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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etwork        
작성일 2009/01/08 (목) 18:22
ㆍ조회: 1568   
성혜림과 친구란 이유 때문에

◎김정일 집안 사정 안다는 죄로 35년 고생한 탈북자 이야기

 [김영순의 육필 수기] 체포에서 탈북까지 처참했던 나의 35년]

[최초공개]김영순 수기 ‘요덕스토리’
김정일 부인 성혜림과 친구라는 이유로10년이나 요덕에 수용됐다가 풀려난 뒤 탈북한 김영순의 육필 수기
<이 기사는 weekly chosun 2038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북한 인권유린의 대명사로 불리는 함경남도 요덕 정치범수용소에서 1970년부터 1979년까지 10년간 수감생활을 한 김영순(72)씨.

북한판 ‘아우슈비츠’에서 부모와 자식을 잃고 탈북자가 된 김씨가 인권의 사각지대인 요덕수용소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칠순의 나이에 펜을 들었다.

새해 1월 말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가제목)라는 수기를 출간, 요덕에서의 처절했던 삶을 고발할  예정이다.

주간조선은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는 북한의 인권유린 실상을 조명하는 차원에서 김씨의 양해를 얻어 수기를 사전에 입수, 요약 소개한다.

중간에 있는 해설 기사들과 따옴표 안에 넣은 김씨의 말은 김씨와의 인터뷰 등을 통해 보강한 내용이다.

보위부 예심과 312호 (1970년·33세)
기차역서 느닷없이 연행… “성혜림과 나눈 얘기 다 적어라”
노부모·네 자녀와 요덕행… 이유도 모른 채 공포에 눈물만

 ▲ photo 허재성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김영자(김영순) 동무 맞습네까?”

평양 협주단 무용수를 그만두고 평양 시내 여행자상점에서 근무하던 나는 1970년 8월 1일 신의주 출장 명령을 받고 서평양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중 보위부 직원들에 의해 강제로 연행됐다.  

여행자 상점은 북한 고위층이 해외에 나갈 때 물건을 구입하던 곳이다.  

그때 나는 4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북한 사회에서 ‘엘리트’로 살아온 나는 보위부 직원에게 연행될 당시만 해도 요덕수용소에 수용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북한 사회에서 혁명열사의 집안으로 당국의 혜택을 받고 살아온 터라 ‘사상적인 측면에서 전혀 하자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인도된 곳은 병원으로 위장된 보위부 312호 예심과였다.  

보위부 312호 예심과는 평양시 보통강 구역 대타령동에 있는 비밀 초대소다. 이곳에서는 1호 정치범(김일성 관련)을 주로 취급하는데 사상 검증 등의 심사를 한다. 심사기간은 보통 2개월 안팎이다.  

나는 이 초대소에서 꼬박 60일을 보냈다.  

보위부는 내가 33년간 살아온 모든 이야기를 기록하도록 했다.  

태어난 곳부터 누구를 만나고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또 가까운 지인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적도록 했다.  내가 적은 내용 중에는 성혜림이 내 아파트에 잠시 들러 “김정일의 가계로 들어가게 됐다”는 얘기를 나눈 것도 포함돼 있었다.

조사 직후, 보위부 직원들은 “조선노동당원으로서 영자(영순) 동무가 한 말이 남한에 전달되었다고 할 때 얼마나 엄중한 과오를 범했는지 알겠습네까. 이 시각 이후 당이 취하는 조치에 무조건 복종하시오”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리고 나는 칠순이 넘은 노부모와 자녀 4명과 함께 함경남도 요덕행 기차를 탔다.  

나는 너무도 무서워서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흘렸다.  

엘리트 사회에 살다가 갑자기 인생 막장으로 끌려가는 기분은 공포 그 자체였다.  

조선인민경비대 제5군부대 (1970년·33세)
소금국·강냉이죽… “꼭 살아 나가자” 이 악물어
내가 잡혀가기 직전 남편은 국경 넘다 총살
 

우리 가족이 도착한 곳은 사방이 가시 철망으로 둘러싸인 조선인민 경비대 제5군부대, 즉 제15호 요덕정치범 수용소였다.

나는 이때부터 인권을 보장받을 수 없는 요덕에서의 지옥 같은 삶을 시작했다.매일 삶과 죽음의 사선(死線)을 넘나들어야 했다.

나는 공교롭게도 사지(死地)나 다름없는 수용소에서 남편이 국경을 넘다 총에 맞아 죽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들었다.

“수용소 입소 첫날 멀건 소금국과 통강냉이죽을 받아 든 순간 아찔함이 밀려왔다. 살아서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는 일념하에 죽을 힘을 다해 일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는 1950년대 중반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1958년 평안남도 북창군 득장 탄광지역에 최초로 통제구역이 설치됐다.  

처음에는 지주, 친일파, 종교인 등 계급투쟁의 타도 대상만 수용됐다.  

1968년부터는 김일성, 김정일 세습체제 비판자와 정권에 반발하는 사람들도 수용하기 시작했다. ‘북한판 아우슈비츠’로 불리는 요덕수용소는 1969년 함경남도 요덕군에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킨 후  들어섰다.  

부모와 큰아들을 잃다 (1971년·34세)
탈출하다 총살… 영양실조… 동상… 집과 들엔 시체 즐비
종일 중노동 대가는 강냉이 200g… 들쥐 잡아 먹는 사람도
 

“당신들은 무의식중에 당과 정부의 유일체계에 걸리는 발언을 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이곳은 사회로부터 격리된 통제구역입니다. 여기서 정말 당과 위대한 수령님을 위해 투신했을 때만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함경남도 요덕군은 서쪽에 맹산군, 북쪽에는 평안남도 대흥군, 동쪽은 금야군, 남쪽은 고원군의 수동 탄광지대와 마주하고 있는 해발 1700m의 험준한 산악지대다. 요덕수용소는 용평리, 평전리, 구읍리, 입석리,대숙리 등 5개 리를 합쳐서 만들었다.  

철조망 속에서 보면 험준한 능선밖에 보이지 않는 지역이다. 철조망이 없어도 그 자체만으로 천혜의 감옥인 셈이다. 수감된 정치범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도록 해놓았기 때문에 도주가 거의 불가능하다.  

북한 보위부가 만들어놓은 세계 최고의 격리 감시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요덕수용소는 끼니를 연명해 가는 것조차 기적이라고 여겨질 만큼 최악의 감옥이었다. 그야말로 죽음을 벗 삼아 살아야만 했다.  

수용소에 들어오면 배가 나온 사람도 보름이면 허리가 잘록해졌다.

배급 받는 식량은 통강냉이뿐이었다. 들쥐도 잡아 먹었다.  

어미 쥐의 배에 든 털 없는 새끼 쥐가 아이들 식독(食毒)에 가장 좋은 약으로 알려져 쥐도  귀한 형편이었다.  

수용소에 들어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아버지가 병들어 누웠다.  

 나는 여자의 몸으로 7명의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절박한 처지가 됐다. 새벽 4시30분에 출근하기 위해 3시에 눈을 떴고 어두워서야 귀가하는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 대가로 받는 게 통강냉이 200g 정도에 불과했다.  

 이로 인해 비타민 결핍으로 인한 ‘펠라그라병’, 즉 영양실조로 죽는 이가 많았다.

 1970년대 요덕에 수용된 전체 수용인원은 최소 수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 요덕군 용평리와 평전리에 수용된 인원만 5000명이 넘었다. 1개 작업반에 성인 노동 인력만 100명이 넘고 가족까지 합치면 400명을 상회했다.  

김영순씨 가족이 수용돼 있을 당시 두 개 리에 10개 작업반이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5000명 정도가 두 개 리에서 생활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요덕군 소재 다섯 개 리로 환산하면 1만5000명 정도다.  

수용소에서는 매일 죽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탈출하다 걸린 사람은 공개 총살형에 처해졌고 영양실조와 동상으로 숨진 시체가 집과 들에 즐비했다. 죽음의 그림자는 예외 없이 우리 가족에게도 들이닥쳤다.  

입소 1년여 만에 아버지도 영양실조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가장 큰 충격은 아들 세영이를 먼저 떠나 보낸 사건이었다.  

 1973년 여름 큰아들 세영이가 물에 빠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내게 세영이는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한 가닥 희망이었다.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깊어진 한으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머니가 없었더라면 그때 나는 자살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극단적 선택을 말려준 어머니도 수용소 생활을 그리 오래 버텨내지 못했다.  

마지막 보루였던 어머니도 1976년 1월 영양실조로 세상을 등졌다.  

나는 한없이 울었다. 김일성을 용서할 수 없었다. 북한 당국이 말했던 원수는 미국이 아니었다. 그들 스스로가 인간 백정이었다. 시체를 너무 많이 봐서 지금은 시체를 봐도 무섭지도 않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표현하는 슬픔은 북한에 비하면 너무 사소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내가 여자란 것도 잊었다`(1976년·39세)
초가집 맨 구들장에서 생활…4년간 생리도 멎어
어딘가로 끌려간 뒤 안 돌아오는 사람 수두룩
 

수용소에서의 비인간적인 삶은 남녀의 성별조차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먹을 게 없어 굶는 것은 다반사였다.

우리가 거주하던 초가집은 돗자리도 하나 없어 맨 구들장에 누워 지내야 했다.  남자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뱀을 잡아 먹고 이름 모를 병에 스러져 갔다. 완전 통제구역인 용평리 일대 수용소에 입소한 남자들은 대부분 제3의 장소로 끌려가 돌아오지 않는 일이 허다했다.  

수용소에 들어간 날부터 정신적·육체적 피로와 극심한 스트레스로 여자로서의 성별도 잃었다. 수용소에 들어올 무렵인 1970년 10월부터 4년간은 생리조차 멎었다.  수용소 여성들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매일 저녁이면 새로운 사람들이 시체로 바뀌었고 보위부원들의 압박은 심해졌다.

당시 수용소에 입소한 사람들의 죄명은 대부분 김일성과 체제에 대한 사소한 문제 제기 때문이었다. 북한 당국은 이들에게 ‘반체제’라는 죄명을 덮어씌워 요덕수용소에 강제 입소시켰다.

김씨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수용된 정치범 중 다수는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끌려왔다고 한다.  

 ‘김일성의 목에 혹이 있다’고 말한 사람, 김일성ㆍ김정일의 석고상을 깬 사람, 김일성 사진이 있는 신문으로 장판을 바른 사람, 외국 비디오를 본 사람, 김정일의 처 성혜림과 아들 김정남에 대해 말한 사람, 남한 방송을 청취한 사람 등이 대부분이었다.  

지옥에서 벗어나다`(1979년·42세)
성혜림이 김정일에게 버림받자 요덕서 해방
수용소 끌려갔던 이유도 출소 후에야 알게 돼
 

내가 국경을 넘은 것은 대한민국에 가서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1979년 1월 나는 요덕수용소에서 출소했다.

처음엔 나를 포함해서 7명의 가족이 입소했지만 10여년 뒤 출소할 때는 큰딸과 아들 2명을 포함해 생존자는 4명뿐이었다.  

우리는 다시 금광으로 유명했던 함경남도 장진군 중흥광산에 배치됐다.

하지만 출소 후에도 보위부의 감시는 계속됐다.  

그때서야 나는 왜 요덕수용소에 잡혀가게 됐는지 이유를 알게 됐다.  

함흥 지역 보위부 직원이 어느날 찾아와 “성혜림은 김정일의 처도 아니고 아들도 낳지 않았다.  새빨간 유언비어다.

 어디서 들었다거나 유포할 때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간 것이다. ‘내가 요덕에 가게 된 까닭이 거기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소 직후 평양을 잠시 방문했던 때 고영희가 성혜림 이후 김정일의 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영희가 김정일의 처가 된 것은 우리 가족이 요덕에서 출소한 시점과 일치했다.  

“보위부 직원들은 내가 수용소에 끌려간 이유와 출소하게 된 배경을 전혀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수용소를 나온 뒤 보위부에서 나를 관찰할 때 성혜림과 관련된 이야기에 유독 신경을 썼다. 고영희의 등장으로 내가 수용소를 나오게 됐다는 게 우연이 아님을 직감했다.” 나는 장진에서 함흥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인민반장을 맡아 25가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반원들은 예외 없이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매번 이어지는 자아비판 등을 통해 체제에 순응하기 바빴다.  

나는 최대한 반원들을 배려하며 15년 정도 이곳에서 살았다.  

 중앙은 물론 지방 말단 당원들의 권력 남용도 심각한 수위였다.  

구역당 비서쯤 되면 애첩이 하나씩은 있을 정도였다.  김일성 시대에는 이런 일을 용서치 않았지만 김정일 시대에는 눈감아 주는 분위기였다.  

그러다 다른 문제가 드러나면 스캔들로 엮어 처벌을 했다.  

북한에서는 지금도 ‘5호 댁’과 관련된 정보를 아는 자체가 ‘ 1호(김일성) 가계 권위와 위신 훼손’이라는 죄목으로 처벌 대상이다.  

국경을 넘다(2002년·65세)
썩을 대로 썩은 북한 사회, 뇌물만 주면 탈북도 가능
중국·베트남·캄보디아·태국… 늘그막에 자유 품으로

우리 가족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88년 막내 아들 충국이 탈북을 시도하다 잡혀 5년 동안 수용소에 감금됐고 재탈북 도중 붙잡혀 총살을 당했다.

이때부터 나는 북한을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1990년대 들어 악화되는 북한 실상을 보면서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다. 1980년대 중반부터 북한도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시장이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뇌물 문화가 일반화됐다.  

군인과 국경경비대 근무자들은 10만~100만원 벌기를 목표로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 돈을 받고 지역을 일탈하게 해줬고 국경도 무리 없이 드나들었다. 그들은 초기에는 여과(필터)담배 정도의 상납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달러나 엔화를 받아 챙겼다.  2002년 늙은 내가 안전하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던 데는 이처럼 썩을 대로 썩은 북한 사회의 모순이 한몫 했다.

1997년을 전후한 시기에 북한은 기아로 사망한 인구가 300만명에 이를 정도로 식량난에 허덕였다. 외부 원조가 없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군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실군(영양실조군대)’이라는 은어가 생길 정도였다.  

심지어 부모를 죽이는 엽기적인 사건까지 일어났다.  

1994~1997년까지 함흥지역 인구 85만명 가운데 5만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 북한 사회가 이처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으면서 탈북 행렬은 더욱 증가하게 됐다.  

1997년 나는 중국 사촌 집을 다녀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처음으로 국경을 넘었다. 그리고 나서 구체적인 탈북 계획을 세웠다.

우선은 돈이 급선무였다. 뇌물로 상납할 돈만 있으면 탈북은 충분히 가능했다. 2002년 6월까지 나는 국경을 통과할 때 쓸 로비자금을 마련했다.  

아들과 함께 두만강 1열차를 타고 청진, 남양을 거쳐 강을 건너는데  성공했다. 이동하는 곳마다 감시의 눈을 피해야 했기에 뇌물을 주기도 하고 숨죽이며 밤길을 걸어야 했다.  어렵게 국경을 넘어왔지만 창춘시 교화현 소재 교회에 숨어 있던 아들은 2002년 중국에서 외몽골로 탈출하려다 공안에 잡혀 북송됐다.

북송된 내 아들은 또 다시 세 차례에 걸쳐 탈북을 시도했다.

국경의 삼엄한 수비도 지옥 같은 북한을 탈출하겠다는 의지를 꺾지 못했다.

결국 아들은 중국 지린성에서 익명의 남한 목사를 만나 허난성으로 갔고 이후 약 5개월 동안 공안과 쫓고 쫓기기를 반복하며 태국까지 이동했다.

아들은 베트남 하노이의 ‘인삼가든’에서 탈북자를 돕는 인권단체의 도움을 받아 캄보디아로 이동한 후 2003년 10월 태국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나와 아들은 베트남 하노이에서 3개월 만에 재회했다.

“자유를 얻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죽음을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넜고 다시 중국의 감시를 피해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등을 거치는 동안  사실상 죽음 앞에 초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탈북자들에 대한 중국 정부의 단속이 심해지면서 2000년대 이후 탈북 루트는 동남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죽음을 무릅쓰고 두만강을 넘어온 탈북자들은 또 다시 베트남 또는 캄보디아까지 사활을 건 탈출을 감행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탈북자뿐만 아니라 탈북자를 돕는 이들도 상당수 신변 보호를 받지 못해 죽거나 붙잡혀 북송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탈북 단체들은 이와 관련, “탈북자 보호를 위한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고 탈북 도우미에 대한 인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성혜림의 친구’라는 죄
성혜림과는 중학 때 만나 예술학교서도 단짝
김정일, 유부녀 성혜림과의 관계 알려질까 전전긍긍
 

나는 김정일의 첫 번째 부인 성혜림과 절친한 친구였다. 혜림이와는 1937년생 동갑내기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헤이룽강성 융안현에서 임시로 거주할 당시 11년제 나남여중을 함께 다녔다.  

혜림은 성유경씨와 김원주씨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김원주씨는 1920년대 잡지 ‘개벽’의 여기자였다.  

나와 혜림은 전쟁이 끝난 후 평양에서 종합예술학교를 함께 다니며 항상 붙어 다녔다. 나는 무용을, 혜림은 영화연극을 전공했다.

 졸업 후 혜림은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 배치됐다가 4·25 영화촬영소 배우로 옮겨갔다.. 혜림이는 웃으면 보조개가 생겨 귀여웠고 사투리가 아닌 서울 말씨를 쓰는 착한 친구였다.

성혜림은 월북작가 이기영씨의 아들 이평과 결혼했다.  

이평은 러시아 유학시절부터 성씨에게 화장품 등의 선물을 소포로 보내며 사랑을 키워온 인물이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일이 평소 영화를 통해 흠모해오던 성씨를 데리고 갔기 때문이다.  

영화와 음악을 즐기던 김정일은 이평의 동생과 친구 사이였고 집을 드나들면서 성씨에게 연정을 느꼈다.  성씨는 영화 ‘온정령’ ‘분계선 마을’ 등에 주인공으로 출연하면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인민배우였다. 당시 성씨는 김정일보다 5살 연상이었다.

당시 김정일은 어머니와 일찍 사별해 연상의 여자인 혜림에게 마음이 끌렸던 것 같다.  김정일은 키가 작아 항상 뒷굽이 7㎝ 정도인 키 높이 구두를 신고 다녔다. 김정일은 지금도 영화와 음악광이라고 할 정도로 예술에 조예가 깊다. 오케스트라 연주에 참관하면 누가, 어느 부분에서 실수를 범했는지를 찍어낼 정도다.  

이기영씨의 작은 아들과 친구였던 김정일이 그 집을 드나들면서 혜림을 만나 연정을 느끼게 된 것으로 안다. 이평씨와의 사이에 딸 아이를 낳은 혜림이는 얼마 후 이혼을 했고 김정일의 비밀 거처로 옮겨 가 바깥 출입이 통제된 채 생활했다. 당시 통제된 삶은 나중에 혜림이가 러시아에서 병원 치료를 받게 된 원인 중 하나였다.  

김정일은 유부녀와 살림을 차리고 사는 것을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보안 유지에 신경을 많이 썼다. 내가 알기로는 혜림이 전에 이미 김정일에게는 2명의 여자가 더 있었다. 두 명의 여자에게 각각 딸이 1명씩 있다고 들었다.  

내가 살던 군관아파트 위층에 차계룡 영화촬영소장이 살고 있었고 혜림이가 그곳을 잠시 들렀을 때 우리 집을 찾아와 ‘5호 댁’으로 가게 됐다는 사실을 말해줬다. 혜림이는 2002년 러시아에서 죽었다고 들었다.  

나는 한국무용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최승희 선생에게서 사사했다.  

그래서 2006년 3월 15일 초연된 요덕스토리의 안무자로 참여했다.  

최승희 선생은 1950년대 강행된 숙청 작업을 피하지 못하고 요덕수용소 등을 거치며 말년을 불행하게 보냈다. 숙청 이유는 무용극에 승려를 출연시켰다는 것이었다. 결국 1967년 평남 북창관리소 (정치범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세계적 무용가도 사상과 공산수령 독재 앞에서는 한낱 어릿광대에 불과했다.

입력 : 2009.01.02 17:06 / 수정 : 2009.01.04 09:50

김영순 “김정일 집안 사정 잘 아는 것도 중죄
北 실상 알리는 것은 이제 나의 숙명”

요덕수용소를 고발하는 수기를 쓴 김영순(72)씨는 김정일의 첫 부인인 성혜림과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그리고 무용수로 활동하면서 크고 작은 공연에서 북한 고위층을 접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탈북자 중 김정일 가계와 북한 고위층에 대해 잘 아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지난 12월 22일 김씨를 만났다. 

요덕수용소 고발 책을 쓰게 된 계기는. “1979년 (요덕)수용소에서 출소했지만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1988년에는 막내 아들이 탈북을 시도하다가 잡혀 공개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용소에서 부모와 큰 아들을 잃은 충격을 겪은 터라 마냥 슬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대한민국에 가서 북한의 실상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것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이다.

1호(김일성) 가계를 잘 안다는 이유만으로 31년 동안 보위부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던 날들은 회상하기조차 싫었다. 하지만 책과 사회활동을 통해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일은 내게 주어진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김정일의 부인 성혜림이 사망한 이유는. “성혜림과는 중학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고 결혼할 때까지 가까이 지냈다. 그래서 내가 누구보다 혜림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2002년 러시아에서 죽은 원인은 자세히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작가 이기영의 아들인 이평과 이혼하고 나서 김정일 가계로 들어간 뒤 완전히 통제된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영화배우로서 자유분방하던 혜림이가 그곳 생활을 견뎌내지 못했던 것 같다. 고영희의 등장도 혜림이를 더 외롭게 했다. 신병 치료차 러시아를 오간 것도 당시 병이 생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성혜림의 가족이 국내에 생존해 있다고 하던데. “혜림이의 오빠 성일기씨가 한국에 살고 있다. 탈북하고 나서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다. 언니 성혜랑은 파리에 살고 있다. 아들 이한영이 탈북 후 북한 집권층을 분석한 책 ‘로열패밀리’를 쓰기도 했다.  

그 책은 큰 파장을 낳았다. 김정일의 요리사로 활동했던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보다 더 정확한 내용이었다. 그로 인해 1997년 북한 스파이의 총에 맞아 경기도 분당 자택에서 숨졌다. 이런 이유로 김정일이 성혜림과 사이에서 낳은 장남 정남이 후계자가 되기 어렵다는 얘기가 많다.”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은 요즘 어떤 역할을 맡고 있나. “김정남은 주로 해외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았기 때문에 후계자로서는 낙제점이다.  

내가 알기로 정남은 해외자금줄을 다 틀어쥐고 있다. 군사무기 수출 등으로 벌어들인 돈을 외국 계좌에 넣고 관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김정일 입장에서도 돈 문제에 관한 한 아들만큼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은 없을 것이다. 대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항상 정남은 해외에 상주한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김정일의 후계자로 누가 유력하다고 보나.  “고영희의 아들 정철과 정운이 주목 받고 있다. 김정일의 이복동생 평일도 유력한 인물이라고 들었다. 평일은 지금 폴란드 주재 북한 대사로 나가 있다. 처남 장성택도 후계구도의 변수가 될 수 있다. 그가 누구를 미느냐가 중요한데, 정남 쪽과 가까운 듯하다. 장성택은 최근 김경희와 별거 중이라고 한다.” 

북한에서 ‘1호 댁’과 ‘5호 댁’은 뭘 의미하나. “1호 댁은 김일성을 의미하고 5호 댁은 김정일 등 직계 가족을 의미한다.  

북한 사회에서는 이들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워낙 폐쇄된 사회인데다가, 김일성 가계에 대해 아는 것 자체를 중죄로 다스린다. 탈북자들이 삐라를 보내고 북한에 전파를 보내는 것은 북한 실상을 알려주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이다.”

이름아이콘 쓴소리
2009-01-08 19:57
탈북자가 각계 각층 골고루 분포되어있고 넘 많으니 좀 의심스러운 전도 있네요.
혹시 이들이 유사시 동원될 공작원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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