 朴대통령이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지 않는 분이란 걸 그때 알았다고 회고했다.
朴대통령은 金正濂 장관에게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金장관, 그러면 기구를 따로 만들 것 없이 지금 있는 것을 활용하지. 어 차피 金박사 외에 자격 있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朴대통령이 언급한 「지금 있는 것」이란 정밀기기센터를 의미했다.
金玩熙 박사의 회고.

『그것은 내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과기처를 승격시켜 상공부의 업무를 일부 떼어다가
전자공업진흥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란 어렴 풋한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진행은 한국 정부에서 잘하리라고 생각했죠.
저에게 진흥원을 맡기고 싶어하리란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전자공업진흥원 설립案은 그로부터 5년 동안 적임자를 찾지 못한 채
대통령의 서랍 속에서 잠을 자야 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金玩熙 박사를 통해 전자공업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金玩熙 박사는 朴正熙 대통령이 말년까지 가까이 했던 몇 안 되는 민간인에 속한다.
朴대통령은 상공부 공업국장에서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근무했던 吳源哲(오원철) 수석을
金玩熙 박사에게 소개하면서
『이쪽은 우리 吳수석 , 아니 吳박사고, 또 이쪽은 우리 金박사요』라며
「우리」란 표현을 이름 앞에 붙이기 시작했다.
이후 金玩熙 박사가 한국에 들르면 『우리 金박사 , 어서 오시오』라며 반가이 맞아주었다.
金玩熙 박사는 공식 직제도 없이 상공부, 체신부, 과기처를 오가며
오늘날 정보통신부 관련 업무에 고문 역할을 계속했던 것이다.

朴대통령과 金玩熙 박사 사이에 오고간 편지는 130여 통에 달한다.
金玩熙 박사는 朴대통령의 지원하에
금성사, 삼성전자, 대우전자, 아남전자 , 대한전선 등
국내 전자업계의 경영자들과 만나 정보를 주거나 외국의 믿을 만한 회사를 소개해 주었다.
국내 기업에서 요구하는 정보를 조사해 주기도 했다.
朴대통령은 그런 金박사를 귀하게 여겼다.

金玩熙 박사가 1976년 1월7일, 겨울 휴가를 받아 조선호텔에서 묵고 있을 때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가보니 朴대통령이 포항 부근 油田(유전)개발에 흥분해 있더란 것이다.

『집무실에서 朴대통령은 저에게 작은 유리병에 든 검은 기름같은 걸 보여 주시면서
매년 석유 수입에 들어가는 외화 규모와 석유를 자급자족하게 됐을 때
국가 이익과 산업 발전에 끼치는 영향 등을 열심히 설명했어요』
한참 신나서 이야기하던 朴대통령은 갑자기 멋쩍은지
『金박사! 어린애들이 돈 몇 푼 얻어서는 무슨 사탕을 살까 이것저것 궁리하는 것 같지?』라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1968년 여름, 金玩熙 박사로부터 전자공업 관련 브리핑을 들으며
국제시장의 변화를 읽을 수 있게 된 朴대통령은
당시 성심여자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던 큰딸 槿惠양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로 진학시켰다.
1974년 8월15일 陸英修 여사가 피살된 뒤 朴槿惠양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게되자
金玩熙 박사는 槿惠양에게도 연락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전자 공학을 전공한 槿惠양과 金박사는 전문용어로 대화를 할 수 있어
의견전달 이 매우 용이하고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한국 전자산업 발전에 槿惠양이 세운 공적은 외부 사람들이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母親이 사망한 후부터 전자산업 육성에 큰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도왔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의 전자산업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陸英修 여사가 피살된 후 朴대통령은 공식행사나 테이프 커팅 같은
번거로운 행사를 부질 없게 생각하며 꺼리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槿惠양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특히 1969년부터 시작된 電子展은 매년 朴대통령이 참관하며 관심을 표명했지만
1977년에는 槿惠양 단독으로 참가했다.
1978년의 電子展에는 槿惠양이 朴대통령을 설득해 함께 참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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