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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영인
작성일 2009/06/18 (목) 21:13
ㆍ조회: 2910   
金大中 대통령 앞 마지막 편지 - 申相玉


-노벨賞을 위해 민족을 판 당신을,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출처 : chogabje.com에서-

  金大中 대통령 앞 마지막 편지 - 申相玉

(어제 별세한 신상옥 감독이 2003년3월호 월간조선에 기고했던 글)

노벨賞을 위해 민족을 판 당신을,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거짓투성이의 남루한 옷을 걸치고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솔직하게 모든 것을 한 점 의혹도 없이 밝혀서 이후의 역사가 제대로 순항하도록 길을 닦아 준다면 우리는 오랫동안 당신을 기억할 것입니다"

申 相 玉 영화감독

1926년 함북 청진 출생. 東京미술전문학교 졸업. 1951년 「惡夜」로 감독 데뷔.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폭군 연산」, 「빨간 마후라」 등 제작, 감독. 신필름?컬럼비아 칼리지 할리우드?글로벌 베처 할리우드 대표?칸 영화제 심사위원?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심사위원장 역임. 1978년 홍콩에서 拉北 북한 체재 중 「사랑 사랑 내 사랑」 「불가사리」 등 제작, 감독. 198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탈출.

서둘러 글을 씁니다. 이 글이 실린 잡지가 시중에 나간 지 며칠 후 당신은 권좌에서 내려와 시민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나는 대통령이 아닌 자연인 金大中에 대해서는 눈꼽만 한 관심도 愛憎도 없으므로 하루라도 권좌에 앉아 있는 시점에 이 편지를 전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내가 보기에 대통령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봅니다. 첫 번째 유형은 대통령 되는 것 자체가 목표인 사람이고, 다른 한 가지 유형은 대통령이 되어서 그 직위와 직책에 어울리게 국가 민족의 복리와 미래 발전을 위해 뭔가를 실제로 해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前者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병적일 정도로 집요했던 그 피나는 노력을 기억하고 있는 국민들은 정작 청와대에 들어간 이후 당신의 태업에 가까운 無爲와 업무상 배임에 해당하는 제멋대로의 국가경영에 놀라움을 넘어 분노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난 5년 동안의 치적으로 꼽는 것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우리 경제를 IMF의 수렁에서 건져냈다는 것과 햇볕정책으로 남북 화해의 물꼬를 터서 통일의 초석을 놓았다는 것,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IMF 사태」로 불리는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 국민들은 생명처럼 소중하게 장롱 깊숙이 숨겨 두었던 금붙이를 모두 들고 나왔고, 기업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피땀 나는 노력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민들이 겪은 고통의 무게는 말로 다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정부가 한 일이라고는 손쉽게 공적자금을 쏟아부어 경제의 거품을 털어 내고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한편 재생 가능한 은행과 기업을 지원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의 용도와 지원 방법, 사후관리는 엉성하고 불투명하여 새로운 정경유착의 전형을 만들었고, 거대한 의혹만 부풀려 놓았습니다.

현대그룹의 부실을 털어 주기 위해 지원한 公的자금의 규모가 무려 30조원을 넘지만 현재로서는 회수 가능성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현대가 정부를 대신하여 북한 金正日의 비자금 호주머니로 8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되는 뇌물을 갖다바친 상부상조의 고리를 이해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이처럼 IMF 극복을 위해 당신과 당신의 정부는 한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국가적 환란을 이용하여 국민의 혈세를 마음껏 농단하여 정권유지와 개인적인 치부, 그리고 전대미문의 對主敵 뇌물 커넥션에다 노벨상 수상 공작 등 추문에 추문을 낳았을 뿐이니 비록 홍보용 빈말이라도 「IMF 극복」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건국 이후 최대의 「판도라의 상자」가 된 「공적자금 비리」는 어차피 당신이 물러난 뒤 새로운 정부와 또 그 다음의 정부에 의하여 두고두고 파헤쳐질 것이고, 당연히 그래야 할 일이므로 여기서 미리부터 예단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짐작하시겠지만 5년간의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이제 막 물러나려는 당신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은 바로 2000년 6월 15일 그 「역사적」 남북 頂上회담을 앞두고 당신의 비호를 받고 있는 현대그룹을 통하여 북한 金正日에게 4억~8억 달러로 추정되는 거액의 뇌물을 가져다주었다는 추잡스러운 사건이 그동안의 「의혹」에서 마침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어색한 무대의 뒤편에 뭔가 있다는 심증

솔직히 말하자면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얼마의 돈을, 누구를 시켜 어떤 방식으로 세탁을 하여 北의 누구를 통해 송금했는지 미주알고주알 상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으나 당신이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北의 金正日과 포옹하고 밀담을 나눌 때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그 어색한 연극의 무대 뒤에 뭔가가 있다는 심증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어느 편이냐 하면 당신이 역사상 최초의 남북 頂上회담에 金正日을 끌어내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일련의 「공작」 뒤에 검은 돈거래가 없을 수 없다는 심증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야당 총재 시절부터 끈끈하게 맺어 온 그 어떤 질긴 인연의 끈이 평양 정권을 향하는 당신의 발걸음을 거역 못할 힘으로 당기고 있다는 사실 또한 확신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공적자금 투입을 통한 현대그룹 생존 보장과 금강산 관광이라는 허황한 이벤트와 남쪽의 정신적 무장해제로 이어지는 기이한 현상의 이면에 4억~8억 달러라는 현금의 액수만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무거운 거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신은 北의 정권에 무슨 씻을 수 없는 빚을 진 사람이 아니고는 행할 수 없는 사고와 행적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 증거와 함께, 당신의 생각이 얼마나 국가와 민족에 중대한 과오를 범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보겠습니다.

당신과 아주 가까운 원로 정치인 한 사람은 사석에서 『DJ는 대통령과 노벨상이 평생의 꿈이었다. 이 두 가지를 위해서는 목숨까지 버릴 각오가 돼 있었고, 실제로 그는 목숨 이외의 모든 것을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던져 쟁취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면 그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거나 그 이상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먼저 당신은 대통령이 되면 야당 시절 잃어버렸던 세월의 고통을 충분히 보상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확실하며, 대통령이 된 후에는 노벨상만 받으면 그 과정상의 문제는 물론이고 정치적 무능과 불법, 탈법적 통치행위까지도 우리 국민과 세계가 무조건 다 용납할 것이라고 과대망상하고 기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모두 오산이거나 착각이었습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그 자체가 완성형의 영예도 그 무엇도 아닙니다. 대통령을 해 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그 자리는 단 한 시간도 고요히 살 수 없는 긴장과 고독의 감옥이라는 것입니다.

무거운 책임과 시시각각 닥쳐오는 선택과 결단의 요구 때문에 피를 말리는 시간의 연속이라고도 합니다. 간혹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무소불위의 권좌로 착각하여 자신의 하잘것없는 개인적 고집과 목적 달성의 기회로 활용하는 사람이 있는데 5년을 지내 놓고 보니 당신이 바로 그런 유형의 대통령이었다고 평가됩니다.

노벨상만 받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착각

문제가 노벨상에 이르면 당신의 착각과 환상은 극치에 이릅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한국인들 모두가 일종의 노벨상 콤플렉스에 걸려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지구촌의 한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누려 보지 못한 유일한 것이 노벨상 수상이었습니다.

올림픽도 개최했고, OECD 회원국도 되었으나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했다는 것을 민족적 수치로 생각하고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같은 동양민족인 일본과 중국, 인도가 오래 전부터 수상자를 낸 것과 견주어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바로 그러한 초조감과 민족적 열등감과 콤플렉스가 당신의 노벨상에 대한 과대망상의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가만히 돌아보니 당신은 노벨상만 받으면 가만히 있어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식을 줄 모르는 존경의 대상이 되는 줄로 착각했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노벨상에 대한 이같은 미신과 함께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그릇된 결과 지상주의, 그리고 당신 옆에 있는 몇몇 전제군주시대 家臣과 같은 충성심을 지닌 참모들의 물불 가리지 않는 충성 경쟁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수치스러운 추문을 낳고 말았던 것입니다.

물론 이 추문은 스웨덴의 노벨상 위원회와는 상관 없는 것으로 본인은 생각합니다. 현 단계에서 거의 확정적인 것은 당신과 北의 金正日이 서로의 계산이 맞아떨어져 합작으로 세계를 잠시 속인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와서 「통치권」 논리를 아무리 둘러대도 6?15 남북 頂上회담 직전에 이루어진 현대의 까닭없는 對北 송금은 그것이 남북 頂上회담의 代價임이 분명하고, 남북 頂上회담으로 얻고자 했던 진정한 보상은 남북통일도, 진정한 의미의 평화도 아닌 오직 노벨평화상 수상 그것뿐이었기 때문입니다.

2000년 6?15 야합 직전에 이루어진 거금의 송금이 진정한 평화의 代價이며 당신 말마따나 「통치행위」였다면 그 후 金正日이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핵무기 개발과 서해 도발사건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당신은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우리 민족의 자존심은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모르긴 하지만 당분간 노벨상위원회는 한국인에게 이 상을 수여하기를 내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민족적 수치의 상징이 된 賞

남북관계도 진전되지 않았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추종자들은 금강산의 제한된 구역에 줄을 그어놓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광과, 막대한 뒷돈을 주고 이루어지는 신문?방송의 평양 취재와, 엄청난 규모의 쌀과 비료를 선적한 이후에야 겨우 한 번씩 허용되는 이산가족 찾기 이벤트 등을 두고 「남북화해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이라고 선전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이른바 살얼음 한 조각도 못 녹이는 「햇볕」이 없었더라면 北의 정권은 지금쯤 남루한 전제정치의 외투를 벗어던지고 남쪽을 향하여 투항했을지도 모르며, 지옥 같은 북한을 탈출한 수십, 수백만의 보트 피플이 동해와 서해를 통하여 물밀듯이 南으로 향하고 그로 인하여 北의 정권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北의 정권을 연명시키고 얻은 것은 당신 개인이 꿈에도 그리던 노벨상뿐이었으며, 그 노벨상조차도 이제는 민족적 수치의 상징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노벨상은 당신이 믿고 있었던 것처럼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큐리 부인은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던 그 시각에 시상식장이 아닌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예정된 강의시간과 노벨상 시상식이 겹치자 그는 강의를 택했던 것입니다. 큐리 부인이 賞을 받기 위해 일부러 노력했다는 그 어떤 말도 듣지 못했으나 진정한 노벨상 수상자로 길이길이 세인의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賞을 받기 위해 치밀한 공작을 하고 세상을 속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볼 때 큐리 부인의 일화는 두고두고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그 반대의 수상자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당신이 노벨상 수상자였다는 사실을 세계인은 가능한 한 빨리 잊으려 할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당신은 노벨상 수상이라는 하찮은 영예를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시켰기 때문입니다.

뒷돈으로 頂上회담을 사고, 그렇게 하여 얻어낸 거짓 평화의 공적으로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자 『金正日 위원장이 함께 수상하지 못해 서운하다』고 말한 당신들 두 사람(당신과 金正日)의 의기투합은 3류 만화영화의 소재로 적격입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기억하고 있겠지요? 워터게이트 사건의 본질은 어느 쪽에서 어느 쪽을 도청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도청한 쪽에서 그 사실을 끝까지 숨기려 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즉 닉슨의 「거짓말」이 미국인을 분노케 했던 것입니다.

다행히 한국 사회는 미국 사회보다 거짓말에 대해 관대합니다. 거짓말에 대해 관대한 편인 한국인들의 性情과 관습을 감안하고라도 당신의 거짓말은 우리를 너무나 수치스럽게 합니다.

원래 하나의 거짓말은 그것을 숨기려 하다가 여러 개의 새로운 거짓말을 낳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추종자들이 北의 金正日과의 사이에 저질러 놓은 일에 대해 국민들에게 했던 원초적인 거짓말이 출발점이 되어 그 후 얼마나 크고 많은 거짓말이 양산되었는지, 그리하여 우리 사회가 마침내 거짓말 불감증에 이를 정도로 깊은 병에 들게 되었는지 당신은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아마 생각해 보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면서 그것이 진실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어 믿는 경우가 있는데 당신과 당신의 추종자들이 바로 그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 투사」의 제왕적 정신구조

당신은 최근 對北 송금이 사실로 밝혀지고 더 이상 거짓말이 불가능해지자 마침내 예의 그 현란한 修辭力을 발휘하여 「통치권」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과 일부 언론도 당신의 「통치권」 궤변을 지원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만 그럴수록 당신이 자신을 전제군주로 착각하고 있다는 증거만을 보태 줄 뿐입니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민주화」였다는 것과 당신이 역대 그 어느 대통령보다 帝王的 정신구조를 지니고 있었다는 역설적인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미안한 얘기지만 당신은 이 시대 지도자로서의 품성과 자질을 전혀 갖추지 못한 「대통령병 환자」 또는 단순한 「투사」였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에 비하면 나와 나의 아내 최은희의 예술가적 삶의 뿌리를 뽑아버렸던 독재자 朴正熙 대통령은 그래도 이 시대 국가의 지도자로서 良識과 품성을 갖춘 인물로 새삼 그리워질 정도입니다.

내가 만든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는 日帝에 의하여 희생된 민비의 삶과 시대상을 다룬 작품으로 제13회 아시아 영화제에서 남녀주연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상영될 무렵 국내에서는 韓日회담을 반대하는 데모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이 작품이 反日감정에 기름을 부을 우려가 있다 하여 「상영중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朴正熙는 청와대에서 이 작품을 직접 관람하고 나서 『그럴수록 국민에게 알릴 것은 알려야지』하고 상영을 허가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정권적 차원의 일과 국가적 차원의 일을 구분할 줄 알고, 어느 것을 우선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이 서 있어야 한 나라의 대통령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햇볕」은 가짜였다

이른바 그 「햇볕정책」이라는 것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햇볕정책」의 원전인 이솝우화에 의하면 폭풍과 눈보라 속에서 오히려 옷을 두껍게 껴입던 나그네가 햇볕 아래서 외투를 벗는, 실로 따사로운 장면이 나옵니다. 이솝우화가 인간 세상의 진실의 일면을 말해주는 것이라면 당신의 「햇볕」은 햇볕이 아니라 사이비 조명임이 분명합니다. 북한은 옷을 벗기는커녕 핵무기로 무장하고 사상투쟁을 강화하는 등 옷을 더 껴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 모양이 됐을까요?

첫째는 상대를 잘못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은밀한 돈거래로 평화를 사겠다는 방법이 나빴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잘못 파악했다기보다 당신과 당신의 추종자들은 상대를 파악하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이는 국가 경영자로서 명백한 직무유기입니다. 金正日과 그의 북한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북한 체제를 신물이 나게 겪어 본 경험자들이 많은 증언을 해 온 바가 있습니다.

나와 나의 아내 최은희도 金正日에게 납치되어 가서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하기까지 바로 지근의 거리에서 金正日과 그 추종자들을 관찰할 기회가 있었고, 그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책으로 간행한 바가 있었습니다.

햇볕을 들고 평양으로 가기 전에 당신과 당신의 추종자들은 한 번쯤 나와 내 아내의 기록은 물론이고 北에서 넘어온 黃長燁씨 같은 분들에게 조언을 구해 보는 것이 도리이자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북한을 방문하려는 서방의 기자들이나 정치가들 중에는 나의 책을 읽고도 모자라 멀리까지 나를 찾아와 金正日의 실체에 관한 더 정확한 지식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당신의 추종자들 중에 그런 노력을 보인 인물은 아직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당신들이 그러하니 국내의 방송들조차 金正日의 실체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나를 인터뷰한 일이 없습니다.

ABC, BBC, NHK 등 외국의 유명 방송사와 런던 데일리 텔레그라프, 보스턴 글로브를 비롯한 신문사들은 바보같이(?) 아직도 나에게 金正日을 묻는 인터뷰를 계속하여 요청해 오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당신들은 「햇볕」의 역사적, 현실적 당위성을 이야기할 때 「전쟁 억지력」을 가장 큰 이유로 내세웁니다

햇볕이 아니었으면 남북한 간에 당장 무슨 사단이 났을 텐데 햇볕으로 전쟁의 원인을 녹였다는 것이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당신의 햇볕이 없을 때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980년의 광주사태 때 북한은 남한을 무력침공할 절호의 기회를 잡고 남침 여부를 심각하게 저울질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침공하지 못했습니다. 남쪽에 그 무슨 「햇볕」이 있어서 침공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미국과의 전쟁이 정말 무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당신이 5년간 햇볕을 쪼인 뒤 북한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그 사이에도 핵무기를 개발했고, 남한 사회를 안으로부터 흔들어 놓았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사이를 파고들어 틈을 벌려 놓았고, 남한內 일부 사람들이 『북한에 핵무기가 있으면 어떠냐. 통일 되면 우리 것이 되는 것 아니냐』는 순진하고도 천치 같은 이야기를 태연하게 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전쟁의 가능성은 소멸되거나 완화된 것이 아니라 더 커졌습니다. 이것이 햇볕의 진정한 공로입니다. 당신이 원했던 것이 이것이었습니까?

당신과 당신의 추종자들이 상대인 金正日과 그의 체제를 잘못 파악했거나 파악할 의지가 없었다는 증거는 수없이 많습니다.

당신의 추종자들이 북한을 몰래 왕래하면서 그쪽이 자랑하는 만수대 혁명박물관을 관람했을 것이고, 저들이 땀 흘려 만든 역사책 「조선전사」를 읽어 보았을 것이며, 북한 땅 곳곳에 가는 곳마다 세워 놓은 수만 개의 동상을 눈으로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러고도 6?15 남북성명이라는 것을 만들어 서명했다면 그것은 남쪽 국민들에 대한 기만이자 민족의 역사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죄악입니다.

6-15 선언은 민족에 대한 반역

만수대 혁명박물관, 조선전사, 동상들이 보여 주는 의미는 북한 땅과 인민들이 온통 金日成 一家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남북한 간의 어떤 성명과 협약도 오로지 궁극적으로 사회주의 통일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천치 바보라도 알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만수대 박물관의 90개에 이르는 전시실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은 셔먼號 사건을 주도했다는 金日成의 할아버지로부터 金日成에 이르는 3代의 신화 같은 치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직 金日成 家系만이 일제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을 건진 유일무이한 정통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20여 권의 방대한 역사책인 「조선전사」는 역시 절반에 가까운 10여 권이 金日成 一家가 한국의 근대사를 주도한 것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세계의 어떤 王朝史도 이럴 수가 없습니다. 북한이 변한다는 것은 이런 모든 것을 뒤집는다는 것인데 그게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반세기 넘는 북한 왕조사를 송두리째 뒤집지 않고는 당신과 당신의 추종자들이 말하는 진정한 남북화해는 불가능하게 돼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6?15 회담을 했는지 정말로 궁금합니다.

그런 사실을 느끼고도 서명했다면 민족에 대한 반역이자 죄악일 것이며, 보고도 몰랐다면 이것 역시 직무유기로서 심판의 대상일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분명한 진실은 북한이 金日成 부자의 가부장적 전제군주 체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체제는 전제군주 일가의 수명이 다해야만 저절로 무너지게 돼 있는 것이지 외부의 「햇볕」으로 변화할 가능성은 눈꼽만치도 없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다행히도 金正日의 아들이라는 자들을 보면 북한 주민들이 3代에 걸쳐 충성의 멍에를 지지 않아도 될 정도이니 우리가 자유민주 체제의 강점을 살려 발전해 나간다면 저쪽은 저절로 와해될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입니다. 그런 정권을 당신은 붙들어 주고 연장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평화는 돈으로 살 수 없다

햇볕정책이 실패한 두 번째 이유, 즉 「은밀한 돈 거래로 평화를 살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추종자들은 은밀한 뒷거래로 소위 평화를 사려고 했습니다. 더 이상 어떤 변명이나 그 유명한 궤변으로도 이 사실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당신들은 아주 큰 실수를 했습니다. 평화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아주 기본적인 상식을 도외시한 잘못이 그것입니다. 당신과 당신 추종자들이 아주 평범한 이 진리를 몰랐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알고도 매우 긴박한 그 어떤 필요, 예컨대 노벨상 수상과 같은 절대적인 목표의 추구를 위해 상식을 밟고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판단일 것 같습니다.

북한은 달러에 목말라 있습니다. 특히 북한 지도자 金正日은 대부분 독재자들이 그렇듯이 막대한 비자금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나와 내 아내를 납치해 놓고 영화 만들기를 강요하면서 엄청난 물량을 지원해 주던 솜씨와 배짱으로 보아 그의 통치자금은 천문학적인 숫자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당신과 당신의 정부는 그런 金正日의 비자금 중 일부를 조달해 주는 代價로 「평화」를 산 셈인데 그렇게 하여 산 평화의 효력이 어떤 것인지 서해도발에서, 핵무기 개발에서, 그리고 여차하면 일방적으로 무산시켜 버리는 각종 회담과 약속의 파기에서 생생하게 경험했을 줄로 압니다.

돈이란 것은 아주 더럽고 치사한 것입니다. 주고도 욕을 먹는 것이 돈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거지에게 1000원씩 주다가 어느 날 500원을 주면 욕을 먹습니다.

최근 林東源 특사가 평양을 방문했으나 「위원장 동지」를 만나지 못하고 헛걸음을 한 것은 돈을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비아냥이 국제사회에 떠돌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실일 것입니다. 이로써 당신은 당신 자신을 포함하여 북한의 「장군님」은 물론이고 남북한 동포들 전체를 모독하고 명예를 훼손하였습니다.

최근 당신과 북한의 金正日은 6?15 남북 頂上회담의 뒷돈 거래가 밝혀지려고 하자 서둘러 금강산 육로관광의 시범 운행을 실시하고 北에서는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진 현대의 정몽헌과 김윤규를 보란 듯이 초청하고 南에서는 이들 두 사람에게 일시적인 출국금지조치 해제를 하여 또 한 번 세계를 향하여 꾸며 낸 연극을 보여 준 바가 있습니다.

그 행사에 참석한 鄭夢憲의 웃는 얼굴이 신문에 난 것을 보고 연민을 느꼈습니다. 陸路관광이든 海路관광이든 北에서 시혜를 베풀면 길이 열리고 北이 수틀리면 닫아 버리는 길이 아닙니까. 그런 속셈에 이용당하고 있으면서도 철없이 웃다니 한심하다는 생각입니다. 이제 北에서는 땅굴 수십 개에 해당하는 침공로를 열어놓고 손익을 계산하고 있을 테지요.

지난 5년 동안 당신과 당신의 추종자들이 돈을 주고 사 놓은 「평화」의 질량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상한 거래를 의심하는 사람들을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이들을 부추겨 전쟁狂, 수구반동분자, 외세의존주의자로 몰아세웠습니다.

민족애라는 이름으로 당신은 진정으로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이 허위의 장막이 영원하리라고 생각했다면 그거야말로 당신의 가장 큰 실수일 것입니다.

부시와 당신의 뒤바뀐 역할

당신은 북한을 잘 몰랐을 뿐만 아니라(아니면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었든지) 미국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북한의 「장군님」 또한 그 호칭에 어울리지 않게 미국에 대해 전략적인 시각에서 너무 무지하다는 사실을 요즘 절감합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마음씨 좋은 엉클 샘이 아닙니다.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비정한 나라입니다. 미국과 미국민은 거짓말을 가장 싫어합니다.

약속을 뒤집고 뒤통수를 치면서 떼를 쓰는 독재자의 허장성세를 가장 증오합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자기 국민들을 굶주림으로 내몰면서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정권을 지원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후세인의 정권을 인정하지 않듯이 북한 정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들어 있는 말입니다. 후세인 다음의 응징 대상은 金正日이라는 얘기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중재를 하겠다는 한국 대통령의 공언을 미국은 가소롭게 여길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한국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이유 중의 하나가 탈북 동포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태도입니다. 30만 명에 가까운 탈북자들이 만주 벌판과 중국 천지를 떠돌면서 매일매일 죽음의 공포와 싸우고 있다면 국가적 차원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마땅합니다.

제대로 된 정부를 가진 국가라면 다른 어떤 일보다 이 일을 최우선으로 해결하려고 할 것입니다. 특히 단 한 명의 自國 국민이라도 敵國에 억류되어 있으면 모든 국력을 다하여 구출하려고 애쓰는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오늘의 대한민국 정부는 정부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당신의 눈으로 볼 때 북한이 自國 국민 몇 사람 납치한 사실이 밝혀지자 國交정상화의 발걸음을 멈추어 버린 일본은 무엇이 「국익」인지 모르는 바보처럼 보입니까?

미국이 베트남의 오랜 역사의 자주 독립 의지를 잘 몰라 실패했듯이 오늘날 북한은 미국의 가치관과 세계전략을 잘 몰라 망할 것입니다. 미국이 가장 싫어하는 방식으로 북한은 흥정과 도박판을 벌이고 있습니다. 더욱 우스운 것은 북한이 벌여 놓은 그 도박판에 당신이 끼어들어 중재를 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지금 그런 입장입니까? 북한이 핵무기를 들고 미국과 대치하는 것은 그 핵무기를 미국으로 쏘겠다는 것이 아니라(북한의 핵탄두는 절대로 미국으로 날아갈 수 없습니다) 유사시에 남한을 겨냥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재라니요? 그렇게 한가합니까?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 같고 한국의 대통령인 당신은 바다 건너 제3의 나라 대통령 같은 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주한 미군의 존재 이유에 대해 요즘 일각에서는 『미국의 세계전략과 국가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주둔하는 것이지 우리를 위해 주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고 강변합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미국과 한국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이제 그 위협이 사라지기라도 했다는 것입니까? 갑자기 金正日이 감상적인 소녀로 둔갑하기라도 했다는 것입니까?

요즘 진보주의라는 이름의 대책 없는 낙관론자들은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고 순진하게 말합니다.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은 민족 내부의 전쟁이었다는 사실들을 새삼 들출 필요도 없이 불과 반 세기 전에 6?25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을 앞에 놓고 이처럼 순진한 소리들을 함부로 지껄여도 되는 것일까요? 남한 사람들의 시각을 이렇게 만들어 놓는 것이 「햇볕」의 진정한 목표였습니까?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어 한국인의 무너진 자존심을 살려달라

자리에서 물러나는 사람에게 잘잘못을 따지거나 돌팔매질을 하지 않는 것이 동양인의 미덕입니다.

이제 며칠 있으면 권좌에서 물러날 당신에게 굳이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당신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으로 인하여 상처받은 한국 및 한국인의 자존심과 실추된 국가 위신이 너무나 크고 깊기 때문입니다.

우리 외교는 더 이상 국제 사회에서 발을 붙이기 어렵게 됐고, 우방에 대한 신의는 땅에 떨어졌으며, 한국인이 콩으로 메주 쑨다 해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됐습니다. 이 모든 것이 「준비된 대통령」이라던 당신의 업적입니다.

이 업적들을 그냥 보따리에 싸들고 돌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일생 단 한 번만이라도 솔직해져서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고 국민과 세계를 향하여 사죄할 것은 사죄하여 국가의 위신을 회복케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여 이제 막 출범하는 새 정부로 하여금 당신이 파놓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하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는 당신이 거짓투성이의 남루한 옷을 걸치고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솔직하게 모든 것을 한 점 의혹도 없이 밝혀서 이후의 역사가 제대로 순항하도록 길을 닦아 준다면 우리는 오랫동안 당신을 기억할 것입니다.

당신의 재임 중 마지막이 될 편지를 쓰려고 사항을 적어 보았더니 그 항목이 너무나 많은 데 스스로 놀랐습니다.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국민들은 다 알 것이고 당신 또한 알고 있으리라 믿고 햇볕과 노벨상, 그리고 남북 頂上회담의 화려한 치적 뒤에 숨은 당신의 허위에 대해서만 몇 자 적었습니다. 부디 큰 용기를 내어서 한국인으로 사는 기쁨과 보람을 되찾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2006-04-12, 06:03


-아랫 글은 2006년 7월에 작성한 글입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햇볕정책

지난 98년 국민의 정부시절부터 시작한 ‘햇볕’정책은 결국 실패한 것으로 봐야한다. 지난 미사일 발사이후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쌀 비료 제공요구가 우리측의 6자회담과 미사일발사 중단 조건부 거절에 “북한의 선군(先軍)의 덕을 보는 남한”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과 “응당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협박의 마각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정부는 심한 배심감에 망연자실하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 미국과 우리의 보수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조건 퍼주기한 애정이 결국 ‘조폭에게 바친 조공’에 불과했다는 평가를 면할 수 없게 됐다. 그들이 주장하는 ‘선군 덕의 대가’라는 게 조폭들이 상인들을 지켜주는 대가로 요구하는 조공과 같은 맥락이다.

이로써 ‘햇볕’정책은 아니 함만도 못한 퍼주고 뺨맞는 정책이 된 꼴이 되고 말았다. 당초 햇볕정책을 펴면 북한이 개방으로 나와 남북긴장이 완화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조건과 대가없는 ‘퍼주기’에 몰두해왔다. 그러나 긴장이 완화되기는커녕 때 아닌 진보와 보수간 이념분쟁의 남남갈등만 증폭시켜 국론을 양분시켜놓았다. 어디 그 뿐인가 반미 친북정서는 극에 달해 이적단체인 한총련은 물론 민노총 전교조와 공무원노조까지 친북단체화되어 갈수록 폭력화되어 경찰은 물론 군대까지도 무력화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노대통령은 03년 취임 초 “다 깽판쳐도 대북관계만 잘 되면 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친북정책에 ‘올인’하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반 미·일 정서의 말을 자주 함에 따라 미일과 멀어지게 되었는데 이는 고의적인 발언으로서 지난 3월 인터넷 대화에서 “나는 좌파 신자유주의자이다”라는 말과 함께 김정일에 대한 아부성 발언인 것으로 봐야한다. 도대체 6.25동족상잔을 겪은 우리 민족 앞에서 대통령의 좌파라는 공언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것인가! 이러한 말을 하지 않으면 김정일에 가까이 갈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UN이 추진하는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애써 외면한 것도 모두 그 때문이다.

그러나 노무현의 이러한 충정의 의도와는 달리 이제 북한과도 미사일발사 사태로 인해 소원해지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민노총과 한총련 등 친북단체와도 한미FTA반대로 인해 멀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실패는 김정일을 순수한 보통 인간으로 호의적으로 평가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보통 순수한 인간이라면 응당 무한한 애정(퍼주기)에 감복하고 개방과 긴장완화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보통 순수한 인간이 아니다. 남한으로부터 받은 막대한 자금으로 핵과 미사일등 첨단무기개발에 혈안이었음이 98년이래 속속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북한은 김정일 주장대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김일성 세습에 이은 김정일 왕국일 뿐이다. 따라서 친북단체들은 김정일황제에 충성하는 반민족 이적단체임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들을 감싸 안으며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 반대시위를 은근히 도와주고 있어 군과 경찰이 시위대에 얻어맞는 일까지 벌어져 공권력이 땅에 떨어져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에 따라 민노총과 한총련등 반미 단체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도록 기고만장해있어 국민들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이러다가는 김정일 왕국의 적화통일이 될지 모른다는 국민들의 불안심리가 번져 지난 5.31지방선거에서 표를 한나라당에게 몰아주었던 것이다. 결코 한나라당이 예뻐서가 아니다. 그러나 청와대와 여당은 이를 부동산문제 때문만으로 곡해하고 있다.

김정일은 자기의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백만 인민이 굶어죽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으며 남한이 잘되는 꼴을 도저히 볼 수 없는 악마 같은 근성의 소지자이다. 88년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87년 KAL기 폭파사건(김현희주범)을, 6.15공동성명 2년 후 월드컵축구에 한껏 취해있던 남한에 찬물을 끼얹으려고 서해 기습작전을 벌려 아까운 해군병사 6명을 순직하게 했다. 이 서해교전은 남한에서 ‘퍼주기’한 자금으로 경비정에 첨단무기를 몰래 장착하고 벌린 도발인데, 이는 99년의 연평해전에서 첨단무기를 장착한 우리 경비함에게 24명의 북해군이 전사한 패전에 대한 복수전이라고 봐야한다. 이 때 정부가 철저히 원인 규명에 나섰어야 했는데 애써 ‘우발적 사건’으로 평가절하고 덮어버리고 말았다. 이제까지 해마다 열리는 서해교전 추모제에 국무총리나 대통령이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 ! 순직한 한 병사의 부인은 사랑하는 고국을 등지고 미국으로 이민가고 말았다고 한다.

이제 정부는 그토록 폄하하던 ‘보수꼴통’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에 후회할 처지자 되었다. 보수꼴통이란 머리가 텅 비었다는 말인데 과연 꼴통이 누구인지 이제 확연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말에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햇볕’정책이후 99년에 벌어진 연평해전, 3년후 벌어진 서해교전만 직시하고 철저히 정보파악 분석했더라면 진작 이러한 황당한 실패를 면할 수 있으며 보다 진전된 남북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동아 7월호에 게재된 “서해교전 4주년 총력취재”(아래글 참조)를 보면 그 사건들이 우리정부 주장대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김정일이 철저하게 지시한 기획사건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폭로는 북한 군부실세 오극열의 장남 오세욱 일당17명이 미군잠수함으로 탈북 해 미국에서 털어놓은 꽤 신빙성이 있는 사실이다.

98년 북한은 기름이 모자라 비행기 이륙도 못하는 처지였다는데 이제는 남한의 막대한 퍼주기 한 자금으로 핵과 미사일 개발등 첨단무기개발을 해왔다고 봐야한다. 그래서 옛 상전이며 동맹이었던 중국과 러시아의 미사일 발사저지 압력에도 굴하지 않으려한다. 이러한 사태를 미리 예견한 미국과 우리의 보수층들은 현금을 제외한 쌀과 비료등 물품만 제공하라고 정부를 설득하려고 했으나 정부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북의 이상한 행동과 말에 애써 긍정평가하기 일쑤였다.

98년 이래 김정일은 이번 미사일 난사 도발까지 세차례나 잊혀질만하면 깜짝쇼를 벌려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러한 도발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비자금(5억~10억달러)과 쌀 비료를 비롯한 생활필수품등 엄청난 물자를 퍼주고 단 1명의 국군포로나 납북자도 귀환시키려는 말 한마디조차 못하고 북한의 ‘달러벌이’인 금강산 관광과 이산가족 상봉등을 통해 꾸준히 외화를 퍼주었다. 이러한 퍼주기에 따라 햇볕정책의 목표인 남북간 경제협력이나 긴장완화를 얻었으면 그래도 성공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은 점점 더 횡포를 부려왔다. 금강산 관광주체인 현대상선의 임원의 인사까지 이래라 저래라 하더니 최근에는 한술 더 떠 남한정권에도 간섭하려든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한반도가 화염에 휩싸일 것”이라고 한 협박이 그것이다. 또 남북간 철도시험 운행등 굳게 약속한 중요한 행사를 하루를 앞두고 일방적으로 취소하기 일쑤다.

이럴 때마다 정부는 무엇에 코가 꿰였는지 마치 상인이 조폭두목을 모시듯이 고분고분하기 일쑤다. 이번 미사일 난사 사태에 대해서도 DJ와 노무현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이해할 수 없다”라는 한마디로 응하며 김정일 눈치만 살피고 있는 것 같다. 친북논자들의 ‘퍼주기’를 전쟁 억지력이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10번 퍼주다가 한번 안준다고 “선군 덕에 남한이 혜택을 보고 있다”며 “응당한 대가를 치룰 것”이라는 권호웅대표의 말은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말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도대체 한미 공조를 깨가면서 까지 자주국방하겠다는 정부가 이러한 엉터리 외교를 아무 거리낌 없이 해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길 없다. 자주국방 역시 북한을 손바닥 보듯이 훤하게 보며 미사일 발사를 어디에서 언제 했는지 또 몇 발을 쏘았는지 훤히 보는 미국을 멀리하고 언! ! 제 쏘았는지 또 몇 발을 쏘았는지조차 모르며 자주국방하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번 미사일사태 정보도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한 것이다.

광주민주화 항쟁을 욕되게 한 6.15민족 대축전

지난 6월15일 광주에서 6.15민족 대축전이 열렸다. 대다수 국민들은 이 축전을 반미 친북행사며 그들만의 잔치였다고 치부하고 역시 DJ는 ‘빨갱이’였던가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80년 민주화 시위 때 순직하거나 부상당한 수천 명의 민주투사가 ‘빨갱이’로 격하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반미정서는 미국의 실수가 컸다고 봐야한다. 80년5월 광주 민주화 항쟁은 신군부 독재 전두환을 몰아내고 민주화를 이룩하기 위한 성스러운 민주화 투쟁이었다. 그러나 작전권을 쥐고 있는 미군이 학생과 민간시위대를 무차별 사살하는 전두환 사병(私兵)을 응당 막아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이들 시위대의 기대를 미국이 외면한데서 반미정서가 싹트기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적의 적은 내편’이라는 등식에 따라 ‘운동권’ 사이에서 반미친북의 정서가 확산되었던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은 전두환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더 악랄한 독재자 김일성황제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이다. ‘민주투사’와 달리 ‘운동권’이라고 국민들이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이들이 소위 386세대들로 현 정권에 상당수 포진되었다고 한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집단이기주의와 투쟁일변도의 강성노조, 보혁 갈등의 이념문제 등 모든 문제는 광주항쟁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야한다.

당시 전두환은 자기 집권을 위해 광주 민주화 시위대를 언론조작을 통해 북한에서 조종하는 시위대로 몰고 DJ를 갖은 고문끝에 ‘빨갱이’로 몰아 사형언도까지 했기 때문에 대다수 국민들은 이에 속았었다. 그러나 분명 그는 민주투사였지 공산주의자는 아니라는 평가에 따라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한 그가 6.15대축전을 왜 하필 광주에서 정부의 막대한 비용을 받아 김정일황제가 보내온 인사들과 축배를 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마 5.31지방선거의 참패를 만회하기위한 행사였던 것 같다. 6.15공동성명이 성공했다고 자평한 행사인데, 과연 6.15공동성명은 성공했으며 DJ는 노벨상을 받을만한 공로가 있는가? 이때는 북한에서 대포동2호 미사일을 발사한다는 위협을 가하고 있던 때였는데, DJ는 이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북에서 내려온 꼭두각시들과 외세를 몰아내고 “우리끼리”라는 구호룰 외치며 희희낙낙 축배를 들었다. 그리고 얼마전 DJ는 열차를 타고 방북해 통일을 논의한다고 했는데, 김정일황제가 쉽사리 정권을 내놓고 민주화 통일을 하겠는가?

어림없는 소리다. 그가 아직도 적화통일에 혈안이 되어있는 게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서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DJ는 전여옥의원의 말대로 치매환자가 아닌지 모른다. 광주시민들은 6.15축전이 광주시민에게 해가되는지를 왜 묵과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북한 인권을 폭로하는 ‘요덕스토리’의 광주 공연을 반대했다는데, 이는 비호남 애국시민의 눈총을 받기 쉽다는 점을 왜 모르는지 참으로 이해 할 수없다.

이제 국민들은 폭력위주의 반미친북단체 시위대에 맥없이 무너지는 경찰과 군의 공권력을 보고 불안감에 휩싸여있다. 게다가 대포동 미사일발사 위협으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고 이는 국가 신인도에 악영향을 끼칠지 모른다는 우려감에 심기가 매우 불편한 실정이다. 어쩌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애국심이 있는 국민들은 잘 알고 있다.

김정일을 지근거리에서 보아왔던 황장엽씨나 북한에 납치되어 김정일 치하에서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던 신상옥감독(아래 글-신감독이 DJ에게 보낸 마지막편지-참조)이 ‘햇볕’정책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그토록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노벨상 수상 욕심에 이들 충고를 무시하고 강행한 DJ와 이를 여과 없이 물려받아 좌파 실험정치로 남남갈등만 눈덩이처럼 키우고 세대간 편 가르기와 친북정책에 매달리다 공권력을 땅에 떨어뜨리고 결국 국가신인도까지 하향될지 모르는 상황까지 몰고 간 노무현은 퇴임 후 국민으로부터 혹독한 심판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 지난 대선 때와 같은 또 어떠한 ‘꼼수’를 쓸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애국시민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2006년7월18일

한국증권투자상담사회 회장 최병화(koseca.co.kr)


[서해교전 4주년 총력취재]

“연평해전·서해교전은 김정일 ‘평화협박 전술’ 지시받은 3호청사·인민무력부·해군사령부 합동작품”

북한 핵심권부 전직 관료들의 정밀증언

신동아 특별취재팀


● 김정일, 연평해전 2개월 전 “체제대결 유발할 전술안 통 크고 대담하게 작성하라”
● 김정일, 연평해전 사흘 전 “이번에 해군사령부에서 영웅이 몇 명 배출돼야”
● 3호청사 ‘두뇌진’으로 구성된 태스크포스 ‘43조’의 실체
● 김정일, 연평해전 직후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경비함에 장갑철벽을 설치해주라”
● 김정일, 2001년 12월30일 오극렬에게 “서울에서 월드컵 하는데 당 작전부는 뭘 하나”
● 북방한계선 월선하며 자극한 어선은 인민무력부 정찰국 위장선
● 쏟아지는 파열탄, 귀청찢는 포성…승조원 몸에 박힌 파편 240개
● “남조선이 ‘우발사태’로 모니, 우리도 해군사령부 책임으로 몹시다”
● 김정일, 2002년 7월 “연평해전은 졌으나 서해교전은 사실상 이긴 전쟁”
● 사망 함장 1년 뒤 ‘공화국 영웅’ 칭호, 해임됐다던 8전대장은 1년 만에 복직

1999년 6월 연평해전 직전에 발생한 해군 고속정
(오른쪽)과 북한 경비정의 충돌 순간. 국방부

1999년 6월 연평해전 직전에 발생한 해군 고속정(오른쪽)과 북한 경비정의 충돌 순간. 국방부 2003년 말, 조선노동당 당중앙, 인민무력부, 군 사령부 등 북한의 주요 권력기관에 근무 중이던 18명의 핵심관료가 북한을 탈출했다. 이들 그룹의 실질적인 리더는 노동당 작전부장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핵심측근인 오극렬 대장의 장남 오세욱씨. 대부분 혁명 1세대 고위간부의 자녀인 이들은 북한 체제가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탈출을 결정했고, 보안상의 이유로 공개할 수 없다는 ‘특별한 접선방법’을 이용해 미국 정보당국과 접촉했다. 이후 이들은 치밀한 조율 끝에 탈출루트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북한의 고위간부 자녀들은 망명을 우려해 원칙적으로 해외출장이 허가되지 않는다. 때문에 이들은 중국 등 제3국을 경유하는 대신, 함경북도 청진항에서 몰래 배를 타고 공해상으로 나가는 방식을 택했다. 공해상에 나와 있던 미 해군 잠수함을 타고 일본을 경유해 태평양을 가로질러 미 본토로 왔다는 설명이다.

이들의 망명소식은 이듬해인 2004년 11월 일본 NHK 방송을 통해 처음 보도됐다. 이때의 언론보도는 망명한 이들이 ‘수십명 규모’라고 전하거나 오세욱씨가 친위대의 일원이었다고 전하는 등, 일부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었다. 올해 41세인 오세욱씨는 탈북 당시 인민군 중좌 계급이었으며, 무기개선에 관여하는 인민무력부 장비국 등에서 근무했다. 탈북 전에도 정치범 수용소를 두 차례 다녀오는 등 ‘체제부적응 인사’로 낙인 찍혀 친위대 근무는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한다.

2004년에는 조선노동당 대외·대남부서가 집중돼 있는 3호청사 소속 과장급 간부와 책임지도원 한 사람이 중국으로 빠져 나와 곧바로 제3국으로 망명했다. 올해 57세인 이 과장급 간부는 20대이던 1970~80년대 남파되어 대학을 다니며 공작활동을 벌인 경력을 갖고 있다. 이후 북한으로 돌아간 그는 남조선문제연구소 등 전문직책을 거쳐 통일전선사업부에서 근무하다 부하직원과 함께 망명을 결심했다.

2000년대 들어 미국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전직 북한 고위관료나 핵심기관 구성원, 공훈가족 자녀 등에 대해 치밀한 망명공작을 진행하고 있다. 황장엽 전 노동당 국제담당비서가 망명한 1990년대 중반 이후 남한으로의 귀순은 이들에게 ‘메리트’를 상실한 상황. 이 때문에 탈출을 결심하는 당국자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미 정보당국 등과 접촉해 이들 나라로의 망명을 택하고 있다. 미 정보당국은 장차 김정일 체제에 이상이 발생할 경우 이들을 규합해 망명정부 혹은 대체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치밀한 ‘체제전환 사전준비’인 셈이다.

최근 수년 사이 평양의 핵심 권력기관에서 일하던 간부들이 빠져 나옴에 따라, 북한의 내부상황에 대한 정보는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신동아’는 우연한 기회에 이들 중 일부와 접촉할 수 있었고 이들의 증언과 기록을 바탕으로 몇 차례의 특종보도를 했다(그러나 최근 이들의 소재나 생활이 안정되면서, 외신을 비롯한 다른 언론에 노출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들의 증언으로 2000년대 이후 벌어진 남북간의 주요사건을 둘러싼 ‘평양 내부의 움직임’이 확인되는 시점 역시 최근 2~3년 전까지 소급됐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1999년 6월15일 발발한 연평해전과 2002년 6월29일 발발한 서해교전이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둘러싼 이 비극적인 사건을 놓고, 이후 서울에서는 과연 이들 교전이 북한의 치밀한 계획에 따른 것인지 우발적인 사건인지에 대한 논쟁이 심각했다. 상당수 전문가 및 정부당국자들은 ‘우발 사건론’ 혹은 ‘군부 독자행동론’에 무게를 실었다. 김정일 위원장 본인이 그러한 취지의 발언을 남측 관계자들에게 한 적도 있다.

‘신동아’는 연평해전 7주년 및 서해교전 4주년을 앞두고, 이러한 견해의 타당성을 검증하고 그 구체적인 실체를 재확인하는 특별취재를 기획했다. 이를 위해 우리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인민무력부와 대남·대외공작을 담당하는 노동당 3호청사 등 주요기관에서 과장급 이상 간부로 재직하다가 망명한 전직 당국자들의 증언을 수집했다.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연평해전과 서해교전은 모두 김정일 위원장의 사전 특별지시에 따라 기획, 실행된 의도적인 군사행동이었다.

연평해전의 경우, 김 위원장은 ‘햇볕정책’ 이후 이완된 북한의 협상우위를 찾을 방법을 구상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이에 따라 3호청사는 DMZ(비무장지대)에서의 국지도발 등 다양한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정주영 현대 회장의 금강산 개발사업 등이 진행되고 있어 적절치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마지막에 착안한 것이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 언급돼 있는 서해 북방한계선의 문제였다.

이를 근거로 서해에서 해상 무력도발을 일으킨다는 3호청사의 기획안은 김 위원장의 극찬 속에 통과됐고, 해군사령부 차원에서 은밀히 실행 작업이 진행됐다. 이를 담당한 해군사령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격려할 만큼 김 위원장의 ‘특별한 관심’ 속에 준비됐다는 것. 애초에 ‘소규모 해상 교차사격’ 정도로 계획됐던 해전이 생각보다 확대되어 사실상 북한측이 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김 위원장은 군의 노고를 치하하고 서해함대 경비정의 성능개선을 직접 지시했다는 증언이다.

서해교전의 경우, 김 위원장이 5월1일 해군사령부를 직접 방문해 구성원들을 일일이 격려해가며 준비한 사건이었다. 교전이 끝난 후에도 “사실상 우리가 이긴 전쟁”이라며 치하를 아끼지 않았고, 책임을 물어 경질했다고 발표한 서해함대 8전대장은 1년 뒤 복직했다는 것이다. 두 해전의 기획, 준비, 실행, 사후점검에는 3호청사와 인민무력부 구성원들이 참여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사후점검 과정에서 교전에 투입됐던 북한 해군 병사들을 통해 당시 상황을 세밀하게 복원해 이를 김 위원장에게 보고했다.

‘신동아’는 다양한 방법으로 수집한 관련증언을 ‘로동신문’ 등 당시 북한의 공식매체에 실린 기사내용을 통해 가능한 부분까지 최대한 검증한 뒤, 이를 시간 순으로 정리했다. ‘신동아’는 서해교전 직후 출간된 2002년 8월호의 ‘6·29 서해교전은 김정일의 ‘6·15 격침작전’이었다’ 기사를 통해 남측 군 당국의 조사결과와 정보기관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사건의 진상에 접근한 바 있다. 다시 한번 총력을 기울여 북측 당국자의 회고와 증언을 취재한 이 기사를 통해 ‘서해교전의 실체’를 더욱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알려진 대로 1994년부터 1998년 사이 북한에서는 300만명 이상의 주민이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이 때문에 정권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나 동요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졌다. 여기에 1998년부터 본격화된 국제사회의 인도주의 지원물자와 한국의 대북지원도 간단치 않은 문제를 야기했다. 북한 주민들에게, 반세기 이상 ‘주적(主敵)’으로 교육 받았던 미국과 한국 ‘지도자 동지’도 주지 못하는 식량을 무상으로 보내준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남한’이라고만 해도 “왜 남조선으로 부르지 않았느냐”며 정치범 수용소로 연행하던 북한체제에서, 많은 이가 한국 혹은 대한민국이라고까지 자연스럽게 부르는 지경이 됐다.

더욱이 수백만이 굶어죽는 상황에서도 김일성의 시신을 안치할 금수산기념궁전 건설에 수억달러의 돈이 투입됐다. 평양 시민들을 비롯한 주민들의 반감은 커질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남한에서 올라오는 무상지원을 ‘고맙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남한의 대북지원으로 인해 적대감이 희박해지는 북한주민들의 의식변화는 ‘체제불만’을 넘어 ‘체제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김정일은 이러한 주민 정서를 되돌리기 위해 ‘남조선은 북침의 기회를 노리는 민족의 적’이라는 실체적인 증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햇볕정책에 담긴 ‘경제지원과 교류로 한반도의 평화를 안정적으로 관리한다’는 문구에 자극을 받은 김정일은, 이후 두 차례 교전의 출발점이 되는 첫 번째 교시를 내린다. 1999년 4월3일, 조선노동당의 대외·대남전략부서가 모여 있는 모란봉구역 전승동 ‘3호청사’에 “적들이 햇볕정책을 대북정책으로 고착시키는 만큼 우리는 평화협박 전술로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고 지시한 것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 ‘우리의 총창 우(위)에 평화가 있다’는 노래를 높이 평가했다. 1996년 무렵 왕재산 경음악단에서 창작한 이 노래야말로 “선군(先軍)시대의 명곡이고 명답”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김정일은 “체제대결을 첨예하게 유발시킬 수 있는 전술안을 통이 크고 대담하게 작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정일의 이 특별지령에 따라 통전부를 비롯한 3호청사 구성원들은 4월10일경부터 ‘두뇌진’을 총동원해 구체적인 ‘대적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3호청사의 ‘두뇌진’이란 대남(對南) 침투경험이 있거나 조국평화통일서기국 참사실 등에서 남북대화를 담당하며 남측 인사들을 접촉한 경험이 충분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대외·대남전략과 관련한 김정일의 지시가 떨어지면 그 집행을 위해 3호청사 부서들은 산하 연락소 가운데 업무능력이 가장 뛰어난 전문직 일꾼들을 엄선해 임시조직을 발동한다. 이때 이 임시조직 명칭은 김정일이 해당 지시를 내린 날짜를 따서 결정한다. 따라서 4월3일 김정일의 ‘통큰 전술안’ 지시를 준비하는 임무를 맡은 임시조직의 이름은 ‘43조’로 결정됐다.

그러나 이미 교류정책을 진행하고 있는 남한을 상대로 예전처럼 무작정 무장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1998년 소떼를 몰고 방북한 정주영 현대 회장과의 경제교류 협의도 43조가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내기 어렵도록 제한한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현대라는 거대기업의 투자를 유도하면 한국의 많은 기업을 대북지원과 교류에 끌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3호청사 부서들은 현대와의 사업을 대단히 중요시하고 있던 터였다.

‘현대와의 경협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인민들의 대남 적대감을 자극할 수 있는 갈등’이라는 조건은 매우 까다로운 것이었다. 이 때문에 43조는 한 달 이상 통일전선사업부 소속 초대소에 모여 고민했지만 이렇다 할 아이디어를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국가보안법 철폐나 주한미군 철수, 한미연합훈련 중지 같은 고전적인 문제는 갈등의 소재로 삼기에 너무 약했다.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 범위를 넓혀나가던 43조는 ‘갈등의 빌미’를 찾기 위해 전쟁 이후 남북간에 맺어진 합의문건들을 연구, 분석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5월 중순,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한다. 1991년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 부속합의서를 위한 협의에서 북한이 협상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제기했던 ‘서해 5개 도서 주변해역 관할권 주장’에 착안한 것이다. 이 해상 부분의 경계선은 1953년 정전(停戰)협정에서 모호하게 규정된 것으로, 영해권 싸움이 쟁점이 될 경우 이는 사실상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는 것을 의미했다.

“육상전이 아니라 해상전이다”

3호청사 두뇌진이 애초에 김정일의 지령을 받았을 때는 ‘육지에서의 무력충돌’ 범위 안에서만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남과 북 사이에 실질적으로 무장교전이 가능한 지역은 막강한 화력이 상호배치돼 있는 비무장지대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대가 제기한 육로관광 문제가 족쇄로 작용했다. 북한은 현대가 초기협상에서 제기한 육로 관광방안을 잠정적으로 불허했지만, 앞으로 남북경협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개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깊이 의식하고 있었다.

1980년대 말 ‘남북경협’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도 노동당 대남정책 부서들은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이미 원산까지 개방을 검토한 사례가 있었다. 그때 김정일은 이러한 방안을 ‘체제위협’으로 간주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바 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들어 김정일은 남북관계를 ‘조미(朝美)관계 회복까지의 과도작업’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육로를 언제 개방할지가 최대의 쟁점이 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당시의 북한으로서는 남한으로부터의 지원과 경제교류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으나, 비무장지대에서의 직접적인 위협이나 분쟁은 그 모든 문제를 단번에 위축시킬 공산이 컸다. 다시 말해 한국 기업이나 관광객을 안정적으로 끌어들이자면 육지에서 대결을 벌이는 대신 바다로 무대를 옮겨야 한다는 게 43조의 최종 결론이었던 것이다.

43조가 서해 영해권 주장에 대한 제의서를 작성해 김정일 서기실에 제출한 것은 1999년 5월말이었다. 이를 보고 받은 김정일은 3호청사 부서들이 ‘귀중한 발견’을 한 것에 대해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서해전선’이야말로 남조선의 북침도발을 명백하게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전술안이며, 놈들을 우리의 선군정치로 단단히 구속시킬 수 있는 현 시대의 가장 주동적인 명안”이라는 칭찬이 거듭됐다. 하루도 지체하지 말고 즉각 작전을 추진하라는 김정일의 지시에 3호청사 부서들은 ‘서해전선 사업’을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 그 구체적인 방향을 논의하고 관리방법을 계획했다.

우선 3호청사는 서해전선 사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려면 시일을 두고 꾸준히 수위를 높여나가는 단계적 전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북한이 연평해전 직후 ‘로동신문’ 기사 등을 통해 서해상의 남북 경계선에 대한 구체적인 제의를 내놓은 것 역시 43조가 사전에 준비한 이른바 ‘단계화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서해상 경계 문제를 남북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장기적인 카드로 만들어 나간다는 복안이었다.

장기화 전략까지 치밀하게 준비한 3호청사 부서들은 곧 인민무력부 작전국과 협의에 들어갔다. 구체적인 위치와 날짜, 작전방법과 동원할 부대 등을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북한이 연평해전 날짜를 6월15일로 정한 것에는 6월이 꽃게잡이 철이어서 영해권 갈등을 가장 첨예하게 일으킬 수 있는 시기라는 판단이 작용했다.

특히 북한 주민들의 대남 적대감을 자극하려면 북한의 어민들이 남한의 해군에게 납치되거나 사살당하는 시나리오가 가장 적절한데,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기에는 꽃게잡이 배들의 월선(越線)이 많은 6월이 적기라는 판단도 있었다. 실제로 3호청사와 인민무력부는 군사충돌의 효과를 배가시키기 위해 어민들이 남한 해군에 납치되게 만드는 구체적인 방안도 추가로 준비했다. 연평해전 당시 군사요원들의 지휘 하에 꽃게잡이 배들이 앞장서서 나온 것은 이러한 전술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번에 해군에서 영웅이 몇 나와야…”

북한 해군사령관 김윤심 대장. 서해상에서 벌어진 두 차례 교전의 실질적 책임자다

북한 해군사령관 김윤심 대장. 서해상에서 벌어진 두 차례 교전의 실질적 책임자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북한이 처음부터 교전의 규모를 크게 확정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에 대한 적대감을 고취시키고 김대중의 햇볕정책에 대해 평화협박으로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자는 목표였으므로 몇 발의 총격을 교환하는 정도로 계산했다. 남북경제 협력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했던 3호청사 부서들로서는 전투작전을 축소해서 계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작성중인 작전계획의 구체적인 내용은 43조 기본 성원들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 리명수 대장, 해군사령부 사령관 김윤심 당시 상장만이 알도록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해군사령부 작전지휘 성원들도 교전이 발생한 뒤 서해함대 사령부로부터 긴급전투상황을 전달받고 나서야 비로소 전투지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마침내 완성된 연평해전 작전계획을 김정일이 비준한 것은 6월12일이었다. 이날 김정일은 김윤심 사령관에게 따로 전화를 걸었다. 측근과 조직관리에 탁월한 김정일이지만, 집에까지 직접 전화를 거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김윤심은 원래 서해함대 사령관으로 근무하다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의 뒤를 이어 해군사령관으로 승진한 인물이었다. 김정일을 수행해 각종 공연을 다닐 정도의 측근이었다. 평양시 마람동 해군사령부 내에 위치한 김윤심 상장 저택으로 전화를 걸어온 김정일은 “이번에 해군사령부에서 영웅이 몇 명 배출돼야겠다”며 격려했다.

이 무렵 해군사령부에서는 김정일의 고무에 감동한 김윤심이 “장군님의 어뢰알이 되겠다”고 맹세했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이후 김윤심의 이 ‘어뢰알 맹세’는 육군의 ‘총폭탄 맹세’처럼 해군사령부의 충성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 그때부터 김정일은 군 행사 때마다 김윤심을 “나의 어뢰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연평해전 사망자만 24명

연평해전 다시 우리 해군 고속정의 반격을 받아 화염에 휩싸인 북한 경비정 682호. 갑판에서 병사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연평해전 다시 우리 해군 고속정의 반격을 받아 화염에 휩싸인 북한 경비정 682호. 갑판에서 병사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김윤심은 남한과의 교전에서 김정일이 지시한 ‘어뢰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작전 이틀 전인 6월13일 남포직할시에 있는 서해함대로 내려갔다. 서해함대 사령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그는 예하 전대 지휘관들의 개별적인 성향까지 다 파악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그는 직접 교전에 참가할 경비함과 함장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북한에서 경비함이라고 불리는 배는 한국의 쾌속정 크기에 해당하는 배다. 북한에서 가장 큰 배로는 1960년산(産) 옛 소련제 전함 두 척이 있다. 이를 구축함이라고 부르며 동해와 서해함대에 각각 한 대씩 배치했다. 그 다음 함선이 바로 경비함이다. 원래는 며칠씩 바다에 나가 북방한계선까지 순찰하는 임무를 담당하지만, 연료사정이 형편없는 북한의 사정상 이미 1970년대부터 북방한계선 부근에 도착하면 한 자리에 서 있는 식이다. 바다순찰이 아니라 바다보초를 서는 셈이다. 인민무력부나 총참모부 등이 김정일의 4월3일 지시 이전에는 북방한계선의 의미를 잊고 지내다시피 한 것에는 해군의 기동력 부족도 큰 원인이었다. 북방한계선 주변활동에 공백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윤심은 서해함대 지휘관들에게는 자신이 내려온 이유가 무엇인지 일절 발설하지 않았다. 대신 가장 용기 있고 젊은 함장들을 불러 면담을 진행했다. 함장은 해군사령관에게 구구절절 자신의 충성심을 피력했고, 김윤심은 면담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평양으로 돌아왔다. 임무를 맡은 함장들이 자신들의 임무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은 경계근무 순찰을 위해 출항하기 바로 전날이었다. 3호청사 요원과 당 조직지도부 군사담당 성원으로부터 ‘당적(黨的) 지시’를 받은 함장들은 그때야 비로소 해군사령관이 자신을 면담한 의미를 알 수 있었고, 자신에게 부여된 혁명과업을 피로써 수행하겠다는 일념으로 출항하게 된 것이다.

인민무력부 작전부는 교전계획이 은밀하게 추진될 수 있도록 작전을 치밀하게 구체화했다. 남한측이 함선간 무선통신을 도청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은,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해병(해군 병사)들이 비밀을 발설할 수 있는 만큼 함장의 사격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어떤 해병도 작전의 목적이나 내용을 일부조차 알 수 없도록 지시했다.

마침내 6월15일 오전, 경비함 네 척이 꽃게잡이 어선 20척을 앞세우고 북방한계선을 넘었다. 남한 해군의 고속정과 초계함 10여 척이 ‘충돌기동’을 위해 자동소총 사정거리 안까지 접근했다. 서로 밀고 당기는 함선 충돌 끝에 북한 해병 하나가 반찬으로 실은 소금에 절인 무를 남측 함정에 던졌다. 수류탄을 던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몸을 숨겼던 한국 해병들이 수치심에 분노하자, 함장은 조준사격을 준비하라고 함선 포장에게 명령했다. 남한측 해군 병사들은 순간 당황했고, 이내 북측 경비함의 25mm 기관포가 불을 뿜었다. 북한 어뢰정 3척도 가담했다.

그러나 화력은 남한 해군이 훨씬 강했다. 남측 초계함의 76mm 함포와 고속정의 40mm 기관포 등은 서해함대의 어뢰정 1척과 경비정 1척 등 2척을 침몰시켰고, 다른 경비정 3척도 크게 파손된 채 퇴각해야 했다. 군사기술의 차이로 인한 결정적인 패전이었다. 인명피해만도 즉시 사망자와 추가 사망자를 합쳐 24명에 달했다. 열악한 의료체계 때문에 후송 도중 사망한 병사가 많았다.

“경비함에 장갑철벽 설치해주라”

서해교전 두 달 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포 해군사령부 방문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로동신문' 2002년 5월 2일자

서해교전 두 달 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포 해군사령부 방문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로동신문' 2002년 5월 2일자 그 순간 북한의 ‘조선중앙TV’ 방송은 진행 중이던 프로그램을 모두 중단하고 연평해전을 전쟁개시 소식처럼 긴급하게 연속 보도했다. ‘남조선에서 쌀이 들어온다’는 소문에 내심 호의를 품고 있던 주민들은 경악했고, 온 나라가 극렬한 반(反)남조선 감정으로 달아올랐다. 노동당 조직과 조선직업총동맹 조직은 물론 심지어 소년단 조직들도 남한에 대한 주적 교양과 함께 ‘해전에서의 혁혁한 성과’를 허위 선전하는 작업에 나섰다.

반면 참혹한 패전의 실상을 알고 있는 인민무력부와 해군사령부는 책임문제 때문에 서로 신경이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졌다. 특히 김윤심 해군사령관은 ‘어뢰알’이 불발탄으로 끝난 참패 때문에 잠도 편히 못 자는 지경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3호청사 부서들도 너무나 큰 손실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불안한 상황을 뜻밖의 방법으로 해결해준 것은 다름아닌 김정일이었다. 교전 이틀 후인 1999년 6월17일, 김정일에게서 “이번 전투는 참 잘됐다”는 치하가 내려온 것이었다. “싸움 그 자체보다 그 싸움이 주는 효과를 잘 이용하는 것이 당초 목적이었던 것만큼,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라며 3호청사 성원들을 격려하기까지 했다. 연평해전 3개월 후인 1999년 9월에는 김윤심을 불러 군 공훈합창단 경축공연을 함께 관람함으로써 그의 불안도 말끔히 씻어주었다. 이렇게 되자 3호청사는 3호청사대로 북방한계선에 대한 후속전략을 서둘러 추진했고, 군부는 군부대로 다음 전투 준비를 완성하기 위한 함대의 군사기술 상의 보완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군수(軍需)경제 전문가인 연형묵의 책임하에 제2경제지도위원회 기술자들과 간부들이 서해함대에 내려와 함선의 기술적인 개선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교전에 참가했던 해병들은 한결같이 남측의 함대 선진화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중에서도 방탄설비 문제가 가장 많이 제기됐다. 이를 수집한 연형묵은 이 사실을 곧바로 김정일에게 보고했고, 김정일은 이내 “경비함에 장갑철벽을 설치해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장갑철벽을 설치하면 함선이 그 중량을 못 견디기 때문에, 대신 탱크 포를 내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T-34 탱크에서 포신만 떼어내 배에 부착한 이 포는 파도가 아무리 높아도 조준점을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어 북한 경비함의 장점으로 꼽히는 무기였다. 결국 제2경제지도위원회는 2002년 서해교전 발발 때까지 아무런 대책도 세울 수 없었다(서해교전 후에야 방어설비보다는 화력을 보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소련제 다발식 고사총을 추가 설치하는 방식으로 함선을 재무장했다).

연평해전 닷새 후인 6월20일, 김정일은 기여한 해병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컬러TV와 사탕과자류 상자를 하사했다. 그리고 사망한 함장과 정치지도원에게는 영웅칭호를, 나머지 전사자들에게는 국기훈장1급을, 살아 돌아온 해병들에게는 전사영예훈장을 수여했다. 3호청사도 연평해전으로 인해 남한과의 대화전략에서 ‘북방한계선 문제’라는 강력한 무기를 갖게 됐다. 그리고 ‘군부의 입장’을 내세워 북방한계선이라는 견제카드로 전략적 필요에 따라 침범이나 교전협박을 활용할 수 있게 됐다. 남북대화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는 계기였다.

노동절에 해군사령부 찾은 까닭

오극렬 조선노동당 작전부장. 그의 장남 오세욱씨의 미국 망명 이후에도 건재한 군부실세다.

오극렬 조선노동당 작전부장. 그의 장남 오세욱씨의 미국 망명 이후에도 건재한 군부실세다. 그렇다면 김정일이 2002년 서해교전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선뜻 믿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때 서울에서 열리도록 예정돼 있던 월드컵이었다. 김정일은 2001년 12월30일 대남공작부서 간부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중앙당 작전부장 오극렬에게 “서울월드컵에 대처하여 어떤 구상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가 벌인 KAL기 폭파 같은 충격적인 사건을 의중에 두고 있다고 생각한 오극렬은 “장군님 명령이라면 그 어떤 일도 해낼 자신이 있다”고 대답했다. 김정일은 “놈들이 월드컵까지 치르고 나면 더 오만하게 나올 것”이라면서 “놈들에게 돈이 있다면 우리에겐 그 모든 것을 요절낼 수 있는 선군의 무기가 있다”고 말했다.

이때 김정일이 강조한 방법이 바로 “서해 경계선을 잘 이용하여 숨돌릴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이러한 의지와 결심을 신년 공동사설에 반드시 천명하라고 지시했다. 공동사설이란 매년 1월1일 한 해의 ‘당적 과업’을 제시하기 위해 내는 사설로, ‘로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위’ 등의 매체에 함께 실린다. 2002년의 공동사설이 “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대한 인민군대의 립장은 단호하며 우리의 총대는 무자비하다. 만약 미제(美帝)와 그 추종세력들이 감히 불질을 한다면 덤벼드는 침략자들은 무주고혼(無主孤魂)이 될 것이며 적들의 침략적 아성은 그 어디에 있건 무사치 않을 것이다”라는 종전보다 훨씬 강도 높은 문장들로 쓰여진 것은 바로 김정일이 내린 이 특별지시에 따른 것이다.

2002년 새해에 들어서까지 몇 번에 걸쳐 반복된 김정일의 월드컵 관련 발언에 모든 대남공작 부서는 엄청난 긴장상태에 시달렸다. 벌써 수십년을 헤아리는 김정일의 통치 스타일에 적응이 된 당 관료들은 특유의 직감을 갖고 있었다. 정확히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를 모를 뿐, 김정일이 무언가를 구상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들 직감하고 있었다. 더욱이 연평해전의 주역 해군사령관 김윤심 상장이 4월13일자로 대장이 되자 직감은 더욱 분명해졌다.

결국 이 직감은 김정일이 국제노동자절인 5월1일에, 마땅히 가야 할 공장기업소나 농장이 아니라 해군사령부를 방문하면서 정확히 맞아떨어졌다(해군사령부는 원래 평양시 형제산구역 서포동에 있었으나, 폭격위험에 노출돼 있다며 평안남도 평성시 부근 마람동(행정구역 상으로는 평양시)의 옛 리제순 군사대학(국경경비대학) 자리로 옮겼다). 해군사령부 본부 건물에는 연평해전을 형상화한 대형 유화가 한 점 걸려 있었다. 김정일은 이날 이 그림 앞에서 “오늘의 최전선은 육지가 아니라 바다이며, 때문에 조국의 분계선은 민병이 아니라 해병들이 지키고 있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시간이 없지만, 바다에서 싸움이 붙으면 어떻게 지휘하는지 꼭 봐야겠다”며 갱도 안에 있는 작전지휘통제실로 들어갔다. 한반도 전해상을 감시하고 서해함대 및 동해함대 작전을 지휘할 수 있도록 현대화된 작전지휘통제실을 둘러본 김정일은 싸움준비를 잘해놓았으며 공군보다 더 잘돼있다고 만족스러워 했다.

김정일은 이어 통제실 안내를 담당한 지휘관에게 연평해전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보라고 요구했다. 지휘관은 “적군과 아군이 똑같이 점으로만 표시되고 구분이 잘 안 되는 전광판이어서 속도가 느린 점을 아군으로 파악하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김정일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민으로 위장한 정찰국 요원들

2002년 7월 11일 사곶 외항 접안시설에 정박해있는 684호(사진① 점선원 안). 2004년 2월 촬영된 같은 지역의 선박(사진②)과 비교해 보면 크게 파손된 상태임을 확인할 수 있다.

2002년 7월 11일 사곶 외항 접안시설에 정박해있는 684호(사진① 점선원 안). 2004년 2월 촬영된 같은 지역의 선박(사진②)과 비교해 보면 크게 파손된 상태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내 “조선반도는 삼면이 바다인만큼 ‘육해공군’이 아니라 ‘해육공군’으로 부르고 싶다”면서 “나는 가장 힘들 때 서해교전(북한에서는 1999년 연평해전을 서해교전이라 부름) 희생자들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공군에는 길영조(비행기가 추락하자 김일성 동상을 피해 바다로 기수를 돌려 죽은 조종사)가 있고 육군에는 김광진(훈련 도중 전우들을 구하기 위해 주변에 떨어진 수류탄을 안고 자폭한 병사)이 있다면 해군에는 서해교전의 영웅들이 있다”는 말로 다시 한번 ‘서해전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고 나서 김정일은 전체 해군사령부 군인들, 심지어 엊그제 입대한 전사들까지 불러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그로부터 두 달 가량이 지난 6월29일, 한국과 터키의 서울월드컵 3, 4위전이 벌어지던 날 서해교전이 터졌다.

6·29 서해교전을 준비하는 작전은 6·15 연평해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미 경험이 있는 만큼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번에도 구체적인 작전내용은 참전 해병들에게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경비정이 많지 않다 보니, 연평해전 당시 남측해군의 포격에 반파된 채 돌아왔던 8전대 등산곶 기지의 684호도 선발됐다. 출항직전 극비로 전달된 사항이다 보니, 이 배의 해병들은 그날도 평시와 다름없는 수준으로 준비작업을 하고 있었다. 함선에 공급되는 디젤유를 내다팔기 위해 몰래 빼낸 해병도 있었고, 함선의 기술적인 준비도 충분치 못했다.

함장은 출항을 며칠 앞둔 밤에 비상령을 내려 디젤유를 보충하게 했고, 잠자는 기관장을 깨워 그간 방치돼 있던 고장난 보조조타를 긴급히 수리하도록 명령했다. 함선에는 기본조타가 고장났을 때 수동으로 대처할 수 있는 보조조타가 있는데, 함장은 이날 내려온 3호청사 요원과 당 조직지도부 대남공작 담당 과장, 인민무력부 작전국에서 나온 장성과 함께 이 모든 결함을 점검한 것이다. 탄약도 평시와 다르게 가득 채우도록 지시했다. 이를 보면 서해교전은 6월29일이 아니라 이미 한참 전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해군사령부는 남한 해군의 근무경계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우선 고기잡이 배들을 내보내 일부러 서해 경계선을 침범하게 했다. 이들 어선에는 평범한 어민들 대신, 어민으로 위장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성원들이 타고 있었다. 연전연승하는 월드컵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정찰 자료들은 “남조선 해병들에게서 심리적 공백이 역력해 보인다”는 보고를 쏟아냈다.

6월20일 경부터는 도발수위를 더 높여 어선이 아니라 함선으로 북방한계선을 넘었다. 남측 해군의 반응을 타진하기 위한 수법이었다. 그리고 하루 전날인 28일에는 과감히 두 대를 침투시켰다. 그러나남측 해군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남측 함선들이 단호한 대응자세를 보이면 교전 자체를 며칠간 연기하며 기회를 본다는 것이 애초의 계획이었다.

이렇듯 경고방송 수준의 반응이 이어지자, 김정일의 명령을 받고 영웅심리에 들떠 등산곶 기지에서 출항한 함선 684호와 육도에서 출발한 388호는 6월29일 아침 더욱 격렬하게 남측 함선들과 기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오전 10시30분 경에는 684호가 85mm 탱크포를 정확히 조준해 남측 함선에 발포했다.

이 첫 번째 포탄은 남측 고속정에 명중했고, 탱크의 장갑판도 뚫을 수 있는 포탄인지라 여지없이 고속정의 조타실을 찢었다. 해병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이내 남측 함선도 불을 뿜으며 반격에 나섰다. 인근에 있던 남측 함정들이 힘을 보태자 684호의 85mm와 37mm 함포, 소련제 고사총 등 대부분의 화력이 순식간에 제 구실을 하기 어렵게 됐다. 그 와중에 상대편 저격수의 총에 맞은 함장이 즉사하고, 대신 보위지도위원이 지휘를 맡았다. 기본조타가 부서져 나가자 684호는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 올랐고 총소리로 사방이 가득한 배 위에서는 옆에 선 전우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옆 사람을 부르려면 철모를 후려쳐야 돌아볼 지경이었다. 파열탄의 파편이 시커멓게 쏟아져내렸다. 남측 함선들이 속속 도착해 684호를 향해 불을 뿜었다. 몇 대나 몰려왔는지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병사들은 공포에 질렸고, 결국 684호의 후미에서 큰 불꽃이 솟아올랐다. 보위지도위원은 퇴각을 명령하고 보조조타를 이용해 북으로 기수를 돌렸다. 뒤에서 대기하던 육도의 388호가 예인선을 걸었다. 전투개시 30분이 지난 11시 무렵, 드디어 포격이 멈췄다. 이들에게는 수리시설이 있는 사곶 기지로 들어오라는 무선지시가 떨어졌다.

“6·15는 졌지만 6·29는 이겼다”

경비함들이 귀환한 직후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작전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온 3호청사 요원들이었다. 귀환한 해병들은 거의 다 중상을 입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되지 않았다. 연평해전 때보다 희생자수는 훨씬 적었지만 해병들의 공포는 더욱 컸다. 사곶 기지로 겨우 돌아온 부상 해병들은 헬기에 실려 평양시 대동강구역 문흥동에 위치한 조선인민군 제11호병원으로 긴급후송됐고, 이후 외부와 철저히 차단돼 치료를 받았다. 어떤 해병은 몸에 박힌 파편의 숫자가 240개에 달했다. 당시 전투상황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상처였다.

대부분의 해병은 아직 전투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경황이 없었다. 3호청사 성원들은 업무특성상 작전전개상황이나 군사기술적인 문제보다 상대편 사상자 숫자에 관심이 많았다. 어떤 해병은 자기가 쏴 죽인 놈만 10명이 된다고 했고, 또 어떤 해병은 모두 합쳐 100명쯤 죽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남한 언론은 벌써 ‘사망 4명, 실종 1명, 부상 19명’이라는 자기측 피해상황을 보도하고 있었다. 이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던 3호청사 성원들이 “똑바로 말하라”고 으름장을 놓자 그때야 해병들의 입에서 진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군사적으로는, 남한 해군은 전투준비 명령이 떨어지면 일단 갑판 밑으로 사라지는데 북한 해군은 반대로 갑판 위로 올라와야 하기 때문에 피해가 더욱 컸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래서 파열탄이 우박처럼 떨어지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남한 함선의 이동속도가 너무 빨라 전투 주도권을 쥐기 어려웠다는 분석도 있었다. 해병들은 남한 병사들이 입은 방탄조끼를 부러워했다. “솜옷이라도 입으면 그나마 파편을 일부라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해병들의 요구에 따라 그 후 인민무력부는 8전대 전체 해병에게 두터운 목화 솜이 들어간 옷을 지급했다.

이후 보고과정에서 해병들은, 기본조타가 고장이 나서 보조조타로 돌아왔다며 사전에 함선을 면밀히 점검해 방치돼 있던 조타를 수리한 함장을 추켜세웠다. 또한 총알과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데 기관포 사수가 자기의 철갑모를 보위지도위원에게 벗어주더라는 ‘감동적인’ 이야기도 쏟아냈다. 그동안 당 차원에서 군인들을 상대로 진행해오던 이른바 ‘총폭탄 교양효과’가 입증된 사례였다. 또 해병들은 목숨을 내놓고 싸운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영웅이 되고 싶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지난번 연평해전 때는 컬러TV를 줬다는데 이번에도 주게 될지 조용히 묻기도 했다.
 

‘공화국의 영웅남아’

3호청사는 1999년 6월30일 서해교전 결과 보고서와 함께 남한 언론 및 국민정서를 파악하고 분석한 보고서를 김정일 서기실에 제출했다. 보고서는 “남조선 정부가 주도적으로 이번 교전을 ‘우발적 사태’로 몰아가는 만큼, 우리도 해군사령부 책임론으로 정세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보고서는 곧바로 김정일의 재가를 받았고, 이후 착착 실행됐다. 서해교전에서 사망해 돌아오지 못한 함장에 대한 영웅칭호는 1년이 넘어서야 발표했다. 또 해군사령부 차원에서 진행한 일이라 내막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서해함대 예하 8전대장을 해임하는 ‘쇼’를 연출하기도 했다.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군사간부 강연회에서는 “해군사령부가 독자적으로 이번 교전을 진행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비공개 자리에서 “6·15가 사실상 우리가 진 전쟁이었다면, 6·29는 사실상 우리가 이긴 전쟁”이라며 해군사령부를 치하했다. 서해교전 다음날에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조명록 차수를 비롯한 군의 최고수뇌부를 줄줄이 부상자들이 입원해 있는 조선인민군 제11호병원으로 병문안 보내기도 했다. 해임됐다던 8전대장 또한 1년 후 복직해 해군사령부 부학장으로 임명됐다.

서해교전 참전자들에게는 연평해전 전사자들보다 더 높은 국가훈장을 수여했다. 전사한 함장의 딸들은 현재 모두 만경대혁명열사유자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함장 본인은 서해함대의 상징으로, ‘공화국의 영웅남아’로 널리 선전되어 죽어서도 존경 받는 인물이 되었다.

북핵과 NLL의 공통점

서울올림픽을 앞둔 1980년대 김일성은 동유럽국가들을 상대로 서울에 가지 말라고 회유, 협박했고, 김정일은 1987년 KAL기 폭파테러 사건을 벌였다. 북한 경제를 급격히 몰락시킨 1989년 세계 제13차 청년학생축전도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고 능가해보겠다는 의도로 김정일이 국고를 털어가며 추진한 것이었다. 이렇듯 남한에서 진행되는 세계적인 행사에 대해 김정일은 항상 열등감을 느꼈다. 3호청사의 대외·대남공작부서들이 정상회담 이후 남북경제교류가 활성화되던 시기에 다시 서해교전을 준비한 첫 번째 이유는 이러한 김정일의 개인심리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연평해전 이후 남한 정부가 보인 무원칙적인 대응도 영향을 미쳤다. 3호청사의 두뇌진은 당초 계획보다 크게 번진 연평해전 결과를 분석하면서 반드시 후폭풍이 있을 거라 예상하고 그에 대처하기 위한 나름의 전술안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어떠한 응징도 가해오지 않았다. 이러한 대응이 김정일의 서해교전 결심에 촉매제로 작용했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두 차례에 걸친 서해상에서의 교전은 김정일의 직접 지시에 따라 노동당 관료들과 인민무력부, 해군 지휘관들이 치밀하게 준비, 진행한 작전이었다. 연평해전이 준비될 때만 해도 대외적인 효과보다는 주민들의 대남 적개심 강화라는 대내효과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두 차례 교전을 통해 북방한계선 문제는 북한 대남부서가 활용할 수 있는 강력한 협상카드로 확실하게 자리잡았다. 서해전선을 이용하여 바다에서는 위협을 가하고 육로를 통해서는 지원을 받아내는 식이다.

현재도 김정일은 통전부의 아태평화위원회를 내세워 경제협력과 대화를 끊임없이 진행하는 수법으로 육지에서 안정권을 구축하고, 바다에서는 “우리가 언제든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북방한계선 문제를 자위권 차원에서 계속 강조하라고 반복해서 지시한다. 등뒤의 손으로는 칼을 쥔 채 남북대화를 추진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국제정치에서의 북핵 카드와 한반도 정치에서의 북방한계선 카드는 사실상 같은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꼼꼼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판단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남한 정부와 북한 전문가라는 이들은 계속 “우발적인 사건”이라거나 “해군사령부의 단독결정”이라고 말한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끝)

이름아이콘 명장신사
2009-06-19 17:52
작성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화려한치적뒤에숨은 허위에 대해 몇자 적었다고 하셨는데  이글  양만해도 무지 큽니다.구구절절히 옳으신 말씀입니다 .한가지 궁굼한건 전체가 전부 신상옥씨의 글인지  거기에 님의 생각도 가미가  된것인지는  과문한 저로서는 잘 모르겠군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건강 하십시요.
운영자 명장신사님 물론 모두 신상옥씨의 글입니다. 1/2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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