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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현식
작성일 2014/01/28 (화) 15:03
ㆍ조회: 1569   
채명신 장군과 나<박경석>

 ◇첫 만남 

 1965년 여름, 나는 경남 진해 육군대학에서 대부대학(大部隊學)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 무렵 서울에서는 한국군 전투사단 월남전 파병이 한참 논의되고 있었다. 국회에서도 여당과 야당이 찬반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여당은 파병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고 야당은 반대했다.육군대학 안에서도 모든 장교들이 월남전 전투사단 파병 문제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전체 장교단의 분위기는 대체로 찬성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찬성이유는 한결 같이 군의 현대화에 대한 염원과 전투경험 축적으로 북한군보다 우위의 전투력 확보에 모아졌다.

 내 강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교수부장이 강의실로 들어와 내 강의를 중단시켰다. 나는 물론 학생 장교까지 뜻밖의 일로 놀라는 기색으로 교수부장을 바라보았다. 교수부장은 나에게 다가오더니 즉시 총장실로 가보라고 했다. 나는 의아해 하면서 학생 장교들에게 강의를 잠깐 중단한다는 말을 남기고 곧바로 총장실로 향했다.

 당시 육대 총장은 박중윤 소장이었다. 총장은 내가 들어가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기다렸다는 듯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박 중령 , 축하하네.이번에 월남에 파병되는 전투사단 초대 대대장 요원으로 선발되었네. 강의 중이라도 중단하고 즉시 수도사단으로 가보게"

 전혀 뜻밖이었다. 육군본부에 의해 즉시 부임 시키라는 지시가 지휘선상으로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군인으로서 갑작스러운 명령이 영광스럽다고 생각하며 감동에 젖어 눈물까지 글썽이었다. 그동안 알려진 내용에 의하면 전군에서 대대장을 성공적으로 마친 가장 우수한 장교 가운데 6.25전쟁에서 무공훈장을 받은 전쟁영웅을 선발 중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는데 내가 선발되었다면 이 이상 명예스러운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총장님, 육군대학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부끄럽지 않게 잘 싸우고 돌아오겠습니다."

 나는 그말만을 남기고 강의실을 들리지도 못한 채 짐을 챙기고 수도사단 주둔지인 강원도 홍천으로 향했다. 이렇게 파월 전투사단의 편성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오후 늦게 수도사단 사령부에 도착한 나는 행정 절차를 밟은 즉시 사단장에게 신고 하기 위해 사단장 실로 안내되었다. 이미 일과시간이 지난 저녁무렵이었으나 사단장은 퇴근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사단장 실에 들어가기 전 사단 인사참모로부터 사단장도 2일 전에 새로 부임했는데 채명신 장군이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채명신 장군이라면 육군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영웅으로 알려져 왔기 때문이었다. 그 유명한 장군을 직속상관으로 모신다는 자체가 나에게는 행운이라고 생각하였다. 채명신 장군은 6.25전쟁시 육군중령의 계급장을 달고 적 후방에 백골병단 유격대를 이끌고 잠입해 인민군 현역 중장이며 대남 유격대 총사령관 길원팔을 생포한 당사자였다. 더구나 나는 육군대학에서 6.25전쟁사를 전공하면서 M1고지 탈환 전 등으로 38선 이북 강원도 넓은 땅을 점령 확보하는데 직접 기여한 채명신 제60연대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당사자를 나의 직속상관으로 모실 수 있다니.. 나는 직업 군인으로서 축복이라고 생각했다.그동안 채명신 장군의 말만 들었지 단 한 번 대면한 적이 없는 초면이었다.

 사단장 실에 들어선 나는 또한 번 놀랐다. 몹시 젊고 키도 나보다 훨씬 컸다. 잘 생긴 얼굴이었다. 나는 긴장하고 서있다가 인사참모의 안내로 부동자세를 취해 채명신 장군 앞에 서서 신고를 마쳤다. 날카롭게 생긴 얼굴에 미소를 띠자 금시 미남으로 변했다.무섭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정겨움이 마음 한구석에서 움트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으면서 나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맑은 음성이었다.

   "박경석 중령, 어린 나이에 정규 육사생도로 입교한 후 6.25전쟁을 맞아 전장에 투입. 무공훈장까지 수훈한 전쟁영웅을 대대장으로 맞으니 나에게 큰 힘이요.우리 잘해 봅시다."

  반말을 하지 않고 경어로 첫 말을 시작했다. 나는 송구스러워 더 긴장했다. 그는 나에게 웃으며

   "앞으로 함께 싸울 전우 간인데 긴장하지말고 웃어보시오. 내가 그렇게 무섭게 보이는 거요?."

 그래도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채명신 장군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로 나에게 당부하는 것이었다.

   '월남전은 솔직히 말해서 우리 조국을 수호하는 전쟁이 아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탈취할 목표는 없다. 그렇다고 군인정신을 일탈하면서까지 비겁하거나 소극적인 전장군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압도적인 정신력으로 기발한 전술로 싸운다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그 전제는 부하들을 '골육지정(骨肉之情)'으로 통솔하며 한국군에게 없는 전술교리를 만들어 보자. 내가 월남에 가면 우리 부대들을 미군처럼 현대화하는데 힘쓸 것이다. 그렇게 임무를 완수한다면 우리는 국군 현대화에 기여하는 선도자가 될 것이며 우리 국군은 일류군대가 될 수 있다.'

 채명신 장군의 말 한마다 한마디는 내 가슴 깊이 새겨지고 있었다. 특히 나는 채명신 장군의 말 가운데 "월남전에서는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 탈취할 목표는 없다"는 데 내 뜻과 일치함을 느꼈다. 나는 진해에서 홍천에 오는 동안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의 전쟁에 끼어 들어 목숨까지 바치면서 싸워야 되는가의 물음에 대한 해답을 채명신 장군이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이어서 군인정신의 일탈과 비겁함을 배제한 것은 월남전에 임하는 우리 참전 장병에게 내린 정답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사단장 실에서 나오면서 멋진 남자다. 내가 여자라면 반하겠다고 생각하면서 그와의 첫 만남에 가슴 설레 이었다

◇강재구 대위 수류탄 사고 

 강원도 홍천 맹호시단 전투훈련장에서 발생한 제1연대 3대대10중대장 강재구 대위의 수류탄 사고는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엄청난 자괴감에 시달려야 했다. 내 휘하 중대장의 죽음은 책임의 일단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대에서 설정한 수류탄 훈련장은 사단이 주둔하기 이전에 이미 제1군단 하사관학교 수류탄 훈련장으로 사용했었다고 해서 나는 그대로 승인했었다. 사고 후 확인한 수류탄 훈련장은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착탄 지점이 아래를 향하고 있지 않고 위로 경사져 있었기 때문에 잘못 던지면 거꾸로 튀어 오를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비록 강재구 대위의 죽음이 부하 중대원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수류탄을 온 몸으로 덮쳐 순직한 그 정신은 위대한 살신성인이었지만 그렇다고 대대장 자신의 지휘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대대장의 책임은 강재구 대위의 죽음 직전의 행위와는 관계가 없고 사고 자체에 있기 때문이었다.

 강재구 대위의 순직은 1965년 10월 16일 부산항 출발을 앞 둔 불과 12일 전인 10월 4일이었다. 다음날이면 모든 전투훈련이 끝나게 되어있었다.

 10월 4일 10시 37분에 순직한 강재구 대위의 수류탄 훈련장은 대대본부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즉각 현장에 달려 갈 수 있었다. 그때 나는 강재구 대위의 처참한 주검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만약 나였다면 부하를 살리기 위해 수류탄 떨어지는 지점으로 달려가 수류탄을 내 몸으로 덮칠 수 있을까?' 하고 물었다. 순간 나의 해답은 '아니다' 였다. 만약 나였다면 수류탄 떨어지는 반대 방향에서 업드렸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강재구 대위의 죽음이 신의 경지에 들어선 위대한 순직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강재구 대위가 순직한 그날 밤 나는 한 잠 못이루고 고뇌하다가 날이 샐 무렵, 내 감상이 담긴 사건 개요와 사고의 채임을 지고 대대장 직에서 물러날 뜻이 담긴 보고서 2부를 작성하여 다음날 아침 연대장 김정운 대령과 사단장 채명신 소장에게 올렸다.

 당시 출진을 앞둔 긴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장례식은 제2야전병원에서 간소하게 치루어졌다.모든 것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으로 알았고 나는 대대장 해임명령을 기다리는 것만이 남아 신변정리를 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부하 중대장 강재구 대위를 잃은 슬픔과 나의 군대생활이 이것으로 끝날 것이라는 허망함이 나를 압박하고 있을 때. 뜻밖에 사단장 채명신 장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박경석 중령의 보고서를 잘 읽었다. 강재구 대위의 살신성인은 영원히 우리 국군의 귀감으로 남을 것이다. 오늘 기자회견에서 박 중령의 보고서를 발표했고 상부에도 보냈다. 박 중령의 지휘책임은 없다. 계속 열심히 임무완수에 매진하라"

 마치 하늘에서 내려지는 구원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을 흘릴 뿐이었다.

 다음날 모든 조간 신문에는 강재구 대위의 살신성인으로 중대원을 살린 일화가 거의 내가 쓴 보고서 내용대로 크게 게재되었고 라디오를 비롯한 모든 보도 매체들이 온종일 보도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다음날에는 더 놀라운 사실이 발표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에 의해 고 강재구 대위를 일계급 특진과 함께 군인 최고의 명예인 태극무공훈장 추서에다 육군장으로 장례식을 치른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것이 대통령의 특단의 조치였다. 태극무공훈장은 무공훈장 가운데 1등급이다. 또한 상훈법에 의하면 적과 싸워 전투공적이 있어야 하는 전제가 있다. 그리고 위관장교의 육군장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초법적 조치이다.이 특단의 조치로 강재구 대위의 살신성인은 전국민에게 알려졌다. 그후 모든 교과서에 '소령 강재구 이야기'가 게재되었다.

 이어서 내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전제한 뒤 건의한 '제1연대 3대대를 在求大隊로 명명' 상신한 것이 받아들여져 국방부 훈령으로 내가 지휘하는 대대가 在求大隊로 명명되었다.

 나는 일시에 죄인으로부터 언론의 각광을 받는 스타처럼 매스컴의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몰려오는 기자들을 피하면서 오로지 나는 지휘책임을 면할 수 없는 죄인임을 내세워 인터뷰를 사양했다.

 아마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채명신 장군의 예지(叡智)에 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육군에서 이런 정도의 수류탄 사고라면 차 상급 지휘관의 보직이 해임될 수 있고 보직이 해임되면 진급이 안돼 정년을 기다리다가 예비역에 편입된다. 아마 일반적인 지휘관이라면 그 절차대로 사건은 마무리되었을 것이다.그러나 채명신의 판단은 달랐다. 부하 장병을 '골육지정'으로 대한 것이다. 골육지정은 혈통을 이어 받은 친 형제 간의 정을 말한다. 그런데 군대에서 골육지정으로 의미를 둔 것은 전우애에 바탕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삶과 죽음의 고비를 함께 넘어야 할 사이라면 어느 면에서는 형제애보다 더 뜨거울 수 있다. 사나이의 의리로 맺어진 사이라면 형제애를 초월하는 관계도 형성될 수 있다.

 채명신 장군은 우리 국군에서 전투경험이 제일 많다. 타인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 많은 전투경험에서 결정적인 패전이 없고 백전 백승 했다는 것이 채명신의 기록이며 자랑이다 그 원천이 '골육지정'으로 상하관계를 정의한데서 찾을 수 있다.

 격렬한 전장에서 전투를 하면서 적과 대적할 때 그 힘의 원천이 조국이나 정의 등 대의(大義)보다 상하간의 전우애에서 움튼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바로 채명신은 그런 인간관계를 터득한 에지의 장군이었다.

 나는 월남전에 임하면서 저런 직속상관을 위해서라면 위급할 경우 '죽을 수 있다' 는 경의를 하게 되었다 

◇보복과 응징 

 내가 지휘하는 맹호부대 제1연대 재구 대대가 중부월남의 항구 도시 퀴논항에 상륙한 것은 1965년 10월 중순 경이었다. 퀴논은 빈딘성의 성도로서 우리나라의 도청 소재지와 같다. 이곳에서 화물열차 편으로 얼마간 가면 남탕이라는 부락이 나온다. 그 근처 밀림지대에 대대본부 터를 잡고 각 중대를 채명신 사단장의 지시대로 대대 전술책임지역내에 분산해 중대전술기지를 설치해서 각 할당지역내의 정보수집과 함께 매복 및 수색작전에 들어갔다.

 나는 월남에서 대민 심리전을 통한 선무공작으로 민심을 얻고 정보를 수집하는 일에 전념했다.

 사단장 이하 모든 지휘관이 개성이 뚜렷하고 자기 주관이 서있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여려가지 혼돈이 있었다. 가령 채명신 사단장이 주장하는 중대전술기지개념에 대해 반발이 심했고 대민심리전을 통한 대민지원 작전에도 이견이 많았다. 그러나 채명신 사단장의 확고한 작전개념에 의해 전 사단은 부여된 전술책임지역내에 중대전술기지를 분산 설치하면서 처음 염려와는 달리 적지 않은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내가 책임지역내에서 대민 지원을 하면서 놀란 것은 지방 행정권을 쥐고 있는 군수나 경찰서장을 사석에서 대화하다 보면 한결같이 적국인 월맹의 지도자 호치민을 존경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로 놀란 것은 월남군을 비롯한 국가기관의 부패정도가 한계에 와있다는 사실이었다.나는 강원도 홍천에서 채명신 사단장으로부터 그런 말을 여러번 들었지만 실제 와서 보니 그 정도가 듣던 것보다 심했다.이렇다면 월남전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지을 수 없었다.

 불과 1000명 정도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는 지휘관이지만 이런 현상에 접하고 보니 "월남 전에서는 목숨을 버려가며 탈취할 목표는 없다"고 말한 채명신 사단장의 생각이 정답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그래서 나는 전투 위주보다 민사심리전을 주로 하는 대민 지원 사업을 더 중시하는 쪽으로 마음을 잡고 대대장 지휘방침으로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로 정하고 대민 심리전에 힘을 쏟고 있었다. 다행이 대대 정보관 권준택 대위가 미국 민사 심리전 학교를 졸업한 심리전 전문가였기 때문에 그에게 심리전을 전담하는 1개소대를 주어 그 특수임무를 맡겼다. 경계병을 세운 뒤 군의관을 배치한 진료소를 운영하여 지원 사업을 펼친 결과 뜻밖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확한 정보도 얻을 수 있고  산 속에 숨어있던 지방 베트콩이 귀순하기 시작했다.

 사단장 겸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재구대대의 활동상황을 확인 한 후 사이공 주월한국군 사령부에 돌아가 주월한국군의 민사심리전 목표로 재구대대 지휘지침인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로 정하고 전 주월한국군이 군사작전과 병행하여 민사심리전 태세에 돌입했다. 이 경우 예하 지휘관의 아이디어를 스스럼 없이 상급 지휘관이 채택해서 사용할 수 있는 포용력과 아량에 나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지휘지침이 상급 사령부의 목표로 승격 채택되었다면 얼마나 보람있는 일이겠는가.

 나는 채명신 장군을 위해 한 촌락을 만들어 재구촌(在求村)이라는 이름을 짓고 월남사람들에게 친선의 표본으로 삼기 위해 채명신 사단장에게 재구촌 건설을 건의 한 결과 승인되어 공사에 필요한 자재를 무한 지원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공사를 위해 9중대장 용영일 대위의 1개 중대를 전담하도록 하여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월남의 농촌 주택은 매우 간소했다. 가령 굵은 대나무가 흔하므로 대나무를 베어다가 총총히 세워 흙으로 메워 그 위에 시멘트를 덧칠하고 지붕만 씌우면 완성되기 때문에 쉽게 농가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재구 대대가 처음 베트콩으로부터 당했다. 재구촌 건설 지역은 월남의 행정력이 미치는 지역이기 때문에 평상시 아무런 위협이 없었던 곳이었다. 그래서 10여 호의 농가 옆에 있는 대나무밭에서 대나무 벌채를 9중대 병력이 하고 있을 때 그 부락에서 나타난 베트콩이 순식간에 9중대원을 저격하고 부락에 숨어버렸다. 중대원 3명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 보고를 받은 나는 대대본부에 있는 105미리 곡사포 6문과 4.2인치 중박격포에게 즉각 사격명령을 내려 그 부락을 박살냈다. 10여호의 농가 부락은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고 숨었던 베트콩은 시체로 변했다. 다만 다행인 것은 월남 농민의 희생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베트콩이 들어닥치자 모두 피해버린 것이었다.

 이 문제가 크게 확대되어 온통 난리가 났다. 원래 월남 행정구역내의 포병사격은 군청을 거쳐 성장의 허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더구나 허락도 없이 작지만 부락 하나를 박살냈으니 군청은 말할 것도 없고 빈딘 성장, 사이공 중앙정부에서까지 떠들 석 해졌다. 대대장의 직속상관인 연대장을 위시하여 주월한국군 사령부에서도 대대장에게 힐책이 모아졌고 소란스러운 일로 확대되었다.

 다음날 오전,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을 비롯하여 월남정부 대표, 월남군 22사단장, 빈딘 성장, 빈딘성 경찰국장 등이 현장 조사차 방문하니 대대장이 경과 보고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통보를 받고 당당하였다. 내가 결심한 보복과 응징은 합법적이라는 이론 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0시 가까이 되자 헬기가 나타나면서 줄줄이 고관들이 나타났다. 나는  부하 전우의 시신 세구를 급조 태극기로 감싼 것을 내 부리핌 차트 오른쪽에 모셔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10시 정각이 되자 일행이 다 모였다.

 나는 당당하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내가 말한 요지는 대개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대대는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의 민사심리전 목표에 따라 대대 전술책임지역 내에서 군사작전과 병행해서 대민 지원 사업을 실시 중이다. 어제는 집을 떠난 피난민을 수용하기 위해 1개 중대가 촌락 건설에 나서서 대나무 벌채를 하던 중 저 부락에서 베트콩이 비무장 대민봉사요원 3명을 저격 사살했다. 여기 모셔진 시신이 내 부하다. 이 부락은 적성지역도 아니고 월남정부 관할 구역이다. 그 베트콩을 보복 응징하기 위한 내 조치기 잘못된 것인가. 절차에 따라 군청을 거쳐 성장 승인을 받게 되면 저격범을 응징할 수 없다. 다행이 양민 피해가 없었다. 저 박살난 농가는 내가 복구 시키겠다. 질문이 있는가?.'

 아무도 질문을 못하자 채명신 장군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월남 당국에 사전 허락을 받지 못한 것은 긴급한 사정 때문이라 내가 대대장에게 사격하라고 했소. 대대장이 복구한다니 다행 아니요. 자 이제 갑시다"

 채명신 장군은 월남군 22사단장, 빈딘성장 등을 거느리고 헬기장으로 향했다. 부하의 곤경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 상관 스스로 책임지는 리더십, 누가 저런 상관에게 충성심을 발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사라져가는 헬기를 바라보았다.

 이 일이 있은 다음날 수 천장의 전단을 만들어 대대 전술책임지역내에 헬기로 살포했다.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우리는 월남인을 위해 이곳에 왔다. 월남 행정당국 관할하에 있는 우리 책임지역내에서의 도발은 끝까지 보복 응징할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약 12개월간 월남 행정당국 관할하 우리 지역에서는 평화가 유지되었고 단 한 번 테러를 당하지 않았다. 그후 재구촌은 건설되어 월남 행정 당국에서 정식으로 재구촌으로 명명되었다. 이 재구촌은 주월한국군 사령부의 VIP코스로 지정되어 맹호사단을 방문하는 고국의 손님들은 모두 이곳을 둘러보고 갔다

◇모함과 견제 

 1965년 5월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이 제2군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은 2군사령관 직위가 격상되었지만 당시는 육군중장직위였다. 채명신의 공적으로 보나 서열상으로나 당연히 대장 직위인 야전군사령관으로 임명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전방 제28사단 참모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28사단 전방 DMZ에서는 월남전 귀국 장병들에 의해 공비가 들어오는 족족 박멸되고 있었던 시기이기에 나는 작전에 몰두하느라 시국이 돌아가는 것이라던가 군 고위층 동향에 대해 깜깜하였다. 28사단 전방에 배치된 상당수의 부사관들이 월남전 참전 경험자였으므로 그들에 의한 DMZ매복은 절대 성공의 길을 달리고 있었다. 김찬채 중령이 지휘하는 대대에서는 무려 누계 32명의 공비를 사살한 공로로 을지무공훈장까지 수훈하는 경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전시가 아닌 평시 휴전선 작전에서 을지무공훈장이라면 대단한 공로로 인정된 결과였다. 월남 파병 이전에는 공비들의 침투가 잦았으며 거의 생포하거나 사살하는 경우없이 무사 통과가 상례였다. 그만큼 월남전 참전 경험은 한국방어에 직접 혁신을 가져온 것이었다.

 그무렵 채명신의 2군사령관 발령은 월남 참전자는 물론 심지어 군과 아무 상관 없는 민간인까지 불만이었다.

   "채명신이 너무 유명해지니까 견제하는거야"

   "채명신은 대통령 깜이야"

   "박정희 다음은 채명신이야"

 시중에 돌아가는 객담이 이처럼 민감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무렵 채명신에 대한 별별 악담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알고 있는 범위 안의 내용은 전혀 터무니 없는 모함이었다. 채명신은 월남전에서 야전사령관으로 온 몸을 던진 순수 군인이었다. 그에게 가해지는 모함은 주로 정보기관원에 의해 퍼져가고 있었다.

 그가 전장에서 모은 탄피는 개인 축재를 위한 것이 아니고 모두 국가에 귀속시켰다. 그런데도 시중에서는 탄피를 모아 덩어리로 만들게 하여 팔아서 축재했다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도 돌았다. 또한 스위스은행의 비밀 계좌설은 늘 따라다니는 단골이었다. 이 외에도 강남 땅은 대부분 채명신 것이라는 등 차마 여기에 올릴 수 없는 희한한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채명신 2군사령관은 취임과 동시에 휘하 사단의 전투력 향상에 집념하면서 적의 간접침략에 대비하는 체제를 보강하고 있었다. 한편 각 종합대학교에 설치되어 있는 ROTC에대한 정비도 서둘렀다. 당시 ROTC단장은 전역을 앞둔 고참 육사8기생이나 9기생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침체된 분위기를 쇄신시키기 위해 월남전에서 명성을 떨친 젊은 대령으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당시 ROTC단장들은 전역 직전 근무여서 교관 장악은 물론 대학생의 군사학 교육에 의욕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채명신 2군사령관의 계획의 일환으로 나는 1969년 6월 26일부로 성균관대학교 ROTC단장에 임명되었다. 야전 생활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학문의 길에서 재충전하는 의미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취임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학원가에 3선 개헌 반대를 내건 데모의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성균관 대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나는 ROTC후보생에게는 데모에 참여하지 못하게 교관들로 하여금 철저히 단속시키고 있었고 그 성과에 대해 나는 자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기관원이라고 자칭하면서 단장실로 젊은이 두 명이 찾아왔다. 면담하겠다는 것이었다. 확실한 신분을 밝히기 전에는 응할 수 없다고 하자 일방적으로 이상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기관원의 말 요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박경석 대령은 장차 유망한 젊은 엘리트 장교인데 채명신 2군사령관의 책동에 말려들지 말라고 했다. 채명신은 3선개헌을 반대하고 있고 스스로 대권에 야심이 있어 월남전 심복 부하를 ROTC단장에 배치 데모를 조장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괴이한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아 소리쳐 쫓아냈다. 그런데도 매일 교대로 주변에 나타나면서 감시하고 있었다. 몹시 괴롭고 수치감을 느끼는 근무였다.

 이러다가 나는 약 14개월간의 단장 근무를 마치고 제1사단 제12연대장으로 발령을 받아 다시 야전으로 향했다. 보병대령으로 연대장은 필수 코스였다. 연대장을 필하지 않으면 장군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연대장 발령 이면에도 묘한 음모가 있었다. 나의 근무 성적이 최상이므로 이를 방해하기 위해 2군 연대장으로 결정한 것을 채명신 2군사령관이 총장을 직접 만나 1군 연대장으로 바꿔 발령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2군 연대장은 1군 연대장에 비해 격이 낮아 2군 연대장 출신은 장군이 될 수 없었던 시기였다.

 나는 이래저래 채명신 장군에게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나는 채명신 장군과 독대해서 식사 한 번 하지 못했다. 사사로운 관계가 아니고 군인과 군인의 관계였던 것이다.

 나는 1972년 6월 어느날 채명신 장군의 전역 소식을 듣고 생전 처음으로 채명신 장군의 사저인 후암동 집을 찾아가기 위해 물어 물어 골목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물론 육군대령 정복 차림이었다.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검은 색 찝 탑차에서 쏜살같이 내린 사복 젊은이 세명이 나를 가로막았다.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양민학살과 청부전쟁 주장에 쐐기 

 채명신 장군은 1972년 10월에 스웨덴 대사로 출국한 이래 그리스 대사, 브라질 대사를 거처 미국 하버드 대학, UC버클리 대학, 일본 츄오 대학, 케이오대학 연구원으로 전전한 뒤 사실상의 유폐에서 벗어나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88년이었다.

무려 16년간 사랑하는 조국을 등지고 살았다. 조국을 위해 최대의 공헌을 한 위대한 영웅의 발자취치고는 기구한 운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귀국 후 그의 입에서 단 한마디의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채명신 장군은 귀국 후 제일 먼저 나를 힐튼호텔 레스토랑 오찬에 초대했다. 생각과는 달리 밝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내 얼굴이 우울한 빛을 띠자 걱정스러워했다. 내 우울한 얼굴 빛은 채명신 장군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이었다.

   "박 장군, 당신과 내가 할 일이 많이 있소. 우리 서로 힘을 합칩시다."

   "예, 무엇이든 하명 하십시요. 흔쾌히 따르겠습니다"

 채명신 장군의 일이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하나는 전장에서 살아남은 전우들의 명예 회복과 월남전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바로잡자는 것이었다.당시 역대 정권은 제밥 챙기기에 급급한 나머지 참전용사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한편 월남전을 미국에 의한 청부전쟁이며 한국군은 미국의 용병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한편 양민학살의 주범으로 몰아가는 측도 나타났다. 채명신 장군은 죽기 전에 이를 바로 잡아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업작가로 글을 쓰면서도 군사 평론가 협회를 창립하여 회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데 아주 적합한 당사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채명신 장군은 노태우 정권 이후 정권마다 그에게 뭔가를 맡기고 싶어했지만 나하고 상호 굳은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와 나는 일절 정권에 참여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오로지 전우를 위한 무보수 자원봉사자의 길에 들어선 것이었다.

 어느날 채명신 장군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용인즉 "동국대학교 강정구 교수와 성공회대학교 한홍구 교수가 공개적으로 월남전에서의 한국군 양민학살 주장과 한국군이 미국의 청부전쟁에 말려든 용병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들과 함께 당신 군사평론가협회 학자들과 학술회를 개최 토론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는 부탁이었다. 나는 즉각 "실천하겠습니다"고 대답한 후 학술회의 개최를 위해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예상 밖으로 준비가 잘 진행되었다. 주최는 한국 군사 평론가 협회.후원 동아일보사. 사회자 김학준 동아일보사장. 발표자 군사 평론가 협회측에서 이선호 박사, 지만원 박사. 그리고 월남전 한국군을 미국의 청부전쟁으로 말려든 용병임을 주장한 동국대 강정구 교수,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로 학술회의 틀이 짜여졌다. 그리고 나는 군사 평론가 협회 회장 자격으로 기조연설을 하게 되었다. 학술회의 장소는 명동에 있는 전국은행연합회관 강당으로 결정되었다.

 학술회의가 시작하기 한 시간 전부터 강당은 월남전 참전 전우들로 대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김학준 동아일보사장이 개회를 알렸는데도 월남전 참전 전우들이 분노의 고함 소리로 회의 진행이 어렵게 되자 채명신 장군이 나서서 겨우 수습이 되어 학술회의가 시작되었다.

 양측 모두 자기 주장을 앞세워 학술회의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군사평론가협회 측 발표자는 둘 다 월남전 참전자들이었기에 실제 사항을 중심으로 몰아부치고 있었고 반대측은 한겨레21 통신원이라는 구수정 여인이 베트남 이곳 저곳에서 살피고 돌아와 기사를 쓴 내용만 가지고 발표를 하기 때문에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원래 기조연설은 채명신 장군이 하도록 건의되었지만 극구 사향하며 나더러 발표하라고 해서 그의 뜻에 따라 다음과 같은 요지로 발표하였다.

   '전쟁과 국제법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전쟁규칙과 전쟁에 관한 각종 제한을 규정하고 있는 국제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함부로 '청부전쟁의 용병이다' '양민학살이다'를 정의 내리는 행위는 마치 돌파리 의사가 암 환자 수술을 하겠다고 덤비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각종 통계에 따르면 세계 여러 전쟁 특히 월남전에 참전한 미군이나 월남군에 비해 한국군이 참전한 민간인 희생이 가장 적었다는 사실이 연합군이 공유한 공식 통계라는 것을 참작하기 바란다.

 세계대전을 비롯하여 6.25전쟁을 포함한 모든 전쟁에서 민간인 희생이 전투 당사자인 군인의 희생보다 월등히 많다. 그러나 주월한국군은 그 통계에서 예외적인 것으로 공인되었다. 그 요인은 이자리에 참석하신 당시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의 훈령 '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에 충실했던 부하 장병의 인도주의적 실천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지휘했던 맹호 제1진 재구 대대도 수 많은 전투를 겪는 동안 민간인 희생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포탄이나 총탄을 군인만 죽이도록 고안하지 않는 한 민간인 희생을 막을 방법이 없다. 그 과정에서의 민간인 희생은 학살이 아니다.

 내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전쟁이란 응징과 보복의 연속이라는 사실이다. 제2차대전 당시 일본 히로시마,나가사키에서 미국의 원자탄으로 무고한 민간인이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낸 일본이 양민학살이라고 미국에 항의하지 않았던 그 이유와 배경을 살펴야 한다.

 월남전에서의 적은 월맹군과 베트콩이었는데 베트콩은 그들이 주장하는 양민이다. 노인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고 어린이도 있다. 전쟁에서 상대가 적대 행위를 할 경우 그 상대를 사살하는 행위는 정당바위이며 합법적이다. 월남전과 같은 게릴라전에서 피눈물을 흘려가며 양민보호에 임했던 나와 내 전우들을 양민학살의 주범으로 모는 행위는 분명 이적행위이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강정구, 한홍구 두 교수는 각성하기 바란다.

 끝을 분명히 밝혀 둘 것은 작전지휘권을 가진 군대가 실시하는 전쟁은 청부전쟁이 아니다, 더욱이 용병도 아니다. 질문이 있으면 받겠다.'

 나는 강정구,한홍구 두 교수를 주시했다. 그들의 입에서 무언가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학술회의는 끝났다. 그후로부터 주월한국군의 양민학살과 청부전쟁 주장은 깨끗이 사라졌다.

 이자리에서 채명신 장군은 내 손을 꼭 븥들면서 몇번이고 고맙다고 했다 

 ◇호주 ANZAC DAY 행사 참가 

 호주의 ANZAC DAY 행사는 매년 실시된다. ANZAC 은 곧 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의 약자이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4월 25일 새벽 4시에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이 연합하여 터키의 Gallipoli 반도에 상륙했다.  그날을 기념하여 Anzac Day를 설정하였다.

 당시의 호주는 영 연방 가입 15년 밖에 안되는 신생 국가였다. 호주군은 연합군의 흑해 진출을 돕기 위해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오또만 제국(현 터키)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을 점령하는 임무를 띠고 Gallipoli 반도에 상륙했다. 그러나 터키군의 완강한 저항과 작전의 실패로 호주군은 이 작전에서 8천여 명의 희생을 내며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작전은 실패했지만 종전 후 실패를 규명하기 위한 논란이 있을 법했다. 그러나 호주의 지도자와 국민들은 그 8천여 장병들의 죽음이 호주와 뉴질랜드 두 나라가 운명적 동반자 관계를 공고히 했고 호주의 국가 위상을 높여 오늘의 선진 호주국을 있게 만든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하여 이날을 기념일로 정하고 회상하는 전통을 세웠다.

 호주 국민들은 어린 초등학교 학생으로부터 할아버지 세대에 이르기까지 Gallipoli 반도에 상륙했던 젊은 장병의 고통과 희생을 100년 가까이 계속해서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기념일로부터 약 1주일간을 기념기간으로 정해 호주 국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호주에 이민해 온 다른 나라 사람들도 함께 참여하는 전통으로 이어졌다.

 그 여러나라 가운데 대한민국은 한국전쟁과 월남전에서 동맹군으로 싸웠다는 명분과 특히 월남전 참전 군인의 영웅적 전투에 의미를 둔 호주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한인 이주민들은 당당히 이 행사에 참여해 왔다.

 호주에는 특히 한인 이주민 가운데 월남전 참전 군인이 많고 단결력이 어느 단체보다 잘 짜여져 호주인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었다. 원래 백호주의를 표방하여 호주는 백인만 이민으로 받아들였지만 주월한국군의 영웅적 선전상을 확인한 호주 정부는 처음으로 월남전 참전 군인들을 이민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월남전 참전군인들은 수백 명에 이르며 그들을 리드하고 있는 이윤화 회장은 마침내 호주의 ANZAC DAY 행사에 월남전 참전 장군단을 초청하기에 이르렀다.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을 대표로 하고 맹호 대대장  박경석, 백마 대대장 박희모, 맹호 소대장 한광덕, 청룡 소대장 신원배가 초청을 받아 2007년 4월 중순에 호주로 향했다. 특히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월남전 참전 전우는 물론 각계 각층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며 월남전 참전군인들에게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계기를 만들었다. 일주일간 내내 이윤화 월남 참전자를 대표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잘 짜여진 스케줄에 의해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특히 행사 가운데 하이라이트인 시드니 시가지의 시가행진은 그 규모나 내용으로 보나 어느 국제행사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행사였다. 우리 일행은 호주 월남전 참전 전우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함으로써 한인 교포는 물론 많은 호주인으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시가 행진은 호주 시드니 중심부를 관통하는 약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행사에 참가한 후 채명신 장군은 우리 조국이 얼마나 참전 군인에게 홀대하는가에 대해 통탄하였다. 과연 대한민국은 어떤가. 참전군인에게 연금커녕 시민 운동자보다 못한 처지가 아닌가. 이런 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 있겠는가. 호주의 이 행사장은 많은 의문과 분노를 함께 느끼게 하는 경험의 교육장이 되고 있었다.

 특히 호주정부는 우리 참전군인으로 시민권 소지자에게는 월 평균 2000달러의 연금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선진국이 얼마나 참전자에 대한 배려가 극진한 것에 감탄하였다.

 채명신 장군과 함께 한 이 ANZAC DAY 행사 참가는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은 추억으로 각인되었다.

 특히 이윤화 회장의 월남 참전 군인에게 베푼 리더십과 채명신 장군에게의 극진한 배려는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남는다.고인이 된 채명신 장군을 떠올리며 이날의 감동을 되살려 본다. 

◇명예원수 추대 해프닝 

 외국 생활 16년 만에 귀국한 채명신 장군은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야전사령관 풍모에서 학자풍으로 변했던 것이다. 미국 하버드대, UC버클리 대를 비롯해 4개 명문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학문연구에 몰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되었지만 나로써는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월남전선에서 헬기를 타고 나타나 정글을 휘젓고 다닐 때의 찬바람은 사라지고 온화한 그리고 신중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채명신 장군은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우리 국군사를 비롯하여 북한 인민군의 건군 과정 등 세계 석학들이 보는 한국전쟁과 월남전에 관한 심층을 탐구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국내파 연구 당사자인 나와 채명신 장군은 좋은 토론자가 되어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었다.

 2008년부터 이상한 소문이 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백선엽 장군의 측근 몇몇 사람이 백선엽을 명예원수로 추대하는 일에 나섰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무렵 건군 이후의 고위 장성에 대한 모든 자료를 수집하며 그들 하나하나의 리스트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백선엽이 건국 최초의 명예원수로 추대된다면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이 훼손됨은 물론 우리 국군의 건군 과정이 북한의 주장대로 치욕의 나락에 빠질 수 있다고 분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채명신 장군에 전화해서 꼭 뵈야 할 일이 생겼다고 말해 승락을 받고 서울역그릴에 모셨다. 우선 오찬을 마치고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일각에서 백선엽 장군을 건국 첫 명예원수로 추대한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만일 백선엽이 건국 첫 명예원수로 추대된다면 우리나라 건국 이념이 훼손될 뿐만 아니라 국군의 건군 과정이 북한의 주장대로 함정에 빠질 염려가 있습니다. 저 혼자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기에 사령관님의 자문을 받고 싶습니다."

 내 말을 듣고 채명신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아니, 박 장군 그 말이 사실인가?."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떡이었다.

   "큰 일 낼 사람들이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의식이 희박한지 모를 일이오. 건국 이후의 첫 명예원수 추대는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이 매우 중요하오. 만약 일본군,만주군 출신에다 독립군 토벌작전의 지휘관 경력자가 명예원수로 추대된다면 우리나라 건국사와 국군사는 하루 아침에 북한의 역사관에 종속될 거요."

   "제 생각도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령관 님을 뵙자고 한 것입니다. 지금 일반 국민들의 상당수가 백선엽 자신에 의해 과장된 6.25전쟁사를 통해 낙동강에서 조국을 구한 유일한 영웅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일반인 뿐만 아닙니다. 국방장관을 역임한 예비역 장성과 중앙일보 등 일부 보수 일간신문도 백선엽이 우리나라 제일의 전쟁영웅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내용 상당량이 과장된 것이지요."

   "박 장군, 어려운 문제에 당면하고 있지만 마지막 조국에의 봉사로 생각하고 이 일만은 꼭 저지 시켜야 해요."

   "알겠습니다. 일단 제가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성명서를 군사 평론가 협회 회장 직함으로 발표하겠습니다."

 그날 서울역 그릴에서의 회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즉각 성명서를 인터넷 '박경석 서재'에 게재했다. 제목은 '백선엽 명예 원수 추대는 세기의 난센스다'로 하고 내용은 대한민국 건국 이념이 훼손될 수 있다는 점과 건군 과정이 북한의 주장대로 치욕으로 남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백선엽이 만주군 출신이라는 점보다 그는 일본국 괴뢰정부인 만주국 간도특설대의 육군중위 계급으로 독립군 소탕작전을 지휘한 명백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더구나 낙동강 전선에서의 그의 활약상이 과장 평가되고 있는 점도 지적 하였다. 북한이 남한에 대해 건군 과정을 헐뜯는 내용이 일본군 만주군에 의한 건군인데 백선엽이 건국 첫 명예원수가 된다면 그들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더구나 만주에서 악명 높았던 간도 특설대 지휘관이었다면 문제는 심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명서가 발표되었는데도 이명박의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명예원수 추대를 기정 사실화하고 김태영 국방장관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원래 명예원수 제도는 없었기 때문에 국군인사법을 개정해야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국방장관이 법 개정 초안을 성문화해서 법적 조치를 진행시켜야 한다. 다행이 김태영 국방장관은 역사 의식이 뚜렷했다. 그래서 압력을 물러치기 위한 작업으로 국방부 인사복지실장(육군소장)과 담당과장(육군대령)을 내 광화문 서재에 보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백선엽 자신이 국방장관 앞으로 보낸 공문에서 "내가 간도 특설대에 근무한 사실은 있지만 독립군 소탕작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렵게 수집한 1950년대 일본 작가와 백선엽이 대담한 기록을 보여 주었다. 그 내용의 핵심 부분은 다음과 같다.  

 '간도 특설대는 소규모이면서 군기가 잡혀있는 부대였기에 게릴라를 상대로 커다란 전과를 올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서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에 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 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주의 주장이야 어찌 되었던 간에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간도 특설대에서는 한사람 한사람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토벌에 임했다.' 

  이것을 확인한 인사복지실장은 확실한 증거자료로 보고 장관에게 보고 하겠다고 했다. 이어서 나는 꼭 채명신 장군을 뵙고 국제적인 시각에서 보는 명예원수 추대 불가 이유를 확인하도록 권유했고 그자리에서 전화로 채명신 장군에게 사유를 말했다.

 채명신 장군은 내 말을 듣고 "인사복지실장을 만나고 싶다" 하여 다음날 인사복지실장이 채명신 장군을 만났다.

 인사복지실장은 채명신 장군과 대담 후 더 확신을 가지고 김태영 장관에게 보고 하였다. 이로써 명예원수 추대 해프닝은 끝났다.

 국제 변호사를 만나 이 사실에 대해 이야기 하자 국제적인 시각으로 만약 프랑스 같았으면 현재의 직위와 관계없이 이 정도의 과거 죄상이 들어 난다면 사형에 처해진다고 했다.

 명예원수 추대를 무효화시킨 이 사실은 채명신 장군이 조국에 바친 마지막 봉사로 의미를 두고 싶다. <끝>

이름아이콘 bababa
2014-01-29 09:38
잘 읽었습니다.
   
이름아이콘 jang40
2014-01-29 12:42
살아숨쉬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는것 같습니다.
존경하는 고 채명신장군님과  박경석장군님의 나라사랑 전우사랑을
뼈속 깊이 느끼는 글을 보았습니다.
함께하시는 전우님들 모두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합니다.
   
이름아이콘 운영자
2014-01-29 16:01
이글은 박경석 장군이 집필한 不朽의 名將 蔡命新 중 Ⅲ.삶의 한길에서 제5장 채명신 장군과 나 를 옮긴것입니다. 전편을 게시했으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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