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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엉터리전도사
작성일 2018/04/04 (수) 11:03
ㆍ조회: 190   
종신집권 여는 혁명가의 아들, 시진핑 60년 탐구생활

종신집권 여는 혁명가의 아들, 시진핑 60년 탐구생활

중국이 시진핑을 택한 이유

 

한겨레/홍종길 기자 한달 전 중국 공산당이 국가주석 임기 제한 폐지 등을 담은 개헌안 제출을 발표했다. 인터넷 등 중국 여론에서 “과연 마오(쩌둥) 주석의 좋은 학생”이라는 반응이 눈에 띄었다. 시진핑이 마오쩌둥처럼 종신집권을 꿈꾼다고 비꼰 글이었다. 눈부신 경제·사회 발전에 걸맞지 않은 정치의 퇴보라는 비난의 화살은 분명 시진핑을 겨누고 있었다. 중국의 입법부인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어쨌든 개헌안을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키면서 시진핑 종신집권의 길을 터줬고, 그 첫걸음으로 국가주석 재선출도 만장일치로 확정지었다. 많은 이들은 적어도 5년, 길면 언제까지가 될지 모를 임기 동안 시진핑이 일당독재, 장기집권과 비민주성의 비난을 넘어설 수 있을지 묻는다. 그 이전에 우리는 거꾸로 그가 살아온 길이 일당독재, 장기집권, 비민주성을 향한 것이었는지 묻는다. 시진핑과 마오쩌둥의 이미지를 합성했다

▶ 지난해 크게 흥행했던 중국 정치드라마 <인민의 이름으로> 등장인물 가운데 ‘착한 역’ 3인방은, 사심 없이 일밖에 모르는 말단 행정관료 이쉐시, 고인 물처럼 썩어가던 지역에 외부에서 새로운 기운을 몰고 온 지도자 사루이진, 그리고 정의롭게 부패 수사를 주도하는 허우량핑 등이다.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알아챘듯이, 이들의 이름을 한 글자씩 떼어내 조합하면 ‘시진핑’이 된다.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고 얼마나 조작됐는지 따지기 시작한다면 끝이 없을 테지만, 시진핑이 자신이 걸어온 인생을 통해 그런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재료를 제공한 건 사실이다.

“중국의 권력은 공산당이 가지고 있고, 시진핑은 다만 공산당을 통해 그 권력을 행사하는 것뿐이다.”

중국 전문가인 케리 브라운 영국 킹스칼리지 교수가 지적하듯이, 시진핑과 그에게의 권력 집중은 당이 ‘새 시대’의 난국을 헤쳐가기 위해 내부적으로 이룬 합의라는 시각이 있다.

중국의 주요 모순이 제국주의도 식민주의도, 낙후한 사회생산도 아닌 ‘인민의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수요와 불충분·불균형한 발전 사이의 모순’으로 규정된 오늘, 그들은 왜 시진핑을 지도자로 선택한 것일까?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선 시진핑의 탄생부터 2012년 집권까지의 과정을 차분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진핑 탐구생활, 시작해보자.

1. 혁명가의 아들

중국인들은 모두 시진핑이 시중쉰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늘의 그를 있게 만든 가장 원초적인 자산이 바로 혁명가의 아들이라는 배경이다.

 시진핑에게 중국공산당 1세대 원로 가운데 하나인 아버지 시중쉰은 가장 든든한 정치적 자산이었다. 1980년대 아버지 시중쉰과 함께. 시중쉰(1913~2002)은 중국공산당 1세대 원로 가운데 젊은 축에 속하는 인물이다.

13살에 혁명에 투신했고 15살 때 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국민당 당국에 감금당해 옥중에서 공산당원이 됐다. 이후 농민 폭동을 기획했고, 21살에 산시(섬서)와 간쑤의 22개 현을 통제하는 ‘산간혁명 근거지’를 꾸려 대장정중인 홍군의 후방이 돼줬다. 22살의 시중쉰을 만난 마오쩌둥은 너무도 젊은 그를 보고 “이렇게 젊다니, 아이잖아!”라고 말했다.

시중쉰은 국공내전에서 펑더화이와 허룽을 도와 서북전장에서 큰 승리를 거둠으로써 ‘서북왕’이 됐다. 1949년 공산당이 정부를 수립했을 때 그는 서북 5개 성의 당·정·군을 모두 맡았다. 덕과 재능을 겸비했다고 일컬어졌던 시중쉰은 1950년대 초반 베이징으로 무대를 옮겨 중앙선전부에서 일하게 됐다.

시진핑이 태어난 건 바로 이 무렵이다. 시중쉰은 1944년 두번째로 결혼한 10살 연하의 치신과 사이에서 차오차오(1949년), 안안(1951년)이라는 이름의 두 딸을 낳은 뒤, 1953년 시진핑을, 1955년 시위안핑을 낳았다. 두 아들의 이름에 ‘핑’(平)이 들어간 것은 과거 ‘베이핑’으로 불렸던 베이징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두 딸 또한 태어난 지역에 따라 이름을 붙였다. 시중쉰의 전처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시중쉰과 사이에 1남2녀가 있었다.

시진핑의 어린 시절은 전형적인 엘리트 집안 소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베이징 중심의 엘리트층 교육시설이었던 베이하이 유치원과 고위 간부 자제들이 다니는 베이징81학교를 잇달아 다녔다. 이곳에서 교제하게 된 류사오치, 천윈, 보이보 등 다른 혁명가 집안의 자녀들은, 나중에 자신의 조력자 또는 경쟁자가 되는 이들이었다.

 중국중앙텔레비전 갈무리 지난해 3월 중국 관영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이 방영한 짧은 다큐멘터리 연작 ‘초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어릴 적 모습을 다룬 과거 이 방송사 프로그램 장면이 다시 나왔다

시중쉰은 평소 무명옷에 헝겊신을 신고 다닐 정도로 매우 검소했고, 가족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요구했다. 시진핑 형제는 누나들이 입던 옷과 꽃신을 물려받았다. 학교 아이들이 놀린다며 시진핑이 꽃신을 안 신겠다고 하자, 시중쉰은 “물들여서 신으면 똑같다”며 먹물로 물들여 신게 했다. 이 무렵 어머니 치신은 중앙당교에서 일하면서 월~금 출근과 잦은 출장으로 아이들을 잘 돌보지 못했고, 시중쉰이 아이 4명의 목욕과 빨래를 맡기도 했다.

중난하이는 비밀스러운 중국 최고권력의 중심이지만, 시진핑은 이곳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시중쉰은 원래 각 지역의 극예술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고향인 산시지방의 극예술 진강(친창)을 각별히 여겼다. 시진핑도 자연스레 이런 영향을 받아 훗날 진강에 대한 조예를 뽐내기도 했다.

2. 농민 속으로

그 시절 중국인 누구에게나 그랬듯이, 문화대혁명은 시진핑 가족의 일상을 송두리째 망가뜨렸다. 그가 9살이던 1962년 발생한 ‘류즈단’ 사건이 시작이었다. 서북 혁명 근거지의 창건자인 류즈단의 생애를 묘사한 소설을 작가가 류즈단의 전우였던 시중쉰에게 사전 검토를 맡겼는데, 이 작품에 등장한 또다른 전우 가오강이 미화됐다는 시비가 일었다.

시중쉰의 ‘전우’라 할 가오강은 마오쩌둥에 의해 반당분자로 찍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인물이다. 시중쉰도 반당 활동을 한 것으로 내몰렸고, 부총리 직위는 거의 즉각 해임됐다. 이 무렵 시진핑은 거실에 멍하니 앉아 수심에 싸인 아버지 모습을 자주 지켜봤다. 시중쉰은 마오쩌둥에게 농촌으로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그 청이 받아들여져 1965년 뤄양의 공장으로 무대를 옮겼다. 이 일로 부자는 7년 동안 헤어지게 된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하면서 시중쉰은 같은 사건으로 다시 시안에 끌려가 홍위병의 추궁을 당했다. 시진핑이 살던 집은 몰수됐고, 결국 어머니 치신이 재직중이던 중앙당교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다니던 학교는 고위 간부 자제 학교라는 이유로 해산돼 다른 학교로 배정됐다.

이곳에서 시진핑은 린뱌오에게 박해받은 공군 부사령관 류전 상장의 아들 류웨이핑, 중국의 유명 바둑기사 녜웨이핑과 친구가 됐다. ‘싼핑’(세명의 핑)으로 불린 이들은 ‘반동의 자식’이므로 홍위병이 될 수가 없었다. 맞아죽을 뻔한 위기도 겪었다. 마오 주석 어록은 읽었지만 출신 탓에 급진적 운동에 가담할 수 없었던 시진핑은, 결국 홍위병의 무자비한 폭력 행위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한겨레/베이징/김외현 특파원 2016년 5월 중국 베이징의 판자위안 골동품 시장에서 마오쩌둥, 덩샤오핑 조각상과 더불어 시진핑 흉상을 판매하는 모습.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니 시진핑 흉상은 500위안(약 8만5천원)에, 그보다 약간 작은 마오쩌둥 흉상은 150위안(약 2만6천원)에 팔렸다.  

1969년 막 초중(중학교)을 졸업한 16살 시진핑은 상산하향 방침에 따라 도시를 떠나 하방 생활에 투입됐다. 기차를 타던 날 다른 아이들과 부모는 울고 있는데, 시진핑은 몹시 기뻐했다. 친척들이 왜 웃느냐 묻자 그는 답했다. “내가 못 가야 울지요. 못 가고 여기 있으면 목숨이 붙어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니 내가 가는 것이 좋은 일 아닙니까. 왜들 울고 그러세요.”

하지만 하방 생활도 안전한 삶은 아니었다. 당시 농촌 주민들은 도움이 될 만한 기술도 없으면서 음식과 주거 면에서 부담만 되는 청소년들을 그리 반기지 않았다. 하방 생활 도중 청소년들이 농촌 주민들에게 매를 맞고 괴롭힘을 당하고 심지어 살해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시진핑이 얼마나 괴로움을 당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방 초기 시진핑이 육체노동의 괴로움과 농촌생활 부적응으로 몰래 베이징으로 도망갔다가 이모·이모부의 설득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이에 비해 키가 컸던 그는 독서를 즐기면서 육체노동도 할 수 있게 됐고, 의료보조원, 육체노동자, 수리공으로 일을 했다.

그럼에도 농민 생활을 절절하게 경험한 건 시진핑에게 둘도 없는 소중한 자산이 됐다. 농민 인구 비율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고는 해도, 지금도 여전히 절반 수준에 이른다. 더욱이 그가 하방 생활을 한 옌안은 혁명의 본고장이자 아버지 시중쉰의 근거지였던 산시성에 속해 있었다. 그곳엔 ‘서북왕’ 시중쉰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겨레 시중쉰 부부와 자녀, 손녀들. 왼쪽부터 아들 진핑, 작은딸 차오차오, 작은아들 위안핑, 손녀 난난, 시중쉰, 손녀 짠우, 손녀 샤오리, 치신, 딸 첸핑.

시진핑은 8차례 시도 만에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에 가입했고, 10차례 이상 시도한 끝에 공산당에도 입당했다. 곧이어 당 량자허 대대 지부 서기를 맡았다. 사람들과 격의 없이 잘 어울리는 시진핑은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밤에는 농민들이 시진핑의 토굴에 와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책에서 읽은 동서고금의 이야기와 삼국지, 수호지 이야기를,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베이징과 중난하이의 이야기를 농민들에게 열심히 들려줬다.

7년 동안의 하방 생활에 대해, 시진핑은 두가지 가르침을 이야기한다. “첫째, 실제란 것이 무엇인지, 실사구시란 무엇인지, 군중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었고, 둘째, 자신감을 키웠다. 칼은 돌 위에 갈고 사람은 어려움 속에 단련된다고 했다.” 훗날 그는 자신의 책에서 “인민의 공복의 한 사람으로서 산베이 고원은 나의 뿌리”라고 술회한 바 있다.

하지만 시진핑이 속한 세대 전체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청소년기 사고가 형성되는 시기에 정규교육 대신 문화대혁명을 겪은 탓에, 민주주의를 이해하거나 공감할 능력이 결여된 채 마오쩌둥 사상만을 일방적으로 주입받았다는 게 비판이 요지다. 그들이 하방 시기를 미화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는 공포와 불안 속에 떨었던 것 아니냐는 얘기다.

3. 대학 입학과 아버지의 복권

시진핑은 하방된 ‘지식청년’ 가운데 모집한 공농병 청강생으로 선발돼 1975년 칭화대 화학공정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수준의 수학·물리·화학 등 기초지식 습득이 먼저였다.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간단한 화학반응식도 알지 못해 힘들었지만, 유독 문학사에 흥미를 보였다.

그와 함께 화공과에 입학했던 천시는 그의 멘토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됐다. 천시는 대학 졸업 뒤 연구생으로 학교에 남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퍼드대 방문학자가 됐으며, 이후 칭화대 서기를 거쳐 지난해 정치국원이 되어 중앙조직부장 겸 중앙당교 교장을 맡고 있다. 시진핑은 저장성 서기 시절인 2006년 화공과 창립 60주년 행사에 축전을 보내 “칭화는 나를 길러주었고, 나는 칭화를 사랑합니다”라고 밝혔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가던 1976년 1월, 인후암에 걸린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났다. 잠시 복권됐던 덩샤오핑은 다시 모든 직무를 박탈당했다. 7월에는 주더가 사망했고, 같은 달 탕산대지진이 일어나 24만여명이 숨졌다.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나고 사인방이 붙잡혔다. 1975년부터 감시에서 풀려나 뤄양에서 가족과 ‘요양휴식’ 조처를 받은 시중쉰은 사인방의 퇴장을 계기로 당에 편지를 보내 복귀를 요청했다.

 한겨레 시진핑은 2007년 10월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9인)에 입성하며 정치적 입지를 탄탄히 다졌다.  

1978년, 시중쉰은 드디어 베이징으로 돌아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이 됐다. 곧이어 해방군 원수 예젠잉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광둥성 제2서기에도 임명됐다.

연말에 시중쉰은 제1서기를 맡았고 양상쿤이 제2서기를 맡아 개혁개방의 첨병으로 나섰다. 1979년 시중쉰의 건의에 따라 덩샤오핑은 선전, 주하이, 산터우, 샤먼에 경제특구를 설치하기로 확정했다. 중국공산당은 정식으로 ‘류즈단’ 사건에 대한 오류를 수정해, 시중쉰의 반당 혐의를 벗겨줬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 처음부터 전폭적인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자본주의 체제와 해외 자본으로 중국 제조업을 일으킨다는 구상은 많은 공산당원들의 신념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도 마오의 원리주의를 신봉하는 ‘좌파’가 이런 흐름을 껄끄러워하는 데 견주면, 그때는 극좌의 늪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때였다. 그러나 흔히 ‘개혁개방의 선구자’로 불리는 시중쉰 같은 인물이 있었기에 덩샤오핑도 개혁개방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는 게 중론이다.

훗날 중국공산당 집권 이래 가장 성공적이고 인기를 얻은 개혁개방 정책에 시중쉰이 깊이 연관됐다는 것은, 시진핑에게 두고두고 크나큰 후광을 비춰줬다. 문화대혁명의 풍파를 일찍부터 겪으면서 극좌주의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그 시절에 대한 부담이 시진핑에겐 없었다. 오히려 이어진 개혁개방을 겪으며 역으로 정치적 자산을 적립할 수 있었다.

4. 군부 경력

시진핑은 1979년 대학을 졸업한 뒤 정치국원이자 국무원 부총리 겸 중앙군사위 비서장이었던 겅뱌오의 비서가 됐다. 1970년대 후반부터 당 원로들은 고위 간부 자제들의 정치적 양성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자식을 상호 교육하거나 주변의 비서로 만들어 가까이 두는 방식 등을 활용했다.

겅뱌오는 후난 출신의 군인이자 외교관으로 1949년 건국 뒤 군복을 벗고 스웨덴, 파키스탄, 미얀마, 알바니아 대사 등을 역임하고 대외연락부장을 지낸 뒤, 당정군을 넘나드는 고위직에 올라 있는 상태였다. 시진핑은 군복을 입은 현역 군인으로서, 이 존경받는 군인의 시중을 들었고, 업무 스케줄, 내빈 접대, 연설문 초안 등을 맡았다.

이 무렵 그는 한 외교관의 딸과 첫번째 결혼을 했으나, 결혼 생활은 원만치 않았다. 장인(외교관)이 주영국 대사관에 파견되면서 딸을 데리고 갔지만, 시진핑은 함께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1983년께 이혼했다.

한편, 마오쩌둥 사후 사인방을 제거한 화궈펑과 예젠잉의 신임을 얻었던 겅뱌오는, 뒤이은 후야오방-덩샤오핑 집권 이후 차차 쇠락했다. 그는 1981년 또는 1982년께 시진핑에게 좀더 장래가 있는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권한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과 가까이 있는 것이 젊은 시진핑에게 부담이 될 것으로 판단한 셈이다.

이와는 달리, 겅뱌오가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시진핑 스스로가 직접 한계를 절감하고 그를 떠나기로 결정했다는 설도 있다. 곰곰이 유추해본다면, 군에서 계속 경력을 쌓으면 미래 선택권이 좁아지지 않을까 우려했을 가능성도 있다. 개혁개방이 한창 진행되던 당시 중국 사회의 주무대는 군에서 민간으로 옮겨가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5. 가장 낮은 곳으로

1980년대. 개혁의 황금기이던 이 시절, 시진핑은 우선 가장 낮은 곳, 기층으로 가는 길을 기꺼이 선택했다. 이는 훗날 그를 가장 빛나고 단단하게 만들어준 선택이었다. 당시 농촌 지역엔 여전히 중국 인구 85%가 살고 있었다.

1982년 3월 시진핑은 베이징의 친지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허베이성으로 옮겨갔다. 어느 인민공사에 서기를 맡겨달라고 요구했더니, 허베이성 제1서기 진밍이 그를 정딩현 부서기에 배치했다. 베이징에서 남쪽으로 300㎞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삼국지’ 조자룡의 고향이었다.

한겨레 1983년 허베이성 정딩현 부서기 시절 시진핑이 가벼운 차림으로 면화밭을 시찰하고 있다.

시진핑은 도서관에서 지역 역사책인 ‘정딩현지’를 빌려 통독하고 시찰을 통해 주요 상황을 파악했다. 일반적인 태자당(혁명가의 자녀들)이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인상을 준 것과 달리, 시진핑은 낡은 군복에 검정 헝겊신을 신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훗날 정딩현의 민중들이 전하는 그의 회고담을 보면 “아버지 이야기보다는 하방 생활 이야기를 더 좋아했다”, “항상 작은 쇠그릇을 들고 다른 사람과 함께 나무 아래서 면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술과 친구를 좋아했지만 과음하진 않았다.

특히 당의 방침에 따라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러난 원로 간부들을 살갑게 보살피면서, 그들이 우선적인 진료와 의약비를 제대로 제공받도록 제도화했다. 열심히 일하는데다 능력 있고 인기도 많았던 시진핑은 1년8개월 뒤 서기로 진급했다.

여전히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고 지도층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보수적인 정딩현 공무원들이 개혁개방에 소극적이었지만, 아버지가 있는 광둥성을 경험한 시진핑은 과감한 시장화를 주문했다. 드라마 ‘홍루몽’의 세트장을 정딩현에 유치하면서 관광산업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마련한 것도 그의 업적이다.

6. 개혁개방의 본고장에서

1985년 6월 시진핑은 푸젠성 샤먼시 부시장이 됐다. 이후 닝더 서기, 푸저우시 서기, 푸젠성 부서기, 푸젠성장이 되기까지 17년 반 동안 시진핑의 관료 생활은 푸젠성에서 이뤄졌다. 개혁개방 바람이 가장 먼저 분 푸젠성과 광둥성에서의 근무는 성과를 내고 싶어하는 전국 관료들이 모두 바라던 일이었다. 시진핑에게는 고위 간부 자제라는 든든한 배경이 큰 힘이 됐다.

특히 당시 푸젠성 서기였던 샹난은 시진핑 아버지 시중쉰의 후원을 받는 개혁파의 대표 주자였다. 샹난은 시진핑이 샤먼에 도착하자 직접 그를 만나 개황을 소개해주면서 격려했다. 하지만 샹난은 같은 해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가짜약 사건’에 휘말렸다.

당시 사건은 실제 피해가 발생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과장됐고, 개혁파 샹난에 대한 보수파의 반격 성격이 뚜렷했다. 샹난은 이 지역에서 농민들이 자금을 모아 세우는 향진기업을 장려했지만, 보수파는 이를 자본주의 부활이라고 비판하던 터였다. 푸젠과 일본 히타치가 함께 만든 합자회사 ‘푸르사’가 인기를 끌었으나, 보수파는 이마저도 ‘식민지 성격’이라고 백안시했다.

샹난은 강직했다. 이 사태에 앞서 디스코춤이 청년들의 열광과 방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당내 이론 권위자의 지적이 담긴 편지에, 샹난은 “우리 당과 정부가 청년들이 어떤 춤을 춰야 하고 어떤 춤은 춰선 안 된다고 규정하는 것이 반드시 통용될 수도, 타당할 수도 없다”고 반박했다.

답장을 받은 이론 권위자 후차오무는 샹난 퇴진 운동에 가장 적극적인 인사가 됐다. 이때 시진핑은 샹난의 기개에 탄복했지만 결국 정치 폭풍에 휘말리는 것을 보며, 중국 땅에서 자신의 뜻을 지나치게 강조하려 들면 끝이 좋지 않고 온건해야만 끝까지 갈 수 있다는 교훈을 새겼다.

시진핑은 샤먼에서의 3년이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유명한 인민가수 부인 펑리위안을 만나 두번째 결혼을 한 때가 이 무렵이기도 했다. 그러나 부부는 함께 살지 못하고 베이징과 푸젠에 각각 떨어져 사는 생활을 지속했다.

뒤이어 푸젠 산간 빈곤 지역인 닝더의 서기로 옮긴 시진핑은 관료들의 심각한 부패를 절실히 겪었다. 부동산 개발과 토지 매각 과정에서 뇌물과 불법 보수 등 갖은 종류의 부패가 횡행했다.

당·정부 공직자들이 자기의 배를 불리기 위한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시진핑의 주장은 이때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시진핑 재임 기간 닝더의 부패 현실이 개선된 건 아니었던 듯하다. 오히려 몇년 뒤 매관매직과 예산 탕진, 동료 간 간통 등의 심각한 집단 부패 사건이 드러나 충격을 줬다.

1989년 6월 발생한 천안문(톈안먼) 사건 당시 군사 개입에 반대했던 시중쉰이 실각했다. 세상은 개혁개방의 중단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이뿐 아니다. 곧이어 동구권이 무너졌고, 중국 내 좌파는 개혁개방에 대한 비판을 더욱 노골화했다.

하지만 1992년 덩샤오핑은 ‘남순강화’로 개혁개방 유지를 선언했고, 그때 지방 관리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1990년 5월 성도인 푸저우시 서기로 승진한 시진핑도 격려를 받았다.

푸저우는 대만을 바라보는 항구로, 시진핑은 해외 투자, 특히 대만 자본과 동남아 화교 자본 투자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그가 정책결정에 참여한 일부 사업은 혹평에 시달리기도 했다.

특히 창러공항은 인근 샤먼에도 있는 국제공항을 시내에서 45㎞나 떨어진 곳에 왜 또 짓느냐는 비난을 받았다. 공항이 문을 연 지 5년도 되기 전에 11억위안의 손해가 발생한 것으로 파악되면서 국가심계서가 타당성 검토 오류 및 과도한 부채 등을 지적하고 나섰다.

보고서가 나왔을 때 시진핑은 푸젠성장이었고, 이에 대해 채무 해결 방안 등을 만든 뒤 결국 샤먼공항에 관리권을 넘겼다. 샤먼공항이 창러공항의 자본 구조 개선에 나섰을 무렵, 시진핑은 이미 저장성 서기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

푸젠성장 시절 시진핑은 대만에서 민진당 출신 천수이볜 총통이 집권하는 최초의 정권교체를 목도했다. 양안관계의 긴장과 푸젠성에 대한 투자 악화가 이어졌다. 한편으로는 관료들이 연루된 위안화그룹 밀수 사건이 터져 관료사회가 벌집을 들쑤신 듯했다. 영국 도버항에 도착한 냉동차에서 푸젠성 출신 밀항자 58명의 주검이 발견돼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푸젠성장 3년 동안 시진핑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7. 중앙위원회 진입과 지도자 경쟁

1997년 중국공산당 제15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에서 시진핑은 중앙위 후보위원에 당선됐다. 순위는 151명 가운데 151위, 꼴찌였다. 원래대로라면 150명으로 끊었을 텐데, 시진핑의 입성을 위해 1명을 증원했다는 관측이 팽배했다. 이때부터 당은 그를 지도자 후보로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자력으로 충분히 득표하지 못한 데는, 태자당에 대한 대표들의 반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Kevin Frayer via Getty Images 중국의 입법부인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최근 국가주석 임기 제한 폐지 등이 담긴 개헌안을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키면서 시진핑 종신 집권의 길을 터줬다. 사진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10월1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 개막 연설 뒤 인사를 하는 모습

시진핑은 2002년 10월 당대회 직전 저장성으로 옮겨 부서기 겸 성장 대리로 부임했다. 당대회가 끝나자 49살의 시진핑은 정치국원으로 승진하면서 저장성 서기가 됐다.

저장성은 광둥과 장쑤에 이어 국내총생산(GDP) 전국 3위를 기록하고 있었고, 알리바바 등 세계 무대로 도약하는 기업들의 본거지였다. 그에겐 전임자 장더장의 그늘에서 벗어나 경제 도약을 이뤄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고독과도 싸워야 했다. 지방정치의 과도한 성장을 막기 위해 성 서기나 성장은 출신지가 아닌 곳으로 발령하는 제도적 특성상, 지역 인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성과를 내야 했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무렵 아버지 시중쉰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때부터 미래의 지도자 ‘후보군’으로 거론된 인물은 시진핑과 리커창, 리위안차오, 보시라이 등이었다. 흔히 ‘4대 천왕’이라고 일컬어진 인물들이다. 1980년대 후진타오가 단장이던 공청단에서 그를 알게 된 리커창은 시진핑이 성 서기가 됐을 때 역시 허난성 서기가 됐다.

시진핑보다 2살 어린 47살 때다. 이후 랴오닝성 서기로 있으면서 민생 개선에서 성과를 냈다. 하버드대 유학을 다녀온 리위안차오는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보시라이는 상무부장으로 무역전쟁 국면에서 중국의 권익을 지키는 데서 공을 세우고 있었다.

2006년 9월 상하이시 서기 천량위가 중앙과의 마찰 속에 낙마했고, 당대회를 불과 몇달 앞둔 2007년 3월 시진핑이 후임 상하이시 서기로 깜짝 발탁됐다. 시진핑이 간발의 차로 경쟁자들을 앞섰다는 신호였다.

공청단이 지나치게 강화되는 것을 막고 각 정치역량 간 균형을 도모한 결과라는 풀이가 나왔다. 시진핑은 남동생에게 상하이를 떠나 있으라고 한 것으로 전해질 정도로, 이때부터 극도로 몸을 낮췄다.

2007년 10월 당대회가 끝나고 새 지도부가 공개될 때 시진핑은 경쟁자 리커창과 9인의 상무위원회에 함께 입성했음을 세상에 알리면서, 리커창보다 몇발짝 앞서 입장하며 ‘승리’를 선언했다.

Carlos Barria / Reuters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7년 4월6일(현지시각)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열린 만찬장에서 악수하고 있다.

시진핑과 리커창 둘만을 비교하면, 베이징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박사 학위 논문으로 상까지 받은 뒤 1993년부터 공청단 제1서기를 맡아 정부급(장관급)에 오른 리커창의 학력과 경력이 더 화려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업무 경험을 보면 공청단에 들어가 16년을 일한 리커창보다, 기층으로 뛰어가 빈곤지역과 경제특구(샤먼)를 거친 시진핑이 더욱 폭넓은 경험을 했다고 평가됐다.

시진핑은 상무위원을 맡아 중앙서기처 서기로 일하면서 당의 사상, 이론, 선전 분야 업무를 맡았고, 베이징올림픽 시기에는 준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티베트 시위와 그에 따른 성화 봉송 논란, 쓰촨대지진 등 속에서도 올림픽은 나름 성공적으로 개최됐다.

하지만 그 후로는, 상무부총리로서 복지와 거시경제 발전을 맡은 리커창과는 달리 시진핑의 모습은 한동안 잘 드러나지 않았다. 당대회를 두달 앞두고 2주가량 공개석상에 나타나지 않아 갖은 관측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2012년 11월15일 결국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주석을 물려받고, 이듬해 3월17일 국가주석에 선출돼 중국 최고지도자에 등극했다.

그 뒤 ‘반부패 드라이브’ 과정에서 정적들이 사라지는 등 집권이 강화되는 흐름이 이어졌다. 마침내 최근 열린 ‘양회’에선 개헌을 통해 국가주석 임기 제한이 폐지됐다. 시진핑 장기집권의 길이 활짝 열린 셈이다.

※ 참고도서
케리 브라운 지음, 도지영 옮김 (시그마북스, 2017)
우밍 지음, 송삼현 옮김 <시진핑 평전>(지식의숲,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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