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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카이로        
작성일 2008/08/27 (수) 08:29
ㆍ조회: 3703   
5,16후 박정희는 독도 측량 지시했다

한일협정 대비 영유권 공고화 작업부터
울릉도에 간 유일한 국가지도자… 미-일 연합 독도 유린 막아내

동해 1번지 울릉도와 독도

◇ 1962년 10월11일 울릉도를 방문한 박정희 의장을 여학생이 꽃다발로 환영하고 있다. 울릉도 주민들은 국가원수의 최초 방문을 기념하는 순시기념비를 이듬해 울릉읍 저동리에 세웠다. ⓒ 국가기록원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첫머리가 동해로 시작된다. 동해의 1번지는 울릉도와 독도 형제섬이다. 형제가 이웃해 있지 않고 작은 아우가 수평선 너머로 나아가 고향 바다 들머리를 지키고 있고, 형이 또한 모진 풍랑과 외로움 속에서 그런 아우를 보살피고 지켜왔다. 독도는 그렇게 예로부터 울릉도 사람들이 지켜왔다. 1950년대 홍순칠의 의용수비대가 울릉도를 거점으로 하고 있었고 그후 독도 경비를 울릉도경찰서에서 담당해 왔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시대로부터 박정희 정부의 근대화 시절까지는 독도의 영유권을 포함한 국토관리 의지가 강력했다. 그랬는데 그 뒤로 경제성장의 가속도로 국력이 커지고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이 높아졌음에도 일본의 독도 시비에 대한 대응책과 국토수호의 자세는 미덥지 못한 것이었다.

울릉도와 독도는 동해의 1번지로서 대한민국의 해상 관문이라는 자격을 갖추고 있음에도 그런 대접을 받기는커녕 육지로부터 멀리 소외되어 있었다. 일본이 독도를 제 것이라고 집적거리고 염장을 질러댄다고 불끈불끈할 것만도 아니다. 국토관리 임무를 맡은 정치와 행정이 오죽하면 그럴 것이며, 공동체정신이 야무지지 못한 국가사회 구성원 저마다의 무관심이 오죽하면 또 그럴 것인가.

누리꾼들의 화제가 된 ‘독도 담판’ 스토리

일본의 독도 시비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속출하고 있지만 속 시원한 답이 보이지 않는다. 내 나라 땅을 제 것이라고 우기는 그 입을 재봉틀로 박아 버리고 영유권에 종지부를 찍는 무슨 쾌도난마의 수는 없을까.

요즘 인터넷에서는 5.16혁명의 장군 박정희와 내로라하는 사무라이 기질의 고토 마사유키라는 일본 특사의 ‘독도 담판’ 이야기가 누리꾼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두 장부는 술자리에서 맞붙어 박정희의 일본 육사 선배라고 큰소리를 치는 고토 마사유키가 대가 지불을 조건으로 독도를 흥정하는 수작을 벌인다.

박정희는 쇼와시대 최고의 사무라이를 자칭하는 고토에게 “계집애처럼 앵앵거리지 말라”면서 “나는 목숨 걸고 혁명을 한 사람이다. 나에게 가장 즐거운 일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라고 일갈한다.

고토는 박정희의 서슬에 질려버려 두 손을 들고 마는데, 그때 박정희의 눈빛에서 비장하고도 유쾌한 ‘사나이의 진짜 미학’을 찾았다는 기쁨과 함께 경외심을 품게 된 고토가 뒤에 10.26사건 소식을 접하고는 “병신같은 조선 놈들”이라며 울부짖었다는 것이다.

독도 문제로 짜증이 나고 부아를 삭이지 못하는 누리꾼들에게 인기를 얻을 만한 드라마틱한 이야기다. 호쾌한 재미가 있고 감동을 주긴 하지만, 이야기의 구도와 설정이 팩트로 보기에는 너무 미흡하다.

첫째는 고토 마사유키가 가져온 독도의 교환조건이다. 그는 일본 제약회사의 기술을 이전해 줄 테니 독도를 달라고 했는데, 흥정 카드로 격이 맞지 않아 설득력이 없다. 일본으로서는 한일협정을 독도 문제를 거론하는 대단한 호기로 보았는데, 국교수립과 청구권자금이 달린 현안에 고작 제약회사 기술 이전이라니.

둘째는 고토 마사유키를 특사로 보내는 주변의 인맥이 드러나지 않아 그가 일본 정부의 의사를 대변하는지, 아니면 그저 독도에 군침을 흘리는 사무라이 소영웅들의 장난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박정희가 유서를 써놓고 5.16거사를 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독도 담판’ 스토리는 그런 박정희의 면모를 그럴 듯하게 포착한 재미있는 ‘메이드 인 재팬’의 픽션으로 치부해 무방할 것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 1962년 10월11일 박정희 의장이 울릉군청에서 보고를 청취하고 나오는 모습. 그는 이날 울릉군수의 관사에서 유숙하면서 섬생활을 체험하고 울릉도 개발과 독도 영유권 강화 문제 등을 구상했다.ⓒ 정부기록사진집

군사정부 시절 박정희의 동선(動線)은 정치의 구심점인 광화문 일대를 멀리 벗어나 지방 곳곳으로 이어지고 있다.

혁명세력에 의해 정치권 밖으로 떨려난 구 정치인들이 광화문 쪽만 바라보며 민정이양을 학수고대하고 있던 1962년 10월, 박정희는 동해안 화진포에서 해병대 상륙작전 훈련을 참관한 후 주문진으로 이동해 돌연 해군 함정을 타고 울릉도로 갔다.

그는 왜 울릉도에 갔을까. 흡사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속세의 중생들이 헤아리지 못하는 것처럼 그가 동해로 간 까닭을 알고 주목하는 구 정치인은 전무했다. 그들은 오로지 광화문으로 다시 진출하는 것만이 소원이었고, 미국이 군사정부에 강도높게 민정이양 압력을 가하거나 아예 혁명세력을 제거해 주기를 두손 모아 빌고 있었다.

후일 외무부장관을 지낸 김동조는 실제로 그해 1962년 9월 워싱턴에 갔더니 국무부 관리들이 한국 군사정부의 민정이양을 당연시하고 약속이 안지켜질 경우 강제 축출을 기정 사실로 여기고 있더라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아주 태연히 연초부터 서울을 비우고 지방으로만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해 1962년은 울산에 처음 공업단지를 기공하면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힘찬 시동이 걸린 첫해였던 것이다. 정치만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그가 무슨 화두를 붙잡고 그렇게 고행을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문경시멘트공장 대표(이정림)가 얼굴이 까맣게 타고 깡마른 박정희를 보기가 안됐던지 “용한 한의사가 있으니 보약 좀 지어 드시라”고 했지만,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보약을 먹어본 적이 없는 그는 보약 체질이 아니라며 거절을 했다.
전국을 돌며 국가경영 구상에 몰두하던 그 시절이라 해도 구태여 울릉도까지 갈 필요가 있었을까. 울릉도 시찰이 과연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을까.

61년 11월 “독도 지형도를 만들고 토지대장에 등록한 뒤 결과보고하라”

◇ 1962년 11월18일 박의장의 초청으로 서울에 온 울릉도 학생들이 장충동 의장공관에서 박의장 내외에게 선물을 드리는 모습. ⓒ 국가기록원

박정희가 울릉도에 간 것이 1962년 10월 11일.

그날 풍랑이 사나워 박정희 일행이 타고 온 해군 함정이 도동항에 접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랑잎처럼 흔들리는 보트에 몸을 싣고 간신히 상륙했는데, 자칫 잘못되면 큰 변을 당할지도 모르는 긴박한 모험의 순간이었다.

악천후를 헤치고 울릉도를 찾아온 최고지도자를 보고 울릉도 사람들이 깜짝 놀랐음은 말할 것도 없다.

까까머리, 단발머리 학생들이 박수와 꽃다발로 환영하고 모든 주민과 공무원들이 나와 줄줄이 악수를 나누었다.

그때 박정희는 최고회의 의장이자 대통령 권한대행의 신분이었다. 울릉도에 사람이 살고부터 지금까지 울릉도를 방문한 국가 최고지도자는 박정희가 유일하다.
울릉도 사람들과 독도 경비원들은 그해 8월 박정희가 라디오와 담배, 그리고 책을 보내준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특히 울릉도에 10대, 독도에 2대 보내준 국산 라디오는 당시 일반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귀중품으로 섬사람들에게 세상과의 단절감을 단숨에 해소시켜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고 위안이었다.

박정희는 울릉군청에서 군수(박창규)로부터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종합 보고를 듣고, 독도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울릉경찰서 경관들을 위로했다.

그가 가장 주목하는 곳이 독도였다. 그는 일찍이 1961년 11월 “독도를 정확히 측량하여 토지대장에 등록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는 특별지시를 했었다. 그에 따라 국토건설청 산하 국립건설연구소(국립지리정보원의 전신) 측량팀이 2개월에 걸쳐 독도의 지형을 측량하고 지형도를 작성했는데, 이는 독도의 영유권을 확실히 해두는 국토관리 차원의 작업이었다.

울릉도 방문 이후에도 그는 그곳 학생들을 여러 차례 청와대로 초청해 격려하고, 독도 의용수비대 출신 용사들에게는 훈장을 주어 공적을 기렸으며, 교통사정이 열악한 울릉도에 도로건설 등 종합개발사업을 지시해 건설 경기가 일어나면서 육지와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그리하여 1960년대 중반부터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 안고 연락선을 타고 가면 울릉도라”는 신나는 노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울릉도가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온 것도 따지고 보면 ‘해상의 최전방’을 중요시한 통치자의 국토관리 의지와 결코 무관하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65년 6월, 일본 미국의 독도 시비를 셧아웃시키고 이끌어낸 한일협정

그러나 무엇보다 이 ‘해상의 최전방’에 대한 일련의 국토관리 조치들은 한일협정을 대비한 사전 포석이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일본은 국교수립과 청구권자금이라는 한일협정의 대의제 앞에 독도 영유권을 들이밀어 대단한 흥정을 벌일 심산이었다. 돈을 줄 테니 독도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춥고 배고픈 후진국의 설움을 벗어나고자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박정희는 국고(國庫)가 텅 비다시피한 당시의 국가 실정을 “털려도 몇번은 털린 빈 집”이라고 탄식하면서 한일회담에 총력을 집중했다. 경제건설을 위해서는 일본과의 국교를 수립하고 청구권자금을 받아내는 길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언제까지나 미국놈들에게서 밀가루나 얻어먹고 살 수는 없다. 왜놈에게 더 굴욕을 당하면서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것이 한일회담을 지휘하는 박정희의 본심이었다. 그는 사석에서는 “미국놈” “왜놈”이라는 말을 예사로 했다.

애초부터 일본은 배상문제에 대하여 “한국에 일본 재산을 많이 두고 나왔고, 철도(鐵道)다 뭐다 해서 베풀어준 게 더 많다”며 고자세였다. 한일회담을 서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이에 대해 한국 측은 북한과 중공, 소련이라는 거대한 공산권과 대치하고 있는 한국의 안보가 일본에 직결됨을 지적하고, 그리고 청구권자금은 당연히 받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며 일본의 태도를 비난했다.

한일수교는 미국의 아시아 방위전략을 위한 선결 과제였다. 그러니 일본이 미국의 기대를 저버리고 한일회담을 외면하면서 아시아 반공 전선에 무임승차할 계제가 못되었다.

일본이 회담 테이블에 갖고나온 것이 바로 독도 카드였다. 독도의 지형도를 작성하는 등 ‘해상의 최전방’에 대한 영유권 강화 조치들을 취한 바 있는 박정희 정권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시비에 대해 과거 일본의 침략을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날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빼앗은 게 독도였기 때문에 독도의 영유권 시비를 침략의 야욕으로 간주하겠다는 의미였다.

독도 문제로 한일회담이 난항을 거듭하자 미국이 중재에 나섰다. 미국은 한일 양국이 독도에 등대를 세워 공동 소유하는 방안을 내놓았으나 박정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미국은 다시 독도문제를 다룰 한일 양국의 외무장관 회담을 제의했고, 이것 역시 박정희에 의해 거부당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한일협정을 기회로 독도에 관한 주장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1965년 6월 협정 문서에 서명을 하는 자리에서까지도 독도 문제를 물고 늘어졌지만 한국측의 거부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박정희의 한국은 일본과, 그리고 사실상 일본 편을 드는 미국을 상대로 한 1대2의 대결에서 독도 시비를 셧아웃시키고 한일협정의 타결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독도 시비에 대한 박정희 정부의 대응은 당연하고도 확고한 것이었다. 독도 영유권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큰 역사의 그림을 그리는 지도자를 국민이 만들어내야

◇ 1966년 4월28일 독도 의용수비대의 청와대 방문 기념촬영.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홍순칠 대장이 공로훈장을, 대원들이 방위포장을 각각 받았다. 위 사진은 젊은 시절의 홍순칠. ⓒ 국가기록원

독도 시비를 셧아웃시킨 결과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영유권 분쟁을 미리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국토관리 작업이다.

유비무환은 박정희 시대의 국가경영, 국토관리의 키워드였다. 조선왕조가 임진왜란을 맞아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을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만이 미리 전쟁에 대비한 전략과 전력을 갖추어 왜군을 물리쳤던 유비무환의 정신이 박정희 시대에 부활한 셈이었다.

유비무환은 박정희가 자주 강조하여 유명했고, 또 후일 어느 국회의원이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유비무충’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유비무환의 환(患)을 충(忠)으로 읽어 또 유명해진 말이다.

이명박 정부에 이르러 또다시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시비하자 독도의 ‘독’자도 꺼내지 않던 국회의원들이 때를 만났다는 듯이 독도에 가서 사진을 찍고 난리법석을 피우는 포퓰리즘 정치에는 유비무환의 개념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서울 한복판 숭례문을 지키지 못해 불태우면서 독도를 지키겠다는 그들의 사진은 영락없는 ‘유비무충’ 수준으로, 참 볼 만한 국가관리 실종의 코미디 장면이었다.

천박하게 퇴화된 현상을 보노라면 세월이 반드시 생물을 진화시키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박정희 시대에는 국회에서 미래에 대비한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간도영유권관계발췌문서>라는 책자를 발간한 적이 있다. 간도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는 자료를 모아놓은 이 책을 발간하는 데 박정희는 특별예산을 배정해 지원했다. 1975년 9월의 일이다.

간도는 우리 민족의 발상지이며 고구려, 발해를 거쳐 대대로 민족의 역사가 점철된 영토이다. 그런데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한반도 침략의 발판으로 독도를 멋대로 차지해 버린 일본이 만주에 대한 야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1909년 중국과 간도협약을 맺고 간도를 중국에 넘겨버렸었다.

그래서 통일 이후 간도 영유권 문제 발생에 대비해 <간도영유권관계발췌문서> 책자를 발간했다. 30여년 전에 벌써 북방영토였던 간도를 되찾을 구상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박정희는 언젠가 다시 독도 문제가 불거질 것에 대비해 1978년에 독도를 종합연구하는 데 거액의 예산을 지원했다. 그리하여 10여명의 학자들이 7년간의 연구 끝에 독도 영유권에 관한 귀중한 자료들을 수록한 <독도 연구> 책자가 발간되었다. 책자가 나온 것이 1984년 6월, 그가 세상을 하직한 뒤의 일이다.

일본은 한국의 독도뿐 아니라 중국, 러시아와도 쿠릴열도, 조어도(釣魚島)의 영유권 분쟁을 일으켜 왔다. 오로지 미국을 믿고 영토 야욕의 활개를 치고 있지만, 미국도 어디까지나 국익을 위해 일본을 두둔할 뿐이다. 일본에게는 진정한 친구가 없다.

지난 1세기 동안 주변국들을 침략하고 수탈해 온 범죄국가의 야만성과, 강자에게 예의 바르고 한없이 비굴하며 약자에게는 가혹하기 짝이 없는 일본의 교활한 이미지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프랑스 최초의 여총리 에디트 크레송은 일본을 “약탈자”라고 극렬하게 비난했고, 미국 로체스터기술연구소는 한 보고서에서 일본을 움직이고 있는 계층을 “본받을 것 없는 부도덕한 생물”이라고 매도한 바 있다.

일본은 독도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지만, 그러나 역사의 정의는 결코 일본 편이 아니다.

국가 중대 현안에는 국가경영의 최고 책임을 진 통치권자의 몫이 있다. 결단을 요하는 사안이 발생할 때가 있고, 통치권자는 결정적인 시기에 결단을 내리는 리더십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가 있다.

시대가 인물을 만든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큰 지도자는 시대를 만들어 왔다. 지도자를 잘 만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대한민국에는 독도 영유권을 넘어 통일과 북방영토 회복의 꿈을 주는 지도자, 당대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진정으로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대비하는 큰 역사의 그림을 그리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그런 지도자를 그냥 기다릴 것이 아니라 국민이 만들어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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