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編輯者註】아래 論文은 1968.12-1969.10. 베트남戰爭에 參戰한 권영배(權寧培:1946.10.12생/주월사 정보처 근무)戰友가 1996년 2월에 慶星大學校 貿易大學院을(經濟學 碩士)卒業하면서 發表한 論文입니다.
  권영배 戰友는 陸軍준위로 (304955)任官하여 陸軍中央文書管理團(현. 육군기록정보관리단) 釜山分所에서 文書將校로 22年間 在職하였으며 轉役을 앞두고 공무상 질병으로 殉職하여 이미 유명을 달리하고 우리 곁에 없다는 哀惜한 마음으로 이 論文을 編輯하였습니다.
  戰友는 1992년 枯葉劑피해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현역에 있으면서 大韓海外參戰戰友會 釜山廣域市會(현. 사단법인 부산광역시 월남전참전 용사회)를 방문하여 김일근 사무처장과 교분을 가지고 1996. 참전용사로 등록하였으며 이후부터 전공상이자, 그 유족과 越南參戰 戰友들의 국가보훈처 등록신청을 위하여 필요한 군복무와 관련된 기록, 병상일지 등의 자료를 찾아서 제공하는 등 많은 지원을 하였습니다.
論文을 읽어보면 權寧培 戰友가 우리 參戰戰友들의 有功業積을 浮上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인 흔적을 느낄 수 있으며 운영자는  이 논문을 참전전우들의 국가유공자 예우를 위하여 입법 발의를 하신 國會議員 여러분에게 유익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유익한 자료를 남겨주신 權寧培 戰友의 영전에 삼가 머리숙여 명복을 비는 바입니다.

-운영자-

 

經濟學 碩士 學位 論文

 

韓國의 베트남戰 派兵이
國民經濟에 미친 效果에 관한 硏究

 

 

 

 

 指導敎授 林    種    雲

 

 

 

1996年      2月

 

 慶星大學校 貿易大學院

 

貿易學科 : 權    寧    培

 

 

 

權寧培의 經濟學碩士學位 論文을 認准함.

 

 

主審  經營學博士   郭    武    燮 (印)

 

 委員  經濟學博士   鄭    義    光 (印)

 

委員  經濟學博士   林    鐘    雲 (印)

 

 

慶星大學校 貿易大學院

 

1996年  2月

 

  아래 목차에서 보시고자 하는 제목을 크릭하시면 바로 갑니다.

 

 

 

目        次

 

 

 

 

Ⅰ.

 

 

序    論

 

 

 

 

Ⅱ.

 

 

1990年代 東亞世亞 情勢와 韓國經濟 構造

 

1.

1960年代 美國의 對韓政策

 

2.

1960年代 韓國의 經濟構造

 

 

 

 

Ⅲ.

 

 

베트남戰 派兵의 背景과 展開過程

 

1.

背               景

 

 

가.

經濟的인 側面

 

 

나.

軍事的인 側面

 

2.

展 開 過 程

 

 

가.

1. 2次 派兵('64.  7.28~65. 3. 16)

 

 

나.

3. 4次 派兵('65. 10. 3~73. 3. 23)

 

 

 

 

Ⅳ.

 

 

베트남戰 派兵에 따른 經濟的 效果

 

1.

政府 部門의 經濟的 效果

 

 

가.

軍援移管 中止

 

 

나.

美國 軍事援助 增加

 

 

다.

韓國軍의 現代化

 

 

라.

國家 次元의 軍納交涉

 

 

마.

西方 世界로부터의 借款 導入 및 技術導入 效果

 

 

 

 

 

2.

民間部門에서 얻은 經濟的인 效果

 

 

 가.

技術人力 進出

 

 

 나.

用役業體 進出

 

3.

海外部門 (國際收支) 效果

 

4.

經濟 發展論的 評價

 

 

가.

外資 및 技術導入

 

 

나.

新興財閥의 形成

 

 

다.

政府部門의 發展

 

 

 

 

Ⅴ.

 

 

결                       론

 

 

 

 

 

 

 

參考文獻과 資料

 

 

 

英  文  記  綠

 

 

 

附             綠

 

 

 

 

 

 

 

Ⅰ.  序          論

 

 

 1940년 후반 이래로 美國의 아시아정책은 中國과 蘇聯의 힘을 견제하는 한편 太平洋의 美國의 영향력이 보장될 수 있도록 軍事的·經濟的 세력배치를 하는 과정에서, 美國에 의존한 日本의 工業化와 궁극적으로 日本의 원조를 통한 韓國의 근대화를 완성하여 이들 두 나라가 극동지역에서의 강력한 反共보루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것의 일차적인 구체화는 1965년 韓ㆍ日 會談으로 나타났다. 美國은 韓ㆍ日 會談의 타결을 통하여 '53년 韓ㆍ美軍事同盟과 '60년 美ㆍ日 상호방위조약을 효과적으로 융합하면서 東北 亞世亞에서 對共防衛政策을 강화시켰다. 동시에 이 시기부터 美國은 점차 베트남 戰 개입을 강화함으로써 南亞世亞에 있어서 政治ㆍ軍事적 개입을 가속화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미국의 남아세아 개입강도가 높아진 이유는 '49년 가을 中國 인민해방군(PLA)이 美國의 지원을 받는 거대한 국민당군(KMT)을 격퇴시켜 마침내 中華人民共和國을 수립함으로써 아세아에서의 공산세력이 부상하였기 때문이었다.

주지하다시피 韓國은 1964년 7월부터 美國이 주도하는 베트남戰에 派兵하였다.

1966년 7월에 「브라운覺書」를 계기로 대규모의 戰鬪兵力을 베트남戰에 增派하기에 이르렀다. 國際政治 軍事的 側面에서 당시의 베트남派兵은 6.25사변이후 冷戰體制하의 최대의 國際戰爭이라는 側面에서 그리고 高麗末의 위화도 진격을 제외한다면 유사 이래 최초의 海外 軍事遠征이라는 側面에서 特別한 주목을 받을 만한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經濟社會的인 側面에서도 31만여명의 派兵人員과 軍需品의 國際的 이동, 이른 바 베트남戰 特需로 인한 연인원 20만명에 달하는 技術者 및 用役人員의 왕래 그리고 建設分野와 軍需産業에 미친 막대한 효과를 고려할 때 베트남戰은 우리나라 現代史의 중요한 經濟發展의 전기를 마련한 歷史的 계기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당시의 우리나라는 베트남戰 派兵을 계기로 병기와 병참의 現代化의 계기를 마련하여 軍事的 이익을 얻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派兵으로 인한 직접적 효과인 베트남 特需를 초래하였으며 이러한 美國과의 軍事ㆍ經濟的 유대강화를 계기로 뒤 이은 借款經濟로서의 원활한 이행을 가능케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의미에서 1960년대 베트남戰 派兵의 經濟發展적 評價와 理解는 現代 韓國資本主義의 發展에 대한 검토에 빠트릴 수 없는 주요한 부분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베트남戰 派兵에 관한 기존 연구는 극히 斷片的이거나 非學術的인 回顧錄 수준이며 이에 대한 보다 구조적이고 본격적인 연구는 매우 드문 실정이다.

즉 기존연구들이 대개의 경향은 軍事와 政治的 側面의 硏究가 대다수를 이루고 있으며 經濟的 側面의 분석을 시도하는 경우라도 베트남 特需의 양적규모와 내용소개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本 稿는 이러한 인식내용을 바탕으로 다음사항을 검토하기 위하여 작성 되었다.
 

첫째 :

1960年代 東亞世亞의 情勢와 우리나라의 베트남戰 派兵과 베트남 特需는 어떤 통합적 위치에 있으며 그 계기와 주변국과의 역학관계는 어떠한가.

둘째 :

베트남 特需의 규모와 내용을 평가하기 위하여 派兵의 직접효과와 간접적이고 파생적인 효과에 대한 구체적 내용 은 무엇인가.

셋째 :

이러한 베트남戰 派兵과 베트남特需가 韓國의 經濟發展에서 갖는 發展論的인 의의는 어떠한가.

 

이러한 전체적인 인식 아래 本 論文은 베트남戰 派兵이 國民經濟發展에 끼친 직ㆍ간접적인 영향을 考察해 보고 베트남戰派兵으로 인한 여러 가지 影響 들도 硏究ㆍ確認할 것이다. 그리고 명확하게 經濟的인 상관관계가 없더러도 經濟的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예를 들어 海外 기술자들의 技術習得, 派兵 兵士들의 自信感과 國家的 위상강화에 따른 國民的 自矜心 고취등도 중시하고 고려해 볼 것이다. 그리고 '70年代 中東特需로 인한 中東進出의 기반도 베트남戰 派兵과 무관하지 않음을 검토할 것이다.

派兵 당시의 狀況과 決定 要因도 硏究대상으로 하여 당시의 우리 政府가 어떤 방향으로 베트남戰을 國家經濟 및 安保問題 解決 수단으로 삼았는지에 대한 정책검토 과정도 포함할 것이다.

本 論文의 目的을 달성하기 위하여 國內ㆍ外 각 참고서적과 자료를 수집 정리하였으며 특히 國防部 資料室과 政府記錄保存所의 협조를 얻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자료도 발굴하여 정리하였으며 중요한 자료는 다음 연구자를 위해 附錄으로 첨부하였다.

本 論文의 구성은 먼저 1960年代 東亞世亞의 情勢를 韓國經濟狀況과 함께 정리하고 (제2장) 韓國의 베트남戰 派兵에 대한 經濟ㆍ軍事的 側面의 동기와 전개과정을 요약(제3장)한 다음 구체적으로 實證(제4장)하는 순으로 진행하기로 한다.

따라서 本 論文은 韓國의 베트남戰 派兵이 國民經濟에 미친 經濟的 효과에 관하여 살펴보는 것을 주로 한다. 이러한 韓國의 베트남戰 派兵이 國民經濟에 미친 經濟的 효과와의 인과관계 糾明은 韓國經濟發展의 過程속에서 반드시 論議되어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派兵의 값진 대가를 치른 사람들에 대한 歷史의 正當한 評價를 기대하는 의미에서도 그 중요성은 크다 할 것이다.

 

 

 

Ⅱ.  1960年代 東亞世亞 情勢와 韓國經濟 構造

 

 

1.  1960年代 美國의 對韓政策

 

제2차 대전 이후 美國은 東南亞 지역에서 현상유지 정책을 택하고 있었는데 그 의도와는 달리 東南亞 全地域에서 共産主義 세력의 무력 투쟁이 계속되었다. 美國은 韓國戰爭의 경험으로 이 지역에서도 전쟁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으며 이로인하여 아시아 자유국가들과 相互防衛協約을 체결하고 원조를 제공하고 안보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특히 中共을 봉쇄하고자 필리핀 미군을 증강하고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에 대한 군사 원조를 제공하여 방위력을 강화하였으며 東南亞 集團 防衛體制로 SEATO를 결성하였고 미 태평양 7함대 중심의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한편 1960年代의 韓國은 中共의 核實驗 성공으로 安保에 위기를 느꼈으며 이에 따라 美國은 韓ㆍ美ㆍ日 3국의 관계를 공고히 함으로써 中ㆍ蘇ㆍ인도네시아ㆍ越盟과 대결하려 했다.

따라서 韓國은 베트남戰을 단순한 內戰의 성격이 아니라 공산세력의 침략전쟁으로 인식하였으며 베트남의 안보는 韓國의 안보와 직접 연계된다고 인식했다.
1) 金岩山 「越南戰과 韓國의 國家發展」海外參戰戰友會 발행 韓國의 越南參戰과 歷史的 再照明(1993) p.53

베트남 문제의 제기는 일찍이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 인도차이나 반도의 분단문제가 토의되면서 시작되었으며 그때부터 인도차이나반도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아니라 냉전의 장소로서 변모되었고 1960년대에 美國의 개입으로 열전으로 바뀌었다.   2)변영태 「외교 어족」(韓國日報, 1959년 간행)p.58

  美國은 60年代 초반만 하더러도 베트남에 대한 軍事援助 및 軍事的 介入을 經濟, 通信, 裝備 지원으로만 한정하였으나 점차 直接參戰으로 性格이 변하게 되었다.

그리고 베트남戰 單獨參戰의 비난을 회피하기 위하여 國際化(More Flag)政策을 추구하여 韓國에 대하여 압력을 가해왔다.

1960年代 美國의 韓國에 대한 압력수단은 軍事ㆍ經濟 援助였다. 당시 革命政府도 國家豫算의 50%, 國防費 85%를 援助에 의존하였다. 또한 革命政府는 美國으로부터 援助뿐만 아니라 正統性도 인정받아야 할 처지였으며, 中國의 核무장 北韓의 中ㆍ蘇와의 友好同盟關係 條約締結로 공산위협이 증대되었다. 그러나 美國의 입장에서는 韓半島는 美國의 대 아시아 방위선 중 하나의 거점일 뿐으로 인식되어 있고 駐韓 美軍은 그들이 필요할 경우 전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韓國의 베트남戰 派兵의 동기와 근원은 [韓ㆍ美 軍事同盟]이었다. 이 同盟의 성격은 雙務的이다. 즉 韓國과 美國이 서로 필요에 따라 軍事를 일으킬 때 同盟國은 군사지원의 의무를 지는 것이다. 따라서 美國은 韓國에 대한 군사적인 지원 의무를 기초로하여 베트남에 대한 군사지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오늘날까지 韓ㆍ美간에 [軍事同盟]이 굳게 견지되고 있는 그 기초에는 베트남 派兵이라는 역사적 실적이 깔려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한반도의 안전보장에 있어서 韓國軍의 베트남戰 派兵은 韓ㆍ美 軍事同盟體制에 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評價된다.

한편 60年代 北韓은 南韓의 反共主義的 軍事 政府出現과 베트남에 대한 케네디 政府의 대규모 적 軍事的 개입 그리고 中ㆍ蘇分爭의 深化등은 그들의 입장을 약화 시키는 부정적 요인으로 보고 대외적으로는 中ㆍ蘇와 友好協力 및 相互援助條約을 체결하여 北方三角 軍事同盟 관계를 공고히 하면서 對內的으로는 4大 軍事路線을 채택하는 등 강경노선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韓半島 내에서의 긴장 관계는 베트남戰 派兵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으며 다만 對美協商 테이블에서 韓國側「카드」로 활용되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68년 1월 21일 무장간첩 서울 침입과 동년 1월23일 프에플로호 납치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11,000명의 한국군 추가 파병을 중단시켰다.

北韓은 60年代 초반 韓國에 비해 상대적 우위의 국력을 바탕으로 「聯邦制統一論」을 제시하는 등 여유를 보이고 있었으며 김일성은 65년 4월 인도네시아 방문 연설에서 3大 革命論을 발표하는 등 赤化危脅을 고조시켰다. 이러한 위협 상황하에서 인도차이나 반도의 共産主義 승리는 美國의 韓國에 대한 안보공약을 약화시키고 北韓을 고무시켜 韓國에 대한 軍事的 정복을 감행할 수 있는 원인이 될 수도 있었다. 이에 따라 韓國은 駐韓美軍의 주둔을 보장받기를 원하였으며 베트남戰 派兵으로 인한 부가적으로도 많은 이점 즉 軍援移管 中止問題, 裝備現代化, 用役業體 參與 등을 조건으로 하고 있었다. 당시에 있어 바로 이러한 北韓의 위협 때문에 韓國은 韓美 相互防衛體制 강화를 도모할 필요가 있었으며 美國은 駐韓美軍철수를 對 韓國 위협용 카드로 활용함으로써 韓國이 베트남戰에 派兵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였다.

'60年代初 당시 韓國의 政治狀況은 제2공화국의 行政 전반에 걸친 무능으로 인하여 5.16軍事革命이 일어나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軍事政府는 農魚村 高利債處理와 貨幣改革, 不正畜財者 처벌의 마무리를 위하여 軍政延長聲明을 발표하였으나 여론이 民政移讓으로 흐르자 '63년 10월 15일 대통령선거를 통하여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朴正熙 정권의 지지 기반이 약하다는 약점(박정희 대통령이 윤보선 후보에게 근소한 차이로 승리한 것)과 韓ㆍ日 國交 정상화 교섭을 반대하는 학생데모 등 상당한 政治的 불안요소가 자리잡고 있어 베트남戰 派兵 당시의 政治狀況은 결코 안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言論이나 學生運動이 韓ㆍ日 國交 正常化 問題에 있어서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으나 베트남戰 派兵 문제에 있어서는 뚜렷한 반응을 보이지 않었으며 도의적인 면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있었으며 社會的 분위기가 軍事 問題는 軍에게 일임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이 派兵 결정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제3공화국의 주도세력인 軍지도자들의 입장에서는 韓國戰爭을 치른 지 10여년 밖에 지나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軍內 심기일전의 계기마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長期休戰으로 인한 軍內 秩序의 弛緩感, 군사혁명에 참여한 장교를 제외한 군 내부의 士氣 低下, 실전 경험자들의 제대 등 軍 運營上의 허다한 문제점들이 露呈되고 있었고, 이러한 문제점들은 당시의 첨예한 남북한 군사대치상태에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3)金岩山「월남참전과 한국의 국가발전」해외참전전우회 발행 한국의 월남참전과 역사적 재조명(1993)P.61

또 1960年代 韓國 經濟는 빈곤의 악순환속에서 資本畜積이 미약하고 자원과 국내시장은 협소한 가운데 대규모 失業이라는 최악의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 自立的 經濟 基盤의 토대를 닦지 못하고 美國의 援助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제3공화국의 집권초기의 政治的 安定과 經濟問題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對外 依存性을 어느정도 인정하면서 輸出 主導의 量的 成長政策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經濟開發 政策 때문에 당시의 제3공화국 정권은 美國의 확고한 政治ㆍ軍事的 지지가 필요했으며 베트남戰 派兵의 결정으로 國內的 당면 현안인 政治ㆍ經濟的 과제 해결에 결정적인 모멘트(Moment)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2.  1960年代 韓國의 經濟構造

 

주지하다시피 해방후 1950년대 韓國經濟는 주로 美國 援助를 매개로 발전하였다. 冷戰體制하에서 당시의 美國援助의 제공은 강한 政治ㆍ軍事的 목적이 강하였으며 相互安全保障法(MSA)하의 방위지원적인 성격이었다. 즉 受援國의 經濟開發보다는 經濟安定에 치중함으로서 또한 贈與物資의 販賣代金중 대부분을 國防費로 사용함으로써 對共 軍事力 유지에 일차적인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援助의 목적이 政治ㆍ軍事的이라고 해서 經濟的 목적이 전혀 없다든지 또한 중요하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政治ㆍ軍事的 목적의 援助提供은 단지 외관상의 형태에 불과한 것이며 오히려 궁극적인 목적은 經濟的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美國의 援助를 통해 제3세계의 經濟開發을 돕는 것은 장기적으로 이들나라에 商品輸出 및 民間資本 輸出을 촉진하고 또한 이들나라들로부터 工業原料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즉, 美國은 직접적인 軍事援助와 軍事的 性格이 강한 經濟援助를 통해 受援國의 反共 自由主義 政府를 수립함으로써 資本主義 世界市場을 防護하고 자신이 주도하는 世界 資本主義 經濟와 國際 分業體係를 완성하고자 한 것이다.

 1950年代 美國의 對美 經濟援助의 규모를 보여주는 <표2-1>을 참고해 보면 韓國은 1945년부터 1962년까지 약 17년간 총액 31억여 달러의 美國援助를 받았는데 이 규모는 대체로 연평균 GNP의 12%정도 또한 연평균총수입의 73%정도를 차지하는 막대한 것이었다.

이 기간 對外貿易赤字는 평균 GNP의 14.3% 정도였기 때문에 그동안의 對外貿易赤字가 대부분 援助에 의해서 충당되었음을 보여 준다.
 

<표2-1>

美國援助의 比重

 

연도

수  출

(A)

총수입

(B)

A
―――
B

원   조
수   입
(C)

C
―――
B

무   역
적   자
(D)

C
–––
D

D의
GNP
비율

C의 대
GNP
비율

1948
1949
1951
1952
1953
1954
1955
1956
1957
1958
1959
1960
1981
1962
 평균 

22,260
13,804
15,569
27,732
39,585
24,345
17,866
24,595
22,202
16,451
19,812
32,827
40,878
54,813
 

208,003
132,775
155,337
214,953
345,430
243,327
341,415
386,063
442,174
378,165
303,807
343,527
316,142
421,782
 

10.7
10.7
10.7
12.7
11.7
10.7
  5.7
  6.7
  5.7
  4.7
  6.7
  9.7
12.7
13.7
  9.2

179,593 116,509
106,542
161,327
191,806
149,401
232,787
319,879
374,206
310,975
222,841
246,359
213,003
238,257

86.3
87.8
68.6
75.1
55.5
61.4
68.2
82.9
84.6
82.3
73.3
71.7
67.4
57.6
 73.1 

185,743
118,871
139,768
187,220
305,851
119,081
323,549
361,468
419,972
361,714
283,995
310,700
275,264
366,969

96.7
98.0
76.2
86.2
62.7
68.2
72.0
88.5
89.1
86.0
78.5
79.3
77.4
64.9
80.3

14.3
  8.4
12.3
15.3
19.9
13.2
17.9
19.6
18.2
15.0
11.5
11.7
10.0
13.3
14.3

13.8
  8.2
  9.4
13.2
12.5
  9.1
13.4
17.6
17.4
14.1
10.1
10.5
  8.8
  9.7
12.0

  출전:이종훈「韓國經濟論」1980. P.246

 

4) 유의해야 할 점은 1957년을 고비로 하여 美國의 對韓 援助는 추세적으로 급격히 하락하여 GNP에 차지하는 비중이 8~9%롤 낮아     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점은 본격적인 借款經濟로의 이행을 예고해주는 지표라고 볼수있다.

 

  그 뿐만 아니라 無償으로 도입된 援助物資의 販賣代金인 이른 바 "對充資金"은 당시에 파탄지경에 이른 재정을 지탱해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7년부터 1961년사이에 일반재정수입 가운데 對充資金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낮아지는 추세에 있으면서도 평균 45.5%에 이르는 막대한 것이었다. 5)홍성유 「한국경제의 자본축적과정」고려대학교 출판부 1975.  p.28~30

이러한 원조는 1950년 韓國經濟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첫째로 지적할 수 있는 영향은 소위 3白産業(면방직, 제분, 제당공업)으로 지정되는 原料加工型 消費財 工業市場의 發展을 가속화시켰다는 점이다. 따라서 당시 이러한 原料加工型 消費財 工業은 國內市場 지향의 收入代替的 性格을 지니게 되었다.

둘째로 총액규모 약 16.8%에 달하는 過剩農産物의 도입은 韓國 産業生産力을 크게 파괴하였다. 즉 美國으로부터 도입된 막대한 양의 過剩農産物은 일차적으로 穀物價格을 하락시켜 한편으로는 직접생산자인 농민의 생산의욕을 저하시켜 농업생산의 정체를 초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一般消費 증대를 낳아 우리나라를 만성적인 食糧 收入國으로 전락시켰으며 결국 國內農業이 工業에 대한 食糧 및 原料의 供給地로서 그리고 商品市場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셋째 對充資金의 규모와 처분에 관련하여 美國은 韓國의 換率과 財政ㆍ金融 나아가 經濟全般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우리나라 經濟의 對外 依存性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援助에 의해 지탱되는 對外依存的 經濟構造하에서는 民族的 自立的 經濟部門에 제한과 몰락을 초래하고 海外資本ㆍ物資를 계속적으로 의존할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구조에서 1957년을 고비로 美國의 對韓援助政策이 바뀌면서 사실상 無償援助를 중단하게 되자 3白産業은 물론 經濟全般이 불황의 국면으로 접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넷째로 막대한 援助物資의 처분이 國民的 合意에 의해 民主的으로 이루어 지기 보다는 政權의 物的 基盤으로 이용됨으로써 國民經濟에의 波及효과는 축소, 왜곡이었다. 더구나 1962년의 추곡흉작으로 穀價가 폭등하였고 5.16이후 韓美關係가 원할하지 못함으로써 外資導入조차 순조롭지 못했다. 한편 革命政府 초기의 의욕적인 投資로 말미암아 1964년에는 外換波動이 일어남으로써 經濟開發政策은 더욱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표2-2>

1960年代 韓國經濟 構造(實積)

 

 

1955년 실적

1960년 실적

1965년 실적

1인당 GNP

65달러

79달러

105달러

수출의 대 GDP비율

 1.3

 1.6

 5.8

수입의 대 GDP비율

24.4

17.2

15.4

농림어업의 GOP비율

44.5

36.8

38.0

제조업의 대 GDP비율

11.6

13.8

18.0

공업구조  경공업(중화학 공업)

79.9(20.1)

76.6(23.4)

68.6(31.4)

자료 :

한국은행「국민계정」각년도
  한국은행「경제 통계연보」각년도

 

<표2-2>에서 보듯이 1960年代 韓國經濟構造는 1950年代부터 추진한 製造業 部門의 收入對替가 잘 실현되지 않았으며 GNP수준이 100달러 내외의 最貧國家였다. 國民總生産은 주로 전통부분인 農業ㆍ漁業에서 나왔으며 製造部門은 14% 내외에 머무르는 실정이었다.

그 결과의 타개로서 나타난 것은 開放體制하에서 輸出을 촉진하고 外國資本을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經濟開發을 추진한다는 정책이었다.

1964년 5월3일의 換率引上(1달러에 130원 하던 것이 256원53전으로 評價切下되었음)과 1966년 3월22일의 單一變動換率制의 채택으로 輸出企業育成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産業化資金 確保를 위해 1965년2월20일 韓ㆍ日協定의 妥結과 對日請求權 確保 그리고 이어 1966년 外資導入法을 제정하고 韓ㆍ日 貿易協定을 締結하는 등 일련의 조치들은 바로 이러한 정책전환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사건들이었다.

이와 같이 1960년 5월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시기는 貿易ㆍ外換政策의 방향이 全面的으로 轉換되는 시기였으며 韓國經濟가 輸出進興을 목표로 개편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輸出이 이례적으로 급성장하기 시작하였고 民間外資導入이 개시되었으며 援助의 비중이 현저히 감소되었다. 따라서 동기간은 韓國의 近代化 過程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나 급격한 産業化 政策轉換의 實例라는 측면에서 매우 흥미있는 시기이다.

그중에도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제4차에 걸친 베트남戰 派兵이었으며 1960년대 韓國은 베트남戰 派兵을 통하여 政策轉換을 위한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評價된다.

무엇 보다도 韓國의 베트남戰 派兵은 美國과의 관계를 원만히 하는 가운데 軍事ㆍ安保的 側面에서 美國의 후원을 확실히 함으로써 經濟開發에 國家的 力量을 집결할 수 있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民間企業의 軍需ㆍ建設ㆍ用役ㆍ서비스 産業의 참여와 더불어 상당한 규모의 外貨送金으로 인한 貨弊資本의 蓄積은 輸出主導 工業化에 꼭 필요한 産業資金의 조달에 막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軍事ㆍ安보的 차원에서 일정한 수준의 現代裝備와 무기체제를 도입하고 이것을 國內ㆍ外 인정받음으로써 1960년대 후반기부터 개시되는 借款 外資導入을 순조롭게 한점은 특기할 만한 점이다.

<표2-3>에서 보는 바와같이 韓國은 다른 國家에 비해 가장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그 때문에 60년대의 韓國經濟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기가지에 이르렀다.
                                                           6) 朴根好 「韓國の 經濟發展とべトナム戰爭」御茶の 水書房  p. 4~5

 

 

 

 <표 2-3>

GDP 성장율(1965~80年)

 

 

1965 ~ 73

1973 ~ 80

低所得國
中所得國
   低所得國 + 中所得國
   사하라 아프리카
   東 아시아
   (韓    國)
   南 아시아
   유럽ㆍ중동ㆍ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ㆍ카리브
         累積債務國
         高所得國
         石油輸出國

6.0
  6.9
  6.6
  6.1
  7.9
  9.8
  3.8
  7.6
  6.4
  4.6
  4.6
  7.4

4.7
  5.1
  4.9
  3.2
  6.5
  7.5
  4.4
  4.3
  5.2
  5.2
  2.9
  5.0

       자료  :

1990년  156항  경제기획원 <주요 경제지표> 각 연도관
  朴根好 「韓國の 經濟發展とべトナム戰爭」 御茶の 水書房  p. 4
        

 

이러한  급속한  韓國의 經濟成長 要因으로  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이른 바 <가젠쿠론>모델을 기초로 한 「後發性 利益」이다. 즉 韓國에는 後發性 利益을 내부화 하기 위한 社會的 能力, 즉 政府의 政策轉換 能力, 企業家의 經營 能力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後發性 利益을 감안하더라도 '60年代 전반은 저성장이었는데 왜 갑자기 '60年代 후반에 들어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는가. 이에 대한 설명은 추가적인 다른 說明因子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의 설명으로 등장되는 것은 유리한 國際環境 곧 世界市場의 급속한 확대에 따라 輸出市場이 보장되어진 것. 선진국으로부터의 풍부한 外國資本과 技術의 도입이 가능해진 것 등을 지적하는 論文이 있고, 또 한 精神的 側面에서 韓國의 儒敎精神의 영향을 근거로 교육수준이 높음과 그것이 가져오는 노동력의 양질성, 근면으로 인한 장시간의 노동에 관한 언급이 많다.

그러나 筆者의 견해로서는 이러한 많은 要因에 부과해서 '60年代 베트남戰 派兵이야말로 기존의 後發性 利益을 한층 더 강화시켜 '60年代 후반의 고도성장을 가능케 하였다는 肯定的 評價를 내리고 싶다.

이하에서 이러한 産業化 政策의 일대전환과 더불어 이것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되는 베트남戰 派兵에 관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Ⅲ.  베트남戰 派兵의 背景과 展開過程

 

 

1.  背          景

 

  가.  經濟的인 側面

1950년대 韓國經濟는 韓國戰爭과 戰後 復舊事業으로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강요받던 시기였으며 60년대 초에는 美國의 무상지원에 의존하던 援助經濟가 借款經濟로의 새로운 전환이 있었던 시기였다.

당시 國內經濟問題로는,
(1)都市와 農村間, 特惠財閥ㆍ高利貸金ㆍ貿易ㆍ國內商業從事者들과 一般庶民들간의 소득격차가 심했고
(2)生産的 投資를 뒷받침하는 下部構造가 결여된 상태에서 消費財가 工業중심의 産業構造였다.
(3)消費 및 用役業의 번창과 奢侈性 품목의 원조, 亡國的 消費風潮 및 이의 助長으로 인한 國民精神의 痲痺現象이었다.
(4)商業人口의 비정상적인 肥大와 失業者로 인한 要 救護人口의 증대,
(5)도시의 밀수품 販賣市場化와 이들로 인해 國民經濟는 취약해질대로 취약해진 상태였다.

진술한 바와 같이 당시 經濟援助가 차지하는 비중은 해당 기간 연평균 국민 총생산의 12%, 연평균 총 수입의 73%를 차지함으로써 韓國經濟는 거의 모두가 援助에 의해 運營되어 왔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당시 韓國에 대한 美國의 軍事援助도 연간 2 ~ 3억 달러 수준이었으며 1958년 이후에는 이와 같은 軍事援助도 감소추세로 전환되어 1964년에는 韓國戰爭 이후 최저수준인 1억2천 4백만 달러에 그쳤다.

따라서 제3공화국 政府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政治的 안정과 함께 經濟的 發展을 통하여 自立經濟 체제를 확립하고 政府財政의 自立化를 꾀하는 것이었다.

朴 大統領은 그의 저서「國家와 革命과 나」에서 韓國經濟에 대한 시급함을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革命이 나던 1961년도 民主黨 政權의 追加改定 豫算案에서 총규모 6.088억환의 내역중 外國援助 금액이 총규모 3,169억환으로 이는 國內資源 2,919억환에 비하여 52%의 비율이다. 이와 같이 나라의 豫算마저 절반을 넘도록 美國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된 국가이면서도 통계상으로 보는 韓國의 실가치는 48%에 불과한 것이었다.····(중략)····1961년 5월 이전 본인으로 하여금 革命을 거사케 한 직접적인 주요 목표가 바로 이것이었다. 自主! 그것은 오로지 自主經濟 이외에 잡을 그물이 없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朴 大統領은
첫째, 韓ㆍ日 國交正常化,
둘째, 大規模 外國借款導入,
셋째, 勞動力의 海外 進出,
넷째, 베트남戰 派兵에 特需효과를 괴함으로써 당면한 經濟的 난관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베트남戰 派兵의 효과를 經濟的 난관 타개책으로 고려했던 근거로 朴 大統領은 1965년 8월 15일 경축사에서 "우리 상품을 國際市場으로 무한히 進出케 하고 資本과 技術을 國際的으로 추구해야 하며 베트남戰 派兵결정과 韓ㆍ日 國交正常化는 國家 이익 추구를 위한 불가피한 결단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李東元 당시 외무부장관은 "조국근대화를 至上目標로 삼았던 당시 韓國政府가 1964년 당시 1인당 GNP 103달러에 불과했던 상황에서 (이때 미국 3,002달러, 일본 718달러, 필리핀 129달러)베트남戰 派兵을 經濟發展의 한 계기로 이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회고하고 있다. 7) 李勳燮「그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샘터 (1993) p. 469~473.  

韓國은 베느남 派兵을 계기로 베트남 特需에 힘입어 韓國經濟 發展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韓國이 베트남 派兵으로 얻은 經濟的 利益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항목으로 구성되어있다. 즉 美國의 對韓 經濟 借款의 증가, 美國이 제공한 베트남 주둔 韓國軍의 維持費用, 베트남戰에 必要한 軍需物資 納品 및 用役 事業에의 참가 등이다.

이밖에 참전기간동안 美國의 對韓 經濟支援도 괄목할 만한데 1966년 3월 韓國軍 派兵 교섭당시 駐韓 美大使 브라운이 제출한 이른 바 「브라운 覺書」에 따라 6개항의 대한 經協과 美國을 비롯한 英國, 西獨, 프랑스, 이태리 등 우방 각국으로부터 商業借款이 이루어져 간접효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며, 韓國 商品의 對美輸出도 급격히 증가하여 1968년엔 韓國의 對外交易量의 52%에 이르렀다.

 

  특히 베트남 派兵으로 인해 建國後 최초로 韓國 勞動力의 海外 進出이 이루어진 것 외에도 國內 剩餘勞動力의 흡수를 통한 雇傭효과를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은 커더란 연관 효과라 아니할 수 없다.
  8)신영진「한국의 월남참전 결정에관한 연구」(1993) pp.11~ 13

 

  나.  軍事的인 側面

韓國軍은 解放後부터 北韓의 南侵에 의한 韓國戰爭 직전까지 美國의 군사지원을 받아 보병 8개 사단을 주축으로 한 陸軍과 소규모의 海ㆍ空軍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전쟁기간(1950~1953)에는 美國을 주축으로 한 UN군의 參戰과 美國의 직접군사원조로 전쟁을 수행하였으며 전쟁후에도 北韓의 계속적인 침략 위협에 대비하기 위하여 장비현대화의 군사력 증강에 노력하였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經濟的인 능력이 부족하여 소기의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1955년까지 韓國軍은 美軍의 直接軍援(美軍의 예산에서 韓國軍에 직접지원)에 의해   軍事力을 유지하였다.1956년부터는 美軍의 直接軍援에서 正常軍援(美國의 對外援助 자금에서 韓國政府에 援助)으로 전환 되었지만 韓國軍은 美軍의 지원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편 부족하지만 韓國의 政府豫算에서 배분되는 국방비는 어려운 경제 및 재정상황에서도 불구하고 전후 北韓의 새로운도발에 대비하기 위하여 <표3-1>에서 보는 바와 같이 國民 總生産 (GNP)DML 6.1%, 정부 재정의 50.7%에 해당하는 엄청난 예산을 활당하고 있었다.  

 

  <표 3-1>

국방예산 推移

 

회   계
연   도

화   폐
단   위

국   민
총생산
A

정      부
일반예산
B

국   방
예   산
C

대   충
자   금
D

C/A
-(%)

C/B
-(%)

D/C
-(%)

대   미
환   율

1950
1951
1952
1953
1954
1955
1957
1958
1959
1960











  22,560
  96,710
245,240
   4,412
   8,936
 16,640
 16,299
 17,208
 18,545
 24,669

2,430
6,179
21,508
527
1,087
2,032
2,135
2,780
3,094
3,516

1,324
3,298
9,463
326
599
1,064
1,125
1,273
1,392
1,471





17
207
512
483
530
535

5.9
3.4
3.8
7.4
6.7
6.4
6.9
7.4
7.5
6.0

54.5
53.4
44.0
61.9
55.1
52.4
52.7
45.3
45.0
41.3




5.2
34.6
48.1
42.9
37.9
38.1
36.4

25
60
60
180
180
500
500
500
500
650

평   균

 

 

 

 

 

6.1

50.7

34.7

 

자료: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국방사 제2집, 1987.  p.  436.
신영진, 적정 국방비 확보책에 대한 소고, 1993.  p.7, 10
1953년 2월 14일 원에서 환으로 화폐개혁(100원이 1환으로)
1956년은 1955년도 회계 연도(1955. 7. 1 ~ 1956. 12. 31)에 포함
*국방비에 미국의 군사원조는 포함되지 않았음.

 

  그러나 이와 같이 막대한 政府 財政을 운영하면서도 지출구조는 (美國의 軍事援助를 제외한 국방예산)봉급 및 급식비를 포함한 인력유지비가 전체 國防費의 77.2%에 달하였고 部隊維持費가 17.2%였으며 戰力增强 投資費는 2.3%, 戰鬪 維持費는 2.6%에 불과한 실정이었으므로 裝備 現代化는 생각할 수 없었으며 장비보충 및 정비유지도 美軍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당시 韓國軍의 作戰統制權은 유엔군에 있었으며, 병력은 1954년 韓ㆍ美간에 합의된 韓ㆍ美 合意議事錄에 의해 1955년 초까지 72만명을 유지하였고 1959년까지는 63만명, 그리고 1960년에는 60만명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韓國軍은 현존 군사력 유지, 노후된 장비의 현대화를 美國의 군사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戰에 악하로 인하여 美國의 베트남戰 개입이 확대됨에 따라 韓國에 대한 美國의 防衛公約과 한반도에 있어서 駐韓美軍의 전쟁 억제력의 역할에 대해 韓國은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즉 友邦으로부터 전투병력의 추가 파병이 불가능할 때에는 駐韓美軍 師團을 韓國으로부터 이동 배치시킬 것이라는 기사가 외신을 통해 수차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自由友邦의 곤경을 우리가 외면한다면 韓半島에서 戰爭이 재발될 시 우리는 누구에게 어떻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겠는가? 라는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부내의 사정은 쿠테타 음모사건,人事積滯, 장기휴전이 가지고 온 이완감, 사기저허, 실전경험자들의 제대등으로 군 운영상의 문제점이 露出되고 있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베트남戰 派兵 요청을 받은 韓國政府는 美國의 요청에 응함으로써 韓國 安保에 대한 보다 확고한 美國의 보장을 받기를 원했으며 派兵을 조건으로 그동안 감소되었던 對韓軍事援助의 증액과 軍事援助移管의 중지를기대하였다. 그리고 배트남戰 派兵은 군부내의 분열을 방지하고 사기를 높이며 人事積滯, 장기휴전으로 인한 이완감 등에 대한 심기일전의 돌파구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2.  展 開 過 程

 

  가.  1.2次 派兵('64. 7. 28 ~ '65. 3. 16)

(1) 1次 派兵(이동외과 병원과 태권도 교관단)

美國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1964년 5월 9일에는 우방 25개국에 對 베트남 援助를 요청하는 공식서한을 발송하면서 베트남戰에 國際化가 시작 되었다.

國防部는 1964年 5月12日 國務總理로부터 베트남에 非戰鬪部隊를 파견하여 지원하는 방안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베트남주재 무관에게는 韓國에 대하여 베트남이 전투부대를 제외한 범위내에서 희망하고 있는 지원의 범위와 종류를 파악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9)李勳燮「그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샘터 (1993) P.77.

보고서에 의하면 베트남정부는 의료요원과 태권도 지도요원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1964년 7월 22일 國會에 제출된 베트남지원을 위한 國軍部隊의 海外派兵에 관한 同意案은 동년 7월27일 國會 國防委員會에 회부되었다.

國防部 요청에 따라 國會에서는 제44회 국회 제2차 국회국방위원회를 개최하여 본 안건에 대한 심의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동년 7월30일 제4차 國防委員會 會議부터는 外務委員會와 연석회의로 심의를 게속하여 토의결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10)신영진「韓國의 越南派兵 參戰決定에 관한 硏究」(1993)  PP.22~23

國會 國防委員會 심의과정에서의 특징은 모든 의원이 韓國戰爭시 자유우방의 지원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전적으로 찬성의 뜻을 표시했다는 점이다. 다만 절차상의 문제점과 政府의 파견결정에 대한 추가적인 요구사항을 질의하였을 뿐이다.

즉 국회에서의 요구는 주로 中國과 北韓의 도발 가능성에 대한 韓國자체의 안보문제, 派兵을 위한 재정적인 문제, 파병의 법적근거 문제 등이 거론되었으나 크게 부각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1964년 7월31일 제44회 국회 제13차 本會議에서도 추가 질의없이 國防, 外務 연석회의에서 통과된 안대로 만장일치로 통과 시켰다.

국방부는 1964년 7월31일 국회의 국군파병 결정에 의거, 육군 제7후송병원을 모체로 한 제1이동외과병원 장교34명(군의관 19, 의정 6, 통역 3, 간호장교 5, 보병 1)사병 96명과 태권도 교관(장교 10명)을 편성하였다.

그러나 韓國軍은 駐韓 유엔군사령관의 作戰統制權하에 있을 뿐만 아니라 美國의 지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韓國軍의 派兵에 수반되는 문제점을 美國과 협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1)李動燮「그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샘터 (1993) PP.80~81.

  따라서 國防部는 합참의장과 주한 유엔군사령관 그리고 韓ㆍ美 실무자간에 수차에 걸쳐 베트남派兵에 관한 문제를 절충하도록 하고 駐韓 유엔군사령관은 1964년 7월16일에 國防部長官에 합의내용을 공한으로 보내왔다. 이 공한에 의해 합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증강된 이동외과 병원과 10명의 태권도 교관단 지도요원의 베트남 파병.
②파견부대의 장비, 시설, 보급, 정비 및 급식에 대한 모든 군수지원은 원칙적으로 美國側이 부담.
③파병 장병들에 대한 봉급, 수당 및 출장비는 韓國側이 부담.
④취사도구와 韓國人으로서의 특유한 기호품은 韓國側이 부담.
⑤베트남정부에서 정식 지원요청이 있는 즉시 韓ㆍ美合同 선발대를 파견하고 선발대는현지에서 숙영 및 군    수지원 등의 제반문제에 관하여 베트남 당국과 주베트남 美軍間에 協議.
⑥파견부대는 베트남정부의 정식지원요청이 있은 후 6주 이후에 파견.
⑦부대수송에 있어서 韓國 海軍 LST 2척 사용.
⑧베트남 파견부대와의 연락을 위하여 필요에 따라 韓國 공군수송기 사용.

위와 같은 내용이 韓ㆍ美間에 합의되자, 國防部는 1964년 7월 15일 國防部 일반명령(육)제29호에 의거 서울 창동에서 派兵部隊를 창설했으며, 그 외에 輸送 및 連絡問題, 敎育問題, 兵力補充 및 교대문제 등에 대한 조치를 하였다.

병력은 장교 34명(군의 19, 의정 6, 통역 3, 간호장교 5, 보병 1), 사병 96명으로 편성하고 그중 자체경비를 위하여 장교 1명, 사병 23명을 포함시켰다. 태권도 파견요원은 소령(단장) 1명과 위관장교 9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파병되는 모든 군인은 매 12개월마다 교대시킬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2) 2次 派兵(後方 支援部隊)

제1차 派越部隊는 1964년 9월 11일 韓國軍 LST편으로 출국하여 9월22일 베트남 사이공 동쪽 봉타우(Vung Tau)에 도착하여 그 중 제1이동외과 병원은 베트남 육군 정양원에서, 태권도 교관단은 베트남 육군보병학교, 육군사관학교, 해군사관학교에 각각 분산 배치되어 임무를 개시하였다.

韓國軍이 베트남에 주둔하게 되자 1964년 10월31일에 한ㆍ베트남 양국정부는 사이공에서 韓國大使와 베트남공화국 外相間에 주베트남 韓國軍의 지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고, 주베트남 韓國軍 지휘책임은 國防部 지휘하에 두되 주베트남 韓國大使官의 현지감독을 받게 하였다.

1964년 8월 발생한 통킹(Tongkin)만 사건, 동년 11월 비엔호아(Bien Hoa)美 空軍기지 폭파 사건, 동년 12월 사이공의 美軍將校 숙소를 폭파하는 등 베트콩의 도발이 격화되자 1965년 1월 49대의 전투기가 월맹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美國의 對 베트남정책에 대해 세계여론은 부정적이었으며 美國내에서 조차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따라서 美國政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전쟁의 국제화의 일환으로 당시 美國정책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준 韓國의 개입을 적극 추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64년 10월1일 美國務省 극동담당 차관보「월리암 번디」는 朴 대통령에게 2차 파병요청서를 12월 전달하였다. 대통령은 2차 파병 역시 사전에 결심한 것이어서 국방부 장관에게 베트남전 파병을 위한 부대편성과 준비를 지시하였다.

국방부는 朴 大統領의 지시에 의해 美國側에 派兵을 위한 부대규모와 이에 관련된 준비문제 자료를 요구하였고 합참의장은 駐韓 美軍 사령관에게 파병부대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제시를 요구하였다.

이에 12월 25일「하우즈」대장은 합참의장인 金鐘五 대장에게 각서를 보내어 왔으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부대 규모는 군사원조단 본부, 1개 육군 야전공병대대, 1개 공병 야전 정비반, 1개 자체 경비대대, 1개 육군    수송중대, 1개 해병 공병중대, LST 1척으로 총병력 규모는 장교 50명을 포함한 1,022명.
②파병병력 日當, 현 韓國 급식수당을 초과하는 급식, 정비 및 운용보급품과 베트남에서의 적절한 군수지원    을 美國 정부가 부담.
③파병부대는 해당 정부간의 합의가 성립되면 곧 파견될 수 있도록 준비

이에 國防部는 12월 26일 각군 및 국방부 관계요원을 포함한 확대 긴급국무회의를 열고 派兵에 따른 구체적인 내용과 작업과정등에 절차를 논의하였고,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실무회의를 개최하여 처리토록 하였다.

실무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보면 베트남戰 派兵을 위한 원칙은 동의하나 이에 따른 문제로서 派兵部隊를 현장비중에서 휴대케 하는데서 오는 장비 보충건, 베트남 파병부대의 수송과 연락을 위한 韓國海軍 함정, 항공 및 해군 함정운항에 소요되는 연료보충건, 전투력 약화방지를 위하여 현 韓國軍 兵力을 실링(Ceiling)에서 파병을 고려하는 문제, 본대 출발을 국방부장관과 駐韓 美軍 사령관의 정식 합의 4주 후에 출국할 것. 그리고 부대증파에서 오는 미국의 경비부담이 한국군원에서 삭감되어서는 안된다는 등의 내용을 미측에 요청할 것을 결정 하였다.  

이처럼 파병에 대한 실질적인 준비가 진행되고 있던 1964년 12월 29일 정부는 제123회 국무회의를 개최하여 베트남 지원을 위한 건설공병단을 증파할 것을 의결하였다. 이때 정부는 美國側에

①韓ㆍ美 行政協定에 조속한 체결
②군수 이관의 연기
③특별 원조 공여 등을 요구하였고

베트남 政府에 대해서는

①韓國産 철강재, 시멘트, 군용피복등의 수출
②타이어를 비롯한 각종 고무제품의 수출증대
③美國의 對 베트남援助 剩餘農産物에 대하여 韓國에서의 가공 등을 派兵 조건으로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65년 1월11일 國會에 國軍 海外 派兵등의 요청안을 제출하였다. 國會는 65년 1월18일에서 25일까지 5차례에 걸쳐 토의를 진행하였는데 1차 파병때와는 달리 신중론과 반대론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그리고 美國의 韓國安保에 확고한 보장과 對韓 軍事援助의 증가  韓ㆍ美行政協定의 조속한 체결등 사전 보장 조치후에 派兵을 論議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國會의 요구에 따라 2차 파병때부터 韓ㆍ美間에 派兵 협상에서 韓國側의 요구는 韓ㆍ美 相互防衛條約의 개정이었으며 이에 대해 美國은 駐韓 美軍 철수 논리로 대항하였다.

韓ㆍ美 相互防衛條約의 개정(韓國 분쟁에 관해 美國의 무조건 적이고 즉각적인 개입)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65년 1월 國會 本會議에서 派兵案을 政府 원안대로 통과하였다.

그리하여 '65. 2. 12 ~ 3. 11 사이에 비둘기부대(주월한국 군사 원조단)는 韓國을 출발하여 3월16일 디안에서 지휘소를 개소하였다. 그후 '65년 9월 25일 駐越 韓國軍 사령부가 창설됨에 따라 건설지원단으로 개칭되었다.

나.  3ㆍ4차 파병(65. 10. 3 ~ 73. 3. 23)

(1) 3次 派兵(靑龍, 猛虎部隊)

美國 존슨 大統領은 '65년 4월중「호놀룰루」전략회의에서 지상군 전투부대를 투입키로 결정하였으나 미국내에서 모두 충원하지 못하여 韓國軍 戰鬪兵力을 파견을 요청하도록 베트남정부에 전하였다.

朴 大統領은 원래부터 參戰을 결심하고 있었고, 李東元 당시 외무부장관은 참전을 통하여 經濟的 실리를 획득하고자 했다. 朴 大統領은 戰鬪兵力 派兵에 찬성하되 나머지 모든 사항은 外務部長官에게 일임하였다. 3차 파병에 종합적인 검토를 담당했던 외무부의 기본적인 자세는 美國과의 관계로 보나 安保측면에서 보나 派兵은 불가피하다고 전제하였다. 그리고 外務部는 派兵을 통해 조국 근대화를 촉진시키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였던 것이 기본입장이었다.

당시 李東元 外務部長官이 파병조건으로 美國에 제시하였던 것은
첫째:韓國軍의 일부를 베트남으로 이동시키려면 우선 韓國軍의 現代化를 지원 할 것.
둘째:韓國이 北韓의 침공을 받을 경우, 美國 國會의 사전동의 없이 美國의 즉각 출병이 가능하도록 韓ㆍ美 相互防衛條約을 개정할 것.
셋째:韓國이 派兵할 경우에 야기될 수 있는 經濟的 파국을 막기 위해 韓國軍 派兵에 따른 일체의 경비를 美國이 부담할 것. 넷째:美國이 바라는 韓ㆍ日 國交 正常化를 위해서도 韓國이 經濟發展을 이룩할 수 있도록 戰爭에 必要한 軍需物資를 韓國이 공급하는 등 베트남 市場을 보장할 것 등이었다.

李東元 外務部長官은 1965년 3월16일「러스크」國務長官과 만나 韓國이 派兵하고자 하는 이유는 첫째, 美國에 대한 의리 때문이고, 둘째, 美國이 아시아에서 곤경에 처하면 우리도 어려워질 것이라는 견해임을 밝혔다. 그리고 韓國은 美國이 베트남전에서 투자하고 있는 막대한 비용의 일부를 파병대가로 우리에게 지원해 줌으로써 한국경제가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솔직한 지원요청을 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미측에 1개 전투사단과 3개 예비사단의 준 전투사단화 이에 따르는 중장비 지원 그리고 軍援移管 問題를 韓ㆍ美 교섭과정에서 해결하였다. 특히 군원이관문제는 총액 250억원의 부담을 미측이 지게 됨으로서 당시 경제 실정에 비추어 보아 매우 큰 효과를 국군에 가져오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적으로도 駐韓 美軍 作戰 統制權 아래에 있는 韓國軍이었지만 베트남에서는 독자적인 작전권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3차 파병은 1,2차 파병과는 달리 經濟的인 實利外交를 추구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경제 부처의 對美ㆍ對베트남 접촉이 활발해졌으며 특히 對越 경제협력과 진출업체들의 지원은 관료적 형태와 사고를 벗어나 전향적 자세로 임하였다.

그러나 국방부는 美측과의 정치적 협상과정에서 순수한 자유우방에 대한 報恩의 입장에서 증파를 논하였으며 이로 인해 신규편성 장비와  당면문제였던 군원이관문제만을 협의하였으며, 이때도 1,2차 때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면과 전투부대가 참전시 후유증(특히 현대전과 화생방전 등)에 대한 분석이 없었다. 이에 枯葉劑 문제 등 전후 문제가 지금도 남아있다.

즉 3차 파병의 정책결정은 朴 大統領의 파병결정과 이와 관련하여 베트남전 파병으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경제적 이익을 얻고자 하는 李東元 외무부장관의 정책방향에 맞춰 집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전투부대의 파병이 결정되자, 국방부는 韓國軍의 파병에 수반되는 조치로서 韓國戰線의 防御力, 軍事資金關係, 派兵韓國軍의 報酬, 裝備 등 韓ㆍ美間의 협의를 마치고, 파병부대로 수도사단의 2개 연대, 해병 제2여단, 군수지원사령부 및 주월 韓國軍 司令部를 편성하였다.

이들 부대중 수도사단은 1965년 10월3일 부산항을 출발(제1제대)하여 10월26일 (마지막 제대)베트남중부 퀴논(Qui Nhon)에 상륙하여 1,200㎢에 달하는 전술책임지역을 인수하고 해병 제2여단은 베트남중부 해안인 캄난(Cam Rahn)에 도착하고, 駐越 韓國軍 司令部는 사이공에서 1965년 10월20일 지휘소를 개소하였다. 

(2) 4次 派兵(白馬, 혜산진 部隊)

韓國軍의 제3차(수도사단 및 해병여단)派兵이 실시된 이후에도 베트남戰은 호전되지 않아 美ㆍ베트남의 한국 전투부대에 대한 병력요구는 계속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美國務省은 韓國軍의 추가파병을 면밀히 검토하기 시작했다.1965년 韓國軍 戰鬪部隊의 파병이 결정된 후 「맥노튼」美國防省 차관보는 韓國軍의 전투능력은 어떤분야에서는 美軍을 능가하고 있으며, 美軍의 추가 증원이 어렵다면 韓國軍의 증파라도 절실히 요청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리고 美國이 예비역을 소집하지 않는 한 이 문제는 미국 자체만으로 해결하기 곤란하였다.

한편 베트남戰에 파견된 韓國軍 수도사단은 베트남에 도착후 각종 작전을 통하여 그 용맹성을 발휘함으로써, 베트남전쟁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美國은 韓國軍의 베트남戰 수행을 위해서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였고, 당시 駐美公館長會議 主宰 및 제20차 유엔 총회 참석차 訪美中인 이동원 외무부장관을 통해 제4차 파병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韓國側에 사전협의 없이 美ㆍ베트남 정상회담을 실시한 것에 불쾌감을 느낀 朴 대통령이 이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당시 韓ㆍ美 양국운 3차파병당시의 약속 이행에 관해 이견을 보이고 있던 때라 여러 가지 난항을 겪다가 美측이 브라운 覺書를 쓰고 (원래는 合意 議事綠을 작성하기로 했는데 美國側이 일방적으로 바꾸었다)증파를 하였다. 국회에서도 많은 의원들이 반대를 하여 야당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파병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4차 파병의 결정은 더욱 합리적 계산에 의한 경제적 실리추구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資本誘致, 資本畜積, 人力輸出, 技術確保 등이 중요한 목표로 등장하였고 이를 정부차원에서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투부대가 참전할 경우의 후유증에 대한 분석이 없었다.

'66년 4월 16일 혜산진부대(수도사단 제26연대)가 퀴논항에 도착하고 백마부대(보병 제9사단)는 동년 8월30일 부산 출발하여 총 병력이 4만5천여명에 이르게 되었다.'71년 1단계 철 수가 실시되기 직전 주월 한국군부대 편성은 다음과 같다.

 

<표3-2>

주월 한국군 편성

1971. 11

부         대

예     하     부     대

수도사단

★기갑연대   ★보병 제1연대  ★보병 제26연대   
★포병 제10대대   ★포병 제60대대   ★포병 제61대대   ★포병 제628대대   
★공병대대    ★수색대대   ★전차중대   ★직할중대

보병 제9사단

보병 제28연대    보병 제29연대     보병 제30연대    
포병 제30대대    포병 제51대대     포병 제52대대    포병 제966대대  
공병대대    전차중대    수색중대     직할중대

 해병 제2여단

★보병 제1대대   ★보병 제2대대  ★보병 제3대대  ★보병 제5대대  
★포병 제2대대   ★육군 포병 제628포대 제1포대(155밀리)배속
★공병 중대  ★수색중대   ★항공중대   ★전투지원중대 ★직할중대

제100군수
사령부

★제1군수지원단  (제11군수지원대대 제103공병대대 제239수송자동차 대대 직할중대)   
★제2군수지원단(제12군수지원대대 제116공병대대)   ★제237수송 자동차 대대   ★직할중대   ★제5통신대대
★제102후송병원   ★제106후송병원   ★제20 이동외과 병원   ★제1치료중대   ★직할중대   ★제11항공중대

 건설지원단

★제101경비대대   ★제127공병대대   ★제103공병대대(배속)   ★제201 이동외과병원   ★본부대대   
★태권도 교관단

 해군 수송 전대

★3개 LST함 (제809,  제910,  812 LST)   ★2개 LSM함(제610, 613LSM)

공군지원단

★전술공군지원대(전술통제반, 기상지원대)   
★비행대(공수비행반, 정비반)   
★수송지원대(공수취급소, 기지연락반,  의무반)

주월한국군사령부

★사령부   ★야전사령부   ★본부   ★근무대대   ★직할부대   ★군사정보대

  자료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국방사 제3집, 1990.  p.348.

 

3,4차 派兵은 실질적인 戰鬪兵力 派兵으로써 이로 인해 韓國軍 現代化 및 軍援 移管 중단 등 韓國側의 요구가 많았고 美側의 지원합의사항도 많았던 파병결정이었다. 그러나 韓ㆍ美相互 防衛條約의 개정은 이루어지지 않었다.

韓國軍의 베트남 派兵시 韓國은 美國과 협상하면서도 美國의 베트남戰 적극 개입으로 인한 베트남戰 확대와 이로 인한 駐韓 美軍 전용가능성에 항시 우려하였다.

당시 상황으로 韓半島에서의 전쟁억제는 駐韓 美軍의 건재라는 전제하에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이와 같은 전제조건이 성립되지 않았을 때 북한의 남침위협은 한국 안보에 절대적인 위협이 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베트남전 전비의 충당으로 인한 美國의 對 韓國軍事援助 삭감은 韓國軍의 현존 군사력의 유지조차도 어렵게 하였으며 장비 현대화는 생각할수고 없었다.

 

<표 3-3>

베트남戰 派兵國의 派兵規模(1965 ~ 1972)

단위 : 명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미       국
한       국
대       만
필  리  핀
타       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렌드
스  웨  덴

184,300
20,620
20
 72
16
1,577
119
0

388,568
45,605
30
2,063
224
4,533
155
12 

197,498
48,839
30
2,021
2,242
6,597
534
13

548,383
49,869
29
1,593
6,009
7,492
529
11

479,678
49,755
29
189
11,568
7,643
189
10

345,074
48,478
31
74
11,606
6,793
416
7

156,975
45,663
31
57
6,265
1,816
60
0

29,566
27,438
31
47
38
128
53
0

 

<표 3-3>에서 보는 바와 같이 韓國은 美國 다음으로 대규모의 兵力을 베트남에 派兵하였다.
                                                                         12)朴根好 「韓國の 經濟發展とべトナム戰爭」 御茶の 水書房  p. 15.

 

 

 

Ⅳ.  베트남戰 派兵에 따른 經濟的 效果

 

 

베트남戰 派兵은 1960年代 韓國社會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政治ㆍ軍事的인 면은 물론이거니와 經濟的인 면 그리고 사회전반에 걸쳐서 1960년대 韓國社會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이다.

본 장에서 베트남戰 派兵이 가져올 國民經濟的 效果만을 다루기로 하며 우선 각 부문별 기여도를 개괄한 다음 전체적인 성격을 평가 하기로 한다.

 

1.  政府 部門의 經濟的 效果

 

가.  군원이관 중지

 

1960년대 중기에 韓國社會問題중 하나는 과대한 국방비 부담문제였으며 때마침 美國으로부터 제기된 軍援移管 문제는 이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당시 美國이 계획하고 있던 軍援移管은 실질적으로 韓國에 대한 軍事援助의 삭감을 뜻하는 것으로서 그동안 이것을 중지할 것을 요망하는 韓國의 소리가 높았었다.

이 계획은 이미 체결되어 있던 美國의 韓國에 대한 軍原移管計劃 협정의 실시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즉, 美國은 韓國의 經濟成長이 1957, 1958, 1959에 걸쳐 해마다 약 7% 성장한 것에 비추어 韓國이 연차적으로 軍援 일부를 부담할 것을 제의하였었지만 당시 韓國은 4.19革命과 5.16으로 社會的 혼란이 충분히 극복되지 않었고 계속되어온 援助削減으로 재정운용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軍援移管 문제를 재고하도록 美國政府에 요청하고 있었다. 만약 美國이 예정대로 軍援移管計劃을 실천하엿다면 韓國은 1965년부터 2970년에 이르는 5년간에 걸쳐 총액 약 250억원을 韓國이 부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 경제실정에 비추어, 또 國軍의 유지를 위해 매우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우리 軍의 베트남 派兵의 대가로 이것을 유보하게 되어 韓國은 이에 상응한 財政 負擔을 줄일 수 있었다.

 

나.  美國 軍事援助의 增加

 

전술한 바와 같이 1945년에 개시된 GARIOA 원조를 시작으로 한 美國의 對韓 經濟援助는 1960년 UNKRA원조의 종식으로 마무리 되고 軍事援助 만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美國의 베트남戰 介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나서 美國의 對 韓國 軍事援助는 급속히 축소되기 시작하여 1964년엔 1억2천4벡만 달러로 전년대비 약 6천만 달러나 감소되었다. 1961년 현재 韓國 總軍事費의 67.3% 수준을 전적으로 美國의 軍事援助에 의존하고 있던 韓國으로서 이러한 美國의 參戰要請을 거절할 수 없었고 派兵 결정으로 인해 軍事援助의 계속은 물론 派兵에 의한 美國 軍事 援助 만큼의 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표4-1참조.) 이는 經濟的 부담 경감뿐만 아니라 軍事的으로도 계산할 수 없는 이익까지 결부되는 중요한 이익이었다. 또한 韓國은 國內的으로 經濟問題에만 전념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援助 額數에도 派兵前인 '62년에서 '65년까지 총 9억 8백만 달러의 援助를 받아 연 평균 2억2천7백만 달러였는데 韓國軍의 派兵期間인 '66년에서 '71년 간에는 20억2천2백만 달러로 연평균 3억7백만 달러의 援助를 획득함으로써 援助 축소로 인한 잠재적 손실까지 감안한다면 엄청난 금액상의 이익을 가져온 것이다.

 

  <표 4-2>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

(단위 : 백만 달러)

회계년도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월남전
참전

1966

원 조 액

184

200

137

183

124

173

210

 

회계년도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월남전
철수

원 조 액

272

389

480

330

556

532

363

 자료 : 「한국의 월남참전과 역사적 재조명」만세사(1993) P. 64.

 

이 금액의 상대저인 가치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자료는 당시 우리나라의 輸出額인데 1961년엔 1억4천6백만 달러에 불과하고 經濟開發이 한창이던'66년에도 2억 5천5백만 달러였는데 美國 軍事援助額은 이를 상회하고 있다.

韓國은 이 자금을 가지고 防衛産業을 육성하여 國家 經濟 및 社會發展에 이바지하고 軍 現代化計劃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다.  韓國軍의 現代化

 

韓國은 美國의 軍事援助뿐 아니라 무상지급된 무기로 인하여 韓國軍의 現代化를 기할 수 있었다. 美國으로부터 지급받은 무기는 F-14 18대, 對 間諜用 軍事裝備, 신예 구축함 2대, M-16 등 개인화기와 火力, 機動, 通信, 建設裝備 지원과 소총공장 건설 직접지원이 있었으며 이는 현대화된 군대로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라.  國家 次元에서의 軍納 交涉

 

그리고 베트남 參戰 兵事들에 지급되는 野戰 食糧, 정글화, 被服 등의 國內生産으로 인해 많은 외화를 획득하였다. 韓國軍은 처음에는 美軍用 野戰食糧인 C-레이션을 공급받았으나 사병들의 요구에 따라 K-레이션을 韓國에서 조달공급하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위생검사에서 불합격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품질을 향상시키고 개량하여 國際的 인정을 받아 수출가능하게 되었다. 또 美軍과 다른 체형을 가진 韓國軍의 被服도 韓國에서 자체 조달하게 하여 외화를 획득하였다. 이들 軍需品은 전액 美國이 지원하게 되어 있으므로 韓國은 연간 5천만달러 이상의 輸出效果를 올렸다. 그리고 PX軍納에 의한 外貨收入과 技術發展도 있었다. 원래 PX는 美軍 供給物만 販賣 하도록 되어있는데 10종에 한하여 韓國物品을 納品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중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정글화 생산과 맥주생산의 예에서 보듯이 軍納生産契約 체결과 더불어 동산업의 기술적 혁신이 가속화 되었다는 점이다. 1960년대 당시 고무신이나 스니크(Sneaker) 신발생산 기술만을 보유하였던 韓國의 신발업계는 1966년 당시 최대기업이었던 國際商社를 축으로 하여 美8軍 輸出用 군화인 일명 정글화를 수주함으로써 韓國 신발수출산업의 일대 전기를 맞이하였다. 즉 韓國의 신발업계는 비닐론과 갑피의 최초사용과 몇가지 技術的 개선을 성공함으로써 1980년대 혁제 고급운동화 생산 왕국으로서의 입지를 개척하게 되었다.

또한 당시 맥주는 납품의 조건인 캔맥주 기술이 없었는데 軍納 결정을 계기로 開發하여 納品을 할 수 있었다. PX납품규모는 연간 160만 달러에 이르렀다. 13)국제 상사 주식회사 「국제 상사 30년사」1949 ~1979  P.279,  P.331

 

마.  西方 世界로부터의 借款 導入 및 技術導入 效果

 

1960年代의 수출주도 工業化로서의 産業化政策 轉換은 1964년 환율인상, 한ㆍ일협정 등 대내적ㆍ대외적인 일련의 조치들로서 일단의 기초를 마련하였다고는 하지만 무엇보다 외적인 성장에 필요한 도입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 상황은 國際金融市場에서 매우 낮은 신용상태로 평가 되었고 높은 칸트리리스크(Country Risk)보유국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순조로운 外貨導入이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당시 韓國政府는 韓ㆍ日 相互防衛條約의 개정으로 美國의 안보 우산에 편입되기를 강력히 희망하고 이를 기초로 安定的이고 장기적인 開發資金을 도입하기를 원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제3차 派兵시부터 이문제는 어느정도 해소되어 안전보장의 확인과 軍援移管計劃의 중지는 물론 韓國商品의 對美輸出擴大와 技術援助 및 KIST 설치지원 과학 고문단의 방한 약속을 받아 내는데 성공하였다.

<표 4-3>에서 보듯이 베트남전에 파병이 본격화 되는 1967년 이후부터 차관규모가 급증하고 있다.

 

 

<표4-3>

外貨導入 總覽表(到着基準)

(단위 : 백만달러)

 

 

1959~66

1967

1968

1969(A)

1970(B)

증감(A-B)

금액

증가율

공공차관
상업차관
정부지보분
시은지보분
지보불요분
소계
외국인투자
합계

140.8
184.1
171.8
5.2
7.1
325.0
26.2
351.2

105.6
124.0
66.4
39.0
18.7
229.6
7.7
237.3

70.2
268.4
66.5
161.7
40.1
338.6
19.2
357.8

138.9
408.9
25.6
366.0
17.2
547.8
12.7
590.6

115.3
378.6
11.6
288.8
78.2
493.9
65.2
559.1

-23.6
-30.6
-14.6
-77.8
61.2
-53.9
52.2
-1.4

-17.0
-7.4
-54.7
-21.1
354.7
-9.8
413.7
-0.2

자료 : 경제기획원, 한국경제인연합회, 전국경제연감 1971

 

1959년부터 1966년까지 도착기준으로 351.2백만 달러이던 外資導入 總額은 1967년 1년동안에 237.3백만 달러로 급증하였으며 1968년에는 357.8백만 달러, 1969년에는 560.6백만 달러로 증가하였다. 1970년에도 559.1백만 달러의 外貨가 도입되었다. 형태별로 보면, 1967냔에는 公共借款105.6백만 달러, 상업차관이 124.0백만 달러, 외국인 투자 7.7백만 달러였으나 1970년에는 公共借款이 115.3백만 달러, 商業借款 378.6백만 달러, 直接投資 65.2백만 달러였다. 公共借款에서 商業借款으로 그 주류가 넘어왔고 아직 규모는 작지만 후기에 오면서는 直接投資가 증가하는 추세를 나타내었다. 도입국별로 보면 商業借款의 경우 전체적으로 美國이 많지만 韓ㆍ日 國交正常化 직후인 1967년과 1968년에는 日本에 진출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러한 外資導入이 베트남 特需에 따른 輸出增加, 政府의 막대한 財政投融資와 함께 이 기간의 고도성장을 뒷 받침한 주요 요인이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기간에 도입된 外貨는 농림수산업에도 투자되었지만 극히 미소한 것이었고, 많은 부분이 製造業과 社會間接資本 부문에 투자 되었다.

그 중에서도 製造業에 投資된 비중이 높았고 電力, 運輸, 保管業, 建設業을 중심으로 한 社會間接資本도 間接的으로 工業성장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直接投資는 대부분이 工業部問에 投資되었다.

製造業에 投資된 外貨는 중소기업의 육성에도 쓰였지만 짧은 기간에 대규모 건설에 쓰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대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하였다.

업종별로 보면 商業借款의 경우 纖維工業ㆍ化學工業ㆍ石油 및 石炭製品工業ㆍ土石 및 유리제품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金屬工業과 機械工業部門이었다. 直接投資는 石油工業ㆍ化學工業ㆍ電氣 및 電子工業이 주측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 새로 발전한 産業이 石油 및 石油化學工業ㆍ電子工業ㆍ自動車工業이며 纖維工業ㆍ시멘트ㆍ肥料工業도 더욱 확충되었다.

이처럼 産業構造가 급속히 변동한 1960년대 후반기에 우리나라 産業은 그 주요 기반을 重化學工業分野로 옮겼다. 원조물자의 단순가공형태인 三白産業이 누리던 지위는 무너지지 않았지만 이윤의 주된 원천은 점차 重化學工業生産過程에서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1950년대의 三白産業과 같은 消費財的 産業에서 점차 벗어나는 시기로 생각된다. 따라서 베트남戰 派兵을 계기로 1960년대 借款經濟로의 순조로운 이행이 보장되었고 이것은 1970년대 重化學工業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民間部門에서 얻은 經濟的인 效果

 

政府는 安保를 확립하고, 資金을 획득하여 여러 基幹産業 및 國家 숙원사업을 성취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성립된 여러 기업으로 인하여 많은 일자리를 확보하였다. 많은 업체들이 베트남에 진출할 수 있었으며 「베트남 붐」을 일으켜서 취업을 확보하고 많은 외화를 획득하였다. 베트남戰 派兵에서 얻은 資今으로 베트남 市場을 공략하여 經濟成長을 이루고 많은 海外企業 人力들을 양성하여 훗날 中東進出의 발판을 만들었다.

일명 베트남 特需라고 할 때 이는 우리 업체 및 기술자들의 베트남 진출로 인하여 韓國 經濟 發展의 전기를 마련하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韓國이 베트남戰 派兵으로 얻은 經濟的 이익은 첫째, 美國의 對韓 經濟借款額增加, 둘째, 美國이 제공한 베트남 주둔 韓國軍의 유지비용, 셋째, 베트남戰에 必要한 軍需物資 納品 및 用役事業 참가 등이다. 앞서 세가지는 언급하였고 이제는 民間次元에서 여러 베트남內 사업참가에 대하여 논의해 보고자 한다.

 

가.  技術人力 進出

 

技術人力 進出은 1965년 11월 10일 韓ㆍ越 相互經濟協力을 위한 각료급 1차회담에서 언제나 韓國 技術者를 이용하며 베트남 후방지역 建設工事에 韓國側의 참여가 동의됨으로서 이루어졌다.
                                                                       
14)李勳燮「그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샘터(1993)p.289

技術者들의 進出 狀況은 다음 <표4-5>에서 보는 것과 같으며 이같은 勞動力 進出은 1963년에서 1970년대 中東進出과 연결되면서 石油波動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등 韓國의 國家 發展에 크게 기여하는 결과를 나타냈다. 그리고 <표4-4>에서도 알 수 있듯이 業體보다 人力이 먼저進出하여 이들 技術者들이 「베트남 붐」을 일으켰으며 그리하여 보다 많은 業體와 사람들이 베트남에 進出하였다. 그리고 駐越 韓國軍 복무자가 현지 제대하여 취업하는 사람도 많았다. 당시 베트남 人力進出의 '66년도 현황은 <표4-4>에 나타나 있다.

 

<표4-4>

人  力  進  出  現  況

(1966.9.말 현재)

RMK

2,455/25,500

PASE

130/900

PAGE

122/290

USOM

119/119+100

PHILCO

530/600

LST

290/2,980

Trans Asia

35/35

PA & E

1,343/2,000

Vinneel

975/2,000

韓     進

1,073/1,073

通一京南

294/335

大     林

52/52

現代建設

73/73

三煥企業

30/100

共榮建設

286/455

東進企業

55/95

새한現像

8/10

총    계

7,878/36,725

三昌産業

8/8

  자료:李勳燮「그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1993)P.473

 

총계 7,878/36,725는 '66년 人力進出目表가 36,725명인데 반해 9월말 현재 7,878명이 進出했다는 뜻이다.위의 業體중 韓進商社는 퀴논항에 경남기업은 다낭항에 運送契約을 체결하였으며 군복수선,사진현상,세탁,군장품제조판매 등 여러분야에서 用役契約을 체결하였다.美國 企業에 진출한 인력은 주로 軍事基地建設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후에는 시설유지,장비정비,수리분야에도 진출하였다. '66년도 말에는 <표4-5>에서 알 수 있듯이 韓國,美國業體 모두합하여 10,020명의 韓國 技術者가 進出하여 거의 목표량을 달성하였다.

 

<표4-5>                  派越 技術者 現況                   (단위:명)

年     度

韓國係 會社

美國係 會社

合     計

1965

 

105

105

1966

2,187

7,834

10,021

1967

3,983

8,964

12,947

1968

4,284

11,287

15,571

1969

3,941

8,678

12,619

1970

2,739

3,997

6,736

1971(10월말)

2,044

2,301

4,345

合     計

19,178

43,166

62,344

자료:한국일보 1971년 1월29일

 

나.  用役 業體 進出

 

派越 技術者들이 베트남에 進出하자 '66년부터 用役業體들도 進出하기 시작하였다. 用役業體 進出 숫자는 <표4-6>과 같으며 그곳 技術者들 數는 위<표4-5>와 같다. '55년도 10개업체 진출부터 시작하여 '69년엔 56개업체에 이르렀으며 그 뒤에는 감소 추세였다. 71년 말까지 送金實績이 2억3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建設部門도 '65년9월 建設業協會에서 국내 유수한 업자들로 구성된 현지 조사단을 파견하여 업체별 시장조사를 실시하였으며 政府의 建設工事入札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지원으로 한국만이 입찰할 수 있는 Korea Only라는 특이한 入札 방식을 낳기까지 했다.

'66년 상반기에 現代建設의 준설사업, 대림산업의 항만공사를 선두로 삼환기업,부흥건설,공영건설 등 건설업체가 참여하였으며 주로 축항,도로개설,병원,주택,학교 및 군 시설공사를 하였다.

用役, 建設業體의 '66년부터 '71년까지의 送金實績은 <표4-6>에 잘 나타나 있다.

 

 

<표4-6>

用  役  業  體  進  出  推  勢

단위:천 달러

 

연              도

진  출  업  체  수

송   금   실   적

1966

 10

    3,321

1967

 25

  35,470

1968

 41

  46,058

1969

 56

  55,274

1970

 48

  52,352

1971

 38

  31,984

218

229,459

자료:한국일보 1972년 2월 5일

 

이상과 같은 베트남 特需에 힘입어 우리 人力과 用役 및 建設業體가 進出하여 벌어들인 수입은 막대하였다. 예를 들어 '68년 貿易外 收入은 총 2억9,669만 달러인데 대부분이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것이다.

 

3.  海外部門(國際收支)效果

 

이러한 美軍 또는 베트남 進出로 인한 貿易外收支 외에 특별한 經濟교류가 없었던 베트남과의 經濟的 紐帶가강화되어 1962년 83만 달러의 對 베트남 輸出은 '64년엔 600여만 달러 '65년엔 1,678만 달러로 급증하였으며 '68년엔 3,798만 달러로 우리나라 總 輸出 구성비에서도 전체수출의 7.6%로 美國, 日本에 이어 3位를 차지하였고 輸入은 거의 없어 3,757만 달러의 수출초과를 이루어 당시 벌어졌던 貿易逆潮現狀(輸出이 호조를 보여 63년에서 68년 사이 5배를 넘는 성장을 하였으나 동시에 輸入도 증가하여 일어남)의 격차를 메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표4-7>

베트남 特需에 의한 外貨 收入

(단위:백만달러)

구    분

1966

'67

'68

'69

'70

'71

'72

1.  무역
  •수출
  •물품군납

23.8
13.9
 9.9

20.2
  5.7
14.5

34.6
  5.7
14.5

35.5
11.9
23.6

37.7
13.4
24.3

35.5
14.3
21.2

28.3
13.3
15.0

215.6
  76.3
139.3

1.  무역  외
  •용역 및 건설
  •장병송금
  •기술자송금
  •파월지원경비

34.8
12.2
13.2
  9.1
-

113.3
 40.2
 30.0
 34.3
   8.8

121.6
49.0
34.4
33.6
4.6

122.9
37.5
31.5
43.1
10.8

114.1
45.8
26.2
26.9
15.2

88.7
34.8
24.7
15.3
13.9

46.5
12.3
18.3
3.9
12.0

641.9
232.1
178.3
166.2
65.3

함    계

58.6

133.5

156.2

158.4

151.8

124.2

74.9

857.6

  자료:김기태「한국의 베트남전 참전과 한ㆍ미관계」(1982) p.163

 

  위<표4-7>은 베트남 特需로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輸入인데 66년에서 72년까지 약 8억5천800만 달러에 달하였다. 이러한 베트남 特需로 인한 收入이 우리나라 國際收支에 영향을 끼친 기여도는 다음과 같다.

 

  <표4-8>

베트남 外資收入의 우리나라 國際收支 寄與度

(단위:백만달러)

구         분

1966

'67

'68

'69

'70

71

'72

(1)재화용역 수지
(2)재화용역 수입
(3)무 역 외  수지
(4)무 역 외  수입  
(5)대월외자 수입
  ①수출 및 물품군납   ②무역 외
(6) (5)/(1)       (%)
(7) (5)/(2)       (%)
(8) (5) - ②/(3) (%)
(9) (5) - ②/(4) (%)

323.0
454.7
106.5
204.3
58.6
23.8
34.8
18.1
12.9
32.7
17.0

417.1
642.7
157.1
308.2
133.5
20.2
113.3
32.0
20.3
72.1
36.8

666.4
380.3
169.3
394.0
156.2
34.6
121.6
23.4
17.7
71.8
30.9

794.4
1,150.7
197.3
492.4
158.4
35.5
122.9
19.9
13.8
62.2
25.0

802.7
1,616.0
110.3
488.7
151.8
35.7
114.1
18.9
11.0
93.3
23.0

1,018.1
1,616.0
27.3
488.7
124.2
35.5
21.7
12.2
7.7
78.2
18.3

513.0
2,210.0
38.0
558.0
74.8
28.3
46.5
14.6
3.9
122.4
8.3








19.9
12.5
76.1
22.8

자료:김기태「한국의 베트남전 참전과 한ㆍ미관계」(1982) p.164

 

위에서 보다시피 '66년부터 '72년까지 베트남에서의 무역외수입은 전체 무역외 수지의 22.8%를 차지하였고 베트남에서의 재화 및 용역 수입은 우리나라 전체의 재화 및 용역 수입의 평균외수지 흑자 가운데 76.1%는 베트남 특수에 의해 얻어진 것이다.

 

4.  經濟 發展論的 評價

 

이상의 논의에서 살펴본 베트남戰 派兵으로 인한 經濟的 效果를 統合的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

 

가.  外資 및 技術導入

 

1960年代의 후반 이후 韓國의 工業은 놀랍게 발전을 이루어왔다. 그것을 지탱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적극적인 投資活動에 있다. 60年代 전반 ('60~'64)에는 18.2%에 지나지 않던 總投資額 增加率은 후반('65~'69)에는 33.8%로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그 결과 GNP에 차지하는 總投資比率은 전반에 14%였지만 후반에는 23%로 대폭 증가하였다. 즉 60년대 후반에 들어 높은 投資率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기간 높은 투자는 外資導入에 따라 지탱되어진 것이다.

(1)外資導入
  美國의 韓國에 對韓 經濟援助는 韓國戰爭(6.25)이후 급증하였다가 1957년을 기점으로 減小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援助減小 경향은 美국의 援助政策의 전환을 반영한 것이다. 58년에 시작된 美國의 國際收支의 대폭 赤字와 거기에 이은 달러 위기는 美國 國內에 있어서 종래의 對外援助政策을 재고 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57년을 기점으로 美國의 對韓援助가 양적으로 減小하였다. 그것과 함께 종래 無償援助 방식이 비효율적이란 비판이 강해지면서 對韓援助는 無償方式에서 有償方式으로 질적인 전환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美國은 베트남戰爭의 장기개입으로 인하여 國際收支의 악화등으로 달러 위기를 맞게 되고 對韓 無償援助를 減小시킨다. 단적으로 말하면 美國의 對韓 無償援助는 57년 3억8,300만 달러를 피크로 59년 2억2,200만 달러 61년에는 1억9,700만 달러로 減小한다.

이러한 美國의 援助政策의 급격한 전환으로 인한 對韓援助의 감소는 그때까지 美國의 援助에 전면으로 의존해왔던 韓國經濟에 큰 충격이었다. 그것으로 韓國經濟成長은 둔화된다.

당시 韓國經濟가 심각한 불황에 직면하게 되자 美國의 정책전환에 대하여 60년 1월 李承萬 政權은 「外資導入 促進法」을 제정, 外國人 投資의 허용범위, 外資導入 促進委員會의 구성, 외국인 투자가에 대한 특혜 또 이에 대한 보장과 보호등을 규정하였다. 동시에 「韓ㆍ美間의 投資保護協定」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원조자금을 둘러싼 부정 부폐가 극에 달해 李承萬 政權은 동년 4월19일「4.19革命」으로 물러나고 거기에 61년 군사 쿠테타에 의한 朴正熙 政權이 성립된다.

朴正熙 政權은 쿠테타 직후「民生苦를해결하고 自立經濟를 달성하는데 총력을 다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당시의 軍事政權은 처음에는 국내자금의 조달로 經濟建設을 추진하려고 하였지만 곧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즉, 박정희 정권은 투자재원의 조달을 위해 적극적으로 정책을 추진하지만 정부의 기대만큼 국내자금을 동원하지 못했기 대문에 外資導入으로 인한 經濟建設을 선택하지 않을 수 밖에 없게 된다.

朴正熙 政權은 外資의 원만한 도입을 위해 주로 借款導入의 증대를 목적으로 한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데에 최대의 난관이 된 것은 外貨不足이었다. 당시 日本과는 國交正常化가 되지 않았고 英國, 프랑스, 西獨을 필두로 한 유럽으로부터의 借款供與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美國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韓國은 美國의 無償援助를 받고 있는 가난한 나라의 하나로 國際信用度가 낮을 뿐 아니라 국내기업이 국제금융시장에 완전히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外資導入은 거의 바라볼 수 없었다.

外資導入은 심각한 국면에 처해졌지만 이 곤경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었던 것이 韓國의 베트남 派兵에 동반한 美國으로부터의 借款이다. 韓國軍의 베트남派兵에 동반하여 美國은 「브라운 覺書」에 기초한 借款供與 약속을 하고 日本에 대하여는 韓ㆍ日 正常化 압력을 가하고 유럽 각국에 대하여는 對韓 經濟協力을 호소하게 된다.

이것을 배경으로 하여 外資導入이 본격화것은 1965년 이후로써, 1965년 朴 大統領의 美國 방문을 계기로 外資도입은 급속히 증가하였다.그 내용도 無償援助에 개발차관으로 전환된다. 즉 1965년 美國의 존슨대통령은 韓ㆍ日조약과 韓國軍 戰鬪師團의 베트남 派兵을 토의하기 위하여 朴대통령을 초청하여 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이 회담으로 인하여 韓國軍 戰鬪部隊의 베트남 派兵이 결정되고 韓國은 5만명의 戰鬪部隊 파견을 단행한다. 그러나 韓國은 베트남 派兵을 무조건적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고 外資導入 등 많은 經濟的 측면을 고려하여 결정하였다.

당시「朴正熙ㆍ존슨」공동성명에 의하면
       1) 韓ㆍ日 正常化후로 美國은 對韓 經濟援助를 供與한다.
       2) 1억5천만 달러의 長期 低利의 개발차관지급에 더하여 신규사업계획이 제안된 경우 追加借款을 供與한다.
       3) 經濟의 급속한 성장을 위해 技術援助를 공여하고 또 韓國의 技術開發에 필요한「科學 技術硏究所」의 설치를 위해 자금과 기술원조 등을 약속한다. 이에 더하여 존슨 대통령은 박대통령이 요구한 對韓國際經濟 協議機構(IECOK)의 설치를 약속한다.

借款導入額을 國別로 나누어 보면 美國으로부터의 차관도입은 1959~65년까지 7년간에 겨우 7,400만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60년대 후반에 들면서 급속히 증가하여 66~72년까지의 사이에 13억 달러에 달한다. 이 액수는 차관도입 총액의 43%를 차지한다. 또 59~65년간의 누계액을 17배나 초과한 것이다.즉 朴正熙 大統領의 訪美 이후 美國으로부터의 차관도입이 증가 한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美國의 借款은 長期ㆍ低利의 公共借款이 반이상을 점유하여 商業借款보다 韓國에 유리한 조건으로 행하여졌고 또 基幹産業과 社會間接資本의 정비 등 공기업에 대한 借款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베트남戰 派兵은 1960年代 韓國 經濟의 전체 특징인 借款經濟로의 순조로운 이행에 큰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평가된다.

(2) 技術導入
  技術導入은 1962~66년까지 33건에 지나지 않았지만 67~71간에는 285건으로 60년대 후반부터 급증한다. 67년부터 71년까지의 5년간 美國으로 부터의 導入은 61건, 日本으로부터의 도입은 203건으로 이 기간 對日 依存度가 매우 높다.

그러나 技術導入對價의 지불을 보면 67~71년간 美國이 782만달러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日本으로 500만 달러이다. 즉 기술도입건수에 있어서는 日本이 가장 많은데 비해 기술사용료의 지불은 美國이 많다.

그 이유는 日本으로부터는 비교적 싸고 간단한 소형 프로젝트의 技術이 導入되었는데 반해 美國에선 重化學工業部門에 있어서의 高價의 대형기술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美國의 技術은 日本의 技術보다 技術集約的이고 또 美國의 기술을 도입한 기업쪽이 연구개발(R & D)에 크게 투자한 경향이 있다. 당시 韓國設備의 근대화 정책에 있어서 美國으로부터의 기술도입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외에도 중요한 것은 韓國科學技術硏究所(KIST)설립 일 것이다. 신제품을 개발할 시, 기술을 개선할 시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산업기술개발에 중점을 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를 위해 産業技術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技術力의 확보와 연구 활동이 필요하다. 당시 韓國은 美國의 科學技術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MIT(매사추세츠 工業大學) 규모의 연구소 설립을 희망했지만 아직 韓國의 기술수준으로는 운영,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그 규모는 MIT에 미치지 못하지만 선진기수을 대량 유입할 수 있는 약 8만 3,000평방미터의 땅에 본관, 연구동, 공작공장, 아파트, 귀빈실 등 1만1,400평방 미터의 대규모 綜合硏究所가 세워진다.

이 綜合硏究所의 設立에는 약 26억원이 투입되지만 그 대부분인 841만 달러가 美國으로부터 지원받은 것이다.

美國의 지원으로 세워진 이 硏究所에 대하여는 「韓ㆍ美間 支援技術協力의 최고 금자탑이고 제2,3차 經濟開發 5개년 計劃에 있어서 最高 역할을 수행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  新興財閥의 形成

 

國際的인 비지니스 챤스가 企業의 成長에 미치는 영향은 큰데 특히 韓國軍의 베트남 派兵은 그 대가로 韓國經濟에 베트남 特需를 가져왔고 이 特需는 財閥의 形成과 成長에 큰 영향을 주고 다수의 新興財閥을 탄생 시켰다. 現大, 韓進, 大宇, 大林 등이 그것이다.

이 新興財閥은 베트남戰爭과 관련된 부분, 바로 직물(전투복), 수송, 건설 등의 분야로 상품수출과 건설 하역수출을 급속히 신장시켰고 거대한 부를 쌓아 급성장한다.

또한 베트남 參戰의 대가인 借款은 신흥재벌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대표적 재벌은 다음과 같다.

(1)韓    進
 「베트남 商社」로까지 불리는 韓進은 韓國軍의 베트남 參戰과 함께 군사물자의 수송하역으로 성장하여 그것으로 축적한 돈으로「대한항공」이외에「한진관광」「한진해운」「한일개발」「동양화재보험」「한일증권」등을 이끌고 있다.

66년 3월19일 베트남 하역이 최초로 계약이 맺어지면서 韓進은 財閥로의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韓進商社」가 맡은 하역은 군사물자를 퀴논항까지 하역하고 韓國軍 猛虎師團과 美軍師團의 각부대까지 수송하는 것이었다. 당시 하역 규모는 790만 달러로 당일 하역으로는 최대 규모였다.

(2)現    大
베트남 戰爭으로 해외공사 경험을 축적한 「現大建設」은 거기에 뒤이은 中東建設 進出에 따라 世界的 建設會社의 명성을 획득한다. 오늘날「현대건설」은 종합건설회사로서 토목건축, 도로, 터널, 교량, 철도, 지하철, 댐, 발전소, 공항, 항만 등의 건설을 수주해 연간 매상 2조원(약5,000억엔 1985년), 종업원 64,000명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註15)朴根好 「韓國の 經濟發展とべトナム戰爭」p.88~89

 

 <표4-9>

現代建設의 對 베트남 主要工事實積

 

사           업           명

공  사  기  간

공  사  수  임
(1,000$)

수          익
(백   만   원)






 

준       설       공       사
                    현대  1호
                    현대  2호
토  도  쿠  항  타  공  사
반  호  아  탁  두  공  사
아므란  소도시  건설공사


1966~70
1967~69
1967~68
1967~68
1967~68


9,143
3,758
178
57
4,701

 

소                     계

 

17,838

1,871

세     탁     사     업
기                     타

1968~72

1,7050

868
63

합                     계

 

19,542

2,802

  자료 : 현대건설주식회사「현대건설 30년사」제2권.1982년,614항

 

<표4-9>에 의하면「現代建設」의이익을 建設部分으로는 18억7,100만원 세탁사업으로는 8억 6,800만원을 기록하고 있다.

 

 

 

 

 

 

<표4-10>

主要建設會社의 送金實積(66~71年度)

 

 

회     사     명

누     계     액

비   (%)   율

현     대     건     설
대     림     건     설
공     영     건     설
삼     환     기     업
아     주     산     업
화     일     산     업
경     남     기     업
한     양     건     설
부     흥     건     설
고     려     개     발
K     E     C     C

12,746
5,398
9,721
4,704
1,571
2,271
1,550
4,723
1,464
414
304

28.4
12.0
21.7
10.5
3.5
5.1
3.5
10.5
3.3
0.9
0.7

합                     계

44,866

100.0

  자료:아산 사회복지사업재단「한국의 해외취업」1988, 216항

 

現代建設의 연도별 送金額은 1966년에 建設業 送金總額 450만 달러의 54%인 250만 달러, 67년에는 총액의 56.6%인 300만 달러, 68년에는 55.3%인 650만 달러, 69년에는 13.3%인 76만 달러로 68년까지 급증하였으나 69년부터 감소한다.   16)朴根好 「韓國の 經濟發展とべトナム戰爭」P.122~123

現代建設은 전체 건설업체의 28.4%를 점유하는 위치에서 있었으며 기타 공영(21.7%), 대림(12.0%), 한양(10.5%)순으로 되어있다.

(3)三         星

三星의 輸出實積을 보면(삼성 50년사에 의한)1961년 및 62년에 겨우 59만달러, 90만 달러에 지나지 않던 것이 63년에 기지 建設用 철강판이 베트남에 輸出되면서 226만 달러로 급증하였다.

또 67년에는 100척의 철부선이 수출되어 963만 달러로 현저한 신장을 기록하였다. 이로 인해 三星의 輸出市場은 남베트남에 크게 의존하고 주된 輸出品은 철강제, 샌드백, 철부선, 시멘트 등 여러 가지다. 샌드백과 시멘트는 韓國에서 生産된 것이지만 철강제와 철부선은 韓國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라서 日本에서 輸入하여 다시 베트남으로 輸出함으로써 이 시기부터 商業貿易 활동이 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  政府部門에 發展

전술한 바와 같이 1960年代 韓國의 外資導入은 1次 經濟開發計劃末부터 이루어져 2次 經濟開發計劃에는 베트남 特需로 인한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제2次 經濟開發計劃 기간에는 <표4-11>나타난 대로 國民貯蓄率이 계획보다 1.8% 초과하였고 그로 인한 투자율도 7.4%나 초과하는 26.4%에 이르렀으며, 經濟 成長率도 2.7%나 초과 달성하여 9.7%나 되었다.

 

<표4-11>

                         제2차 경제개발실적

(단위:%, 실적/계획)

 

연    도

국민저축율

투   자   율

경제성장율

1인당국민소득

1966년

10.5/12.9

18.2/22.7

11.9/ 8.3

13,153

1967년

10.8/ 3.8

20.2/17.9

6.6/ 7.0

32,116

1968년

12.1/ 9.9

24.7/18.5

11.7/ 7.0

34,895

1969년

15.5/11.6

30.8/19.1

13.8/ 7.0

38,755

1970년

14.1/13.1

28.1/19.7

7.8/ 7.0

40,327

1971년

13.2/14.4

28.2/19.9

9.4/ 7.0

45,197

'67~'71년 평균

13.1/11.3

26.4/19.0

9.7/ 7.0

 

자료:경제기획원 개발년대의 경제정책(삼성인쇄주식호사, 1982)

 

 

<표4-12>

將兵, 技術者 貯蓄 및 推移

(단위:10억원)

 

연   도

장  병 ㆍ기  술  자   저  축  액

가      계
저  축  액
(B)

A / B

계(A)

장      병

기  술  자

'66
'67
'68
'69
'70
'71
'72

2.5
9.3
10.5
15.2
12.4
11.4
6.5

0.5
1.8
2.9
4.7
5.6
6.9
5.3

2.0
7.5
7.6
10.5
6.8
4.5
1.2

9.5
12.2
27.1
29.4
27.3
62.7
70.2

26.5%
76.4%
38.6%
51.8%
45.5%
18.2%
9.3%

자료:朴根好 「韓國の 經濟發展とべトナム戰爭」P.42 / 주월한국군사령부「월남전 종합연구」(1974)1142항

 

특히, 베트남으로부터의 送金은 그 상당부분이 貯蓄되어졌는데, 먼저 將兵의 貯蓄을 보면 <표4-12>에 나타난대로 66년부터 72년까지 277억원까지(8,400만 달러)를 저축했고 이金額은 送金 總額(2억달러)의 약 40%에 달하는 것이다. 동기간의 韓國家計의 평균저축율은 9.3%였던 것으로 생각한다면 派越將兵의 貯蓄率의 기여도를 알 수 있다. 또 派越 技術者의 저축을 보면 동기간 送金額의 80%에 달하는 402억원이 貯蓄된 것으로 보여진다. 將兵과 技術者의 저축을 합하면 65년에는 1악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만 66년부터 급속히 증가하여 67년에 93원, 68년에 105억원, 69년에는 152억원으로 최고치에 달하고 있다. 韓國의 家計貯蓄에서 차지하는 將兵ㆍ技術者의 貯蓄額의 점유율을 보면 66년부터 72년의 기간, 연평균 38%이다. 이는 곧 이 기간의 1/3이상은 장병ㆍ기술자에 의한 저축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17)朴根好 「韓國の 經濟發展とべトナム戰爭」御茶の 水書房  p.40

  이로서 1971年度의 國民生活의 수준은 66년 대비 344%가 향상되었으며 派兵期間중 美國의 對韓援助도 삭감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韓國의 自本主義는 냉전을 통하여 外部的인 성장계기를 마련하였다고 말 할 수 있다. 韓國經濟가 획기적인 經濟的 이륙((Take-off)을 할 수 있었던 계기는 두가지였다. 첫재가 베트남파병을 계기로 하여 韓國이 처음으로 참전비용과 동시에 이에 따른 경제적인 베트남진출과 여기에 이어지는 경제적인 해외진출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中東景氣였다. 자유세계 경제체제의 에너원인 석유지대인 中東에 대한 蘇聯의 위협을 전망하면서 자유세계의 中東政策이 급격하게 강화될 때에 韓國의 經濟는 과감히 中東에 進出하여 韓國經濟가 급성장하는 또 하나의 기회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韓國戰爭의 <特別需要>를 통하여 日本의 經濟가 戰後 거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경제적인 부흥의 출발이 된 것과 유사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韓國戰爭을 계기로 하는 日本의 경제적인 特別需要는 美國의 군사물자의 대대적인 발주로 인해 韓國戰爭勃發 1년반도 못되어 戰爭前의 공업지수를 능가하였다는데서 알 수 있는 것이다.   18)朴根好 「韓國の 經濟發展とべトナム戰爭」御茶の 水書房  (1993)

韓國의 오늘의 經濟的인 기적이라고 말하는 經濟的인 근대화의 촉매는 베트남戰爭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베트남에 대한 파병 그 자체에서 획득할 수 있었던 외화는 이어서 파병에 뒤이어 민간주도의 특수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당시의 해외경험이 없던 민간기업의 베트남 進出은 처음으로 시도된 韓國經濟의 대담한「海外進出」이었다. 이는 오늘의 韓國經濟와 經濟的인 근대화의 시발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베트남 派兵 前과 後의 결과는 그 기간동안의 國民總生産의 변화로서 총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표4-13>

베트남전 파병기간동안의 한국경제 지표

 

연   도   별

1   인   당

국민총생산액

수  출  총  액

1963
월남참전 64년 7월 28일
1964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00$

103$
105$
125$
142$
169$
210$
253$
289$
319$
396$

1기준



1.2배


2.1배



약4배

5,029억원

7,163억원
8,075억원
1조 0,370억원
1조 2,812억원
1조 6,529억원
2조 1,553억원
2조 7,884억원
3조 4,191억원
4조 1,935억원
5조 1,775억원

1기준



2.1배


4.3배



11배

8,700만$

1억 1,900만$
1억 7,500만$
2억 5,000만$
3억 2,000만$
4억 5,500만$
6억 2,300만$
8억 3,500만$
10억 6,800만$
16억 2,400만$
32억 2,500만$

1기준



2.9배


7.2배



37배

 * 한국군 월남서 철 수 완료 73. 3. 23.
 * 기업체 및 기술인력 중동으로 진출

1974

541$

5.4배

7조 5,917억원

15배

44억 6,000만$

51배

 1994

 8,483$

 85배

302조 8,670억원

 600배

960억 1,300만$

 1,103배

 자료 : 재정경제원(김일근 조사 제공)

<표4-13>과 같이 참전가간동안 1인당 GNP는 4배, 國民總生産은 11배, 수출액은 37배 증가하였고 94년에는 1인당 GNP 86배 國民總生産額 600배 수출액이 1,103배 증가하였다. 이는 베트남戰 派兵으로 인하여 이전에는 시장이 국내시장으로 제한되어 있던 것이, 派兵이후 해외시장의 지속적 확대가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海外市場의 확대로 인해 종전의 1차산업 생산품이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생산 및 수출로 경제활동의 중심이 옮겨가고 이에따라 GNP는 급격히 성장되어 갔다.

66년 이후 주요 경제지표의 추이는 다음 <표4-14>와 같다.

 

 <표4-14>

韓國經濟 主要指標의 推移(1966~86)

 

 

1966

1976

1986

1.  인구(1,000명)
    (1)총인구
    (2)노동력(경제활동인구)
    (3)부분별 구성(%)         
        농수산 부문
        공공업 부문
        사회간접 및 서비스 부문

2.  총산출량(천만원:1975년불변가격)
    (1)국민총생산
    (2)부분별 구성(%)
        농수산 부문
        공공업 부문
        사회간접 및 서비스 부문
    (3)1인당 국민총생산
        (미국달러 : 1975년 불병가격)

3.  무역구조(백만불:경산 미국달러)
    (1)총수출
        (국민총생산에 대한 비율:%)
    (2)총수입
        (국민총생산에 대한 비율:%)
    (3)상품수출의 구성(%)
        1차 산품
        비 1차산품
    (4)상품수입의 구성(%)
        1차 산품
        비 1차산품 


29,436
9,021

57.9
10.8
31.32


4,378.5

34.4
26.2
45.4
125


35,849
13,016

44.6
21.8
33.5


12,509.1

23.5
28.4
48.1
797

 

 

1966~1976

1976~1986

4.  주요지표의 연간 평균 증가율(%)
    (1)국민총생산
    (2)총인구
    (3)1인당 국민총생산
    (4)노동력(경제활동인구)
    (5)농수산부문 산출량
    (6)광공업부문 산출량
    (7)사회간접 및 서비스부문
    (8)총수출
    (9)총수입


10.50
1.97
8.53
3.65
6.08
13.90
11.07
34.28
25.05


6.04
1.48
4.56
2.10
-1.13
7.35
7.36
15.04
12.81

자료 : 「주요 경제지표」(90년도)경제기획원

 

<표4-14>를 보면 종전의 수입대체국면과 달리 1966년까지에 걸쳐 韓國經濟는 輸出主導局面으로 전환하여 연평균 10.5%의 높은 實質 成長을 이룩하였고 1인당 GNP도 연평균 8.53%로 성장하엿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의 산업구조변동을 대강 보면 농수산부분(1차산업부문)이 國內總生産 및 勞動力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66년에 34.4%이었던 것이 1976년에는 23.5%로 크게감소하였다.

1976년에 와서는 農業人口 및 農業 勞動力의 絶對規模가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광공업 부문은 같은 기간동안에 생산 및 노동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각각 28.4% 및 21.8%로 크게 늘어났다. 광공업부문은 연평균 13.9%의 平均成長率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동안에 製造業部門의 부가가치는 약 6.2배로 크게신장하여 연평균 18.5%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總輸出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966년에 11.9%였던 것이 1976년이는 32.0% 증가하여 연평균 34%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商品輸入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66년에 20.3%였던 것이 1976년에는 34.6%로 크게 늘어나 연평균 25%의 성장을 기록했다. 工産品 輸入比重은 1966년에 80.8%였으나 1976년에는 67.7%로 감소하였다.
  
19)趙誠煥「1965년 이후 한국경제의 성장과정(1965~1986)과 정책 평가」서강대학교 경제대학원 발행 서강경제론집 제20집(1991)P. 227

베트남戰 派兵 이후 韓國經濟의 變遷을 요약 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韓國의 工業化는 초기의 國內市場 指向的인 消費財 輸入代替 成長局面에서 수출의 主種을 이루었던 1次産品의 傳統的 輸出이 점차 단순노동집약적 工産品輸出에 의해서 代替되면서 勞動集約的, 工産品 輸出指向的 성장국면에 돌입했고, 單純勞動集約的 工産品의 輸出이 점차 半숙련, 숙련된 노동집약적인 공산품 수출에 의해서 輸出代替 多樣化 過程을 거치면서 고도 성장으로 지속하였다.

그러나 1970년 후반부터 輸出의 量的擴大와 병행되었던 대규모의 重化學工業化 강행과 뒤이은 실패는 韓國經濟의 성장잠재력과 적응력을 약화시켰다. 산업구조의 조정 개편과 중화학공업 분야의 축소과정을 통해 韓國經濟는 1983년초부터 숙련노동 집약적 자본집약적으로 다산화된 공산품수출에 의해서 주도되는 새로운 고도 성장 국면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20)朴根好 「韓國の 經濟發展とべトナム戰爭」PP.7~8

둘째, 이와 같은 工産品輸出의 지속적인 代替 多樣化 過程에서 성장 능력을 얻어왔던 韓國經濟는 海外市場 및 국제경제 여건의 변동에 크게 영향을 받아왔다. 일차상품이나 단순노동집약적 공산품을 수출했던 공업화초기에는 한국의 총수출량에 비해서 世界市場需要는 매우 컸다.

그러나 그후 韓國政府의 수출확대정책에 따라 工産品輸出의 총량이 급격히 확대되고 특히 수출의 대부분을 이루는 몇가지 품목들이 몇 나라에 국한되어 집중적으로 수출되면서, 또한 선진국 경제와 경합되는 重化學工業部門의기초산업들이 産業保護政策體制에 따라 중점적으로 육성되면서 수출대상국의 정책적 규제와 시장개방압력을 필연적으로 받게 되었다.

따라서 수출품목과 대상국의 다양화가 시급할 뿐만 아니라 수입치제와 완화 철폐, 산업보호정책의 완화, 시장지향적 정책에로의 전환을 필연적으로 강요받고 있다.

이 모든 經濟發展 및 변화의 시발점은 베트남戰 派兵으로 인한 여러 經濟的 效果가 잘 작동한 결과라고 評價된다.

즉, 경제발전 및 변화의 중심을 공업화라는 진행단계에 비추어 볼 때 경제 활동중심의 이동, 즉 1차 산업에서 노동집약적 공산품으로의市場擴大, 技術習得, 自信感 고양 등은 工業化에 필요한 개발자금 확보와 국제 경영 무역활동의 경험과 경영기법 확보가 관건이 되고 베트남戰 派兵은 이것을 가능케 해준 좋은 계기였다.

 

 

Ⅴ.  結                     論

 

 

韓國은 대체적으로 실폐했던 1950년대의 輸入代替 産業化의 경험을 겪은 후에 1960년대 초기에 이른 바 對外指向的 工業化戰略을 채택함으로써 世界市場經濟에 힘차게 뛰어 들었다.

즉, 1964년에 이르러 對外指向的 工業化를 위한 일련의 정책적 기초를 마련하였던 것이며, 이 시기에 世界經濟는 上昇週期였고 베트남 戰爭은 韓國의 經濟發展의 轉機를 마련하였다.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의 총체적인 성과를 정리해 보면
       ① 美國의 軍事ㆍ經濟援助
       ② 駐韓 美軍의 持續的 駐屯
       ③ 베트남 特需로 인한 外化獲得
       ④ 西方 先進國들의 자발적인 借款提供
       ⑤ 建設ㆍ經濟運營ㆍ用役業 分野 技術蓄積
       ⑥ 經濟發展과 國際舞臺에서 韓國位上 格上
       ⑦ 實戰 戰鬪經驗의 蓄積
       ⑧ 國民의 自信感 高揚 등을 들수 있겠다.

그 결과 第 1次 經濟開發 計劃의 파탄에도 불구하고 第 2次 計劃期間에 韓國經濟는 당초 計劃된 7.0%보다 3.5%가 높은 연평균 10.5%의 성장을 기록하였다. 1967년 7.8%, '68년과 '69년에는 각각 12.6%와 15.0%의 높은 성장률을 이룩했는데, 1차산업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제2차산업부분과 3차산업부문이 당초의 목표보다 두배의 성장률을 기록할 수 있었다. 이는 당초의 예상보다 급속히 증가한 外資導入이 이 부문에 집중되었고 당초 19.9%로 목표했던 總投資率은 25.2%의 실적을 나타내었는데 이처럼 투자율이 높아진 것은 5.5%를 計劃했던 海外貯蓄率이 10.7%로 높아진 결과였다. 급속히 증가한 外貨와 높은 海外貯蓄率은 越南參戰과 그에 따른 베트남 特需의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한국의 경제발전은 투자재원의 주종을 외국자본에 의존하였으며이들 외자에 의하여 국내 산업보다는 국내 채취산업의 개발이나 수입대체공업화에 개발의 역점을 둔 것이엇다.

또한 제 2차 계획이 성취한 최대의 성과는 1,132백만 달러에 달한 상품수출로 이는 무역을 통한 경제성장의 가ㅣ능성을 뒷 받침하는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輸出의 劃期的 增大’와  ‘重化學工業의 建設’ 특히輸出 主導型 工業化 體制의 구축을 기본으로 하는 韓國經濟成長은 自生的 成長基盤이 결여된 상태에서의 막대한 外者遊入과 對外指向的 開發을 급속히 추진한 데서 오는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였다는 비판이 있고, 韓國經濟發展은 美國經濟와 日本經濟에 크게 의존하는 특징이 있다.

또한 베트남戰 參戰者중 4,960명의 戰死者와 10,922명의 負傷者라는 直接損失과 枯葉劑에 의한 人的損失 및 戰爭後遺症으로 인한 각종 障碍者ㆍ疾患者ㆍ死傷者 등의 間接損失 등을 볼 때 우리나라의 參戰의 대가는 값진 것이었으며, 이에 대한 歷史의 正當한 評價가 내려지기 위해서는 보다 더 추가적인 심층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 參考文獻과 資料 >

 (國內文獻과 資料)

經濟企劃院

「개발연대의 경제정책」서울 삼성인쇄 주식회사(1982)

經濟企劃院

「주요 경제지표」(1963~1974)

經 濟 白 書

「경제기획원 발행」(1964~1974)

國   防   部

「1977국방예산통계」(1978)

國   防   部

「국방부 통계연보」(1961~1982)

國   防   部

「미국의 대한군사 원조」(1978)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 國防史 제 2집(1987), 제 3집(1990)

國際商社 株式會社「國際商社 30年史」(1949~1979)

김   기   태

「韓國의 베트남戰 參戰과 韓美關係」(1982)

김성환, 김정원, 허버트 P. 빅스 外「1960年代」거름(1983)

金   岩   山

「越南參戰과 韓國의 國家發展」海外 參戰 戰友會發行 韓國의 越南參戰과 歷史的 再照明(1993)

朴   慶   錫

「파월 한국군의 활약과 의의」海外 參戰 戰友會發行 韓國의 越南參戰과 歷史的 再照明(1993)

변   영   태

「외교어족」(한국일보 1959년 간행)

변형윤, 박현채, 전철환, 조  형 外「한국사회의 재인식」한울(1985)

申   英   鎭

「韓國의 越南參電 결정에 관한 硏究」(1993)

李   基   鐸

「월남참전의 역사적 의의」海外 參戰 戰友會發行 韓國의 越南參戰과 歷史的 再照明(1993)

이대근ㆍ정운영 편「韓國資本主義論」까치(1984)

李   勳   燮

「그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샘터(1993)

이   종   훈

「韓國經濟論」(1980)

丁   勇   碩

「한국 朴正熙 政權期(1964~1979)대외 지향적 성장방식에 대한 고찰」동아대학교 부설 사회과학대학 연구소 발행 사회과학이론집 제 9집(1992)

趙   誠   煥

「1965년 이후 한국경제의 성장과정(1965~1986)과 정책 평가」서강대학교 경제대학원 발행 서강경제론집 제 20집(1991)

蔡   命   新

「월남파병을 회상하면서」海外 參戰 戰友會發行 韓國의 越南參戰과 歷史的 再照明(1993)

韓國日報 1972년 2월 5일

홍   성   유

「韓國經濟의 資本蓄積 過程」고려대학교 출판부(1975)

 

 

 

 

 

 

<外國文獻>

 

朴   根   好

「韓國の 經濟發展とべトナム戰爭」 御茶の 水書房」(1993)

 

 

<英  文  記  錄>

  A Study on The Participation in the Vietnam War

and The Development of National Economy

Kwon,  Young-Bae

 

 Department of International Trade
Graduate school of International Trade
Kyungsung University

Advised by Professor Lim, Jong-Woon

ABSTRACT

 

After World War Ⅱ, World divided into capitalism and communism, which resulted from Cold war. Korea is Far East decame a bulwark against communism and acquired a polical, and military aid from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merica participated in the Vietnam War in 1960’s and hoped that Korea would have an important role in that War. As the vietnam War was politically the conflict of liberalism and communism, Korea could be justified about the participation As a result of Korea war, Japan founded economic development, the Vietnam War was an important opportunity of national development.

It resulted in national development In the first place, Korea acquired continuous support about national defence from america and loan from developed country, was used as funds for development. Besides, that made it possible to obtain foreign currency by sending men and enterprises.

That is say, in the latter of the 1960’s, Korea’s participation in the Vietnam War caused the introduction of foreign capital from the developed countries, and through it Korea’economy favorably shifted to loan economy.

Technique introduction like K I S T  openedeyes to Korea’s economic growth potentiality.

Plutocracy like SAMSUNG - HANJIN - HYUNDAI - DAEWOO etc, was formed from this times, and loans paid for the participation had an great influence on up-coming plutocracy’s formation.

Therefore Korea experienced the Vietnam’s special demand and economic advance Also, economic advance to the Middle East made an opportunity of developing Korea’s economy.

The Participation gave rise to negative results such as lots of the dead and injured, and damage from harmful chemicals for removing plants. But it can not be denied that it was main cause of the growht of Korean economy.

I should say that the effect of participation was indispensable in prosperity of Korean economy.

 

 

< 附          錄 >   (김일근 제공)

 

Ⅰ.  越南戰 歷史的 背景

1960.

12.

 

베트남 민족해방전선[N U F : 베트콩]창설/남부 베트남에서 게릴라전 개시

1964.

7.

28

한국지원단 파병[제1 이동 외과병원, 건설공병단]

1965.

3.

 

미해병대 다낭상륙 본격적인 베트남전쟁 시작

1965.

10.

 

한국군 전투부대 참전[청룡, 맹호, 십자성부대]

1966.

9.

28

백마부대 참전

1969.

1.

 

제 1회 확대 파리 평화회담

1969.

6.

 

해방전선 베트남공화국 임시혁명정부 수립

1969.

9.

3

호치민 사망

1973.

1.

27

파리협정 조인

1973.

3.

23

한국군 월남에서 철수완료

1975.

4.

30

사이공 함락

 

 

 

※ 참전 연인원 312,853명

 

Ⅱ.

 韓國軍 派兵決定

 

1.

형식적인 절차 :

 

 

1)

월남공화국의 파병요청

 

 

2)

미국의 참전요청

 

 

3)

국회 44, 77, 52, 55회 정부 파병동의안 가결

 

 

 

 

 

2.

간접적인 동기

 

 

1)

한ㆍ미 공동방위조약의 쌍무협정 성격으로 미국의 참전에는 한국도 참전의무

 

 

2)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는 세계평화에 위협과 북한을 고무

 

 

3)

6ㆍ25전쟁시 참전 우방에 대한 보상적 도리

 

 

 

 

 

3.

직접적인 동기

 

 

1)

한국군의 참전불가시의 미국의 동태

 

 

 

주한미군 2개사단을 철수하여 월남전에 투입 → 사실상 미군 철수

 

 

 

군사원조의 중단[규모 한국 GNP의 약 30%점유]

 

 

 

미군철 수는 남침기회를 제공하고 군원중단은 한국경제의 파탄을 야기

 

 

2)

한국군 전력증강 기회

 

 

 

2개 예비사단의 정규 사단화

 

 

 

국군무기에 현대화[북한의 1/3수준]

 

 

 

실전경험 축적으로 효율적인 국토방위와 안전유지

 

 

3)

한국경제의 침체에서 탎할 수 있는 기회  

 

 

 

참전시 국내기업체의 진출과 군수품 등 수출입국의 기회

 

 

 

중공업 등 경제개발계획에 의한 막대한 자금조달 필요[외국차관도 불가능]

 

 

 

 

Ⅲ.

韓國軍의 越南戰 參戰의 利得  

 

1.

국방력의 증강으로 국내정세 안정  

 

 

1)

국군장비의 현대화  

 

 

2)

실전에 의한 전투경험축적과 전술교리 개발  
※북한의 적화야욕 예방으로 정세안정과 지속적인 경제개발 가능

 

2.

기업체의 진출로 고용증대와 기술습득 및 중동진출의 기반조성과 군수품 국내조달로 수출기반조성과 월남전 특수호황  

 

 

1)

'63년도 1인당 GNP 100$ → '73년도 396$ 약 4배

 

 

2)

'63년도 수출고 8천7백만불 → '73년도 32억2천5백만불 약 7배  ※중동진출인원 20만명

 

3.

경제개발계획의 성공과 발전의 가속화

 

 

1)

군인 및 기술자의 급여 등 외화획득 24억$

 

 

2)

11개국 차관의 자진공여

 

 

3)

국방비 부담액 경감[국민소득의 30%]을 경제개발에 투입    ※경부고속도로, 포항종합제철 등 건설

 

 

 

 

Ⅳ.

越南戰 韓國軍 被害  

 

1.

전사자 : 4,960명

 

2.

부상자 : 10,922명

 

3.

고엽제 피해자  ※ 이 자료는 환자 발생 여부에 따라 변동 있음.

 

 

후유증 :      24,013명

 

 

후유(의)증 : 63,563명

 

 

비대상 :      35,867명

 

 

미   결 :        4,600명

 

 

 

Ⅴ.

브라운 覺書

대한민국 서울
1966년 3월 4일

李    東    元  외무부장관 각하

   각하께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월남공화국 정부로부터 월남공화국에 대한 한국전투부대의 증파에 관한 요청을 접수하였다고 본인에게 통지하였습니다.
   각하께서는 도한 귀국 정부가 대한민국의 헌법절차에 의거하여 국회의 승인을 받는 대로 1개연대 전투단을 4월에 도착시키고 1개사단병력을 7월에 도착시키기 시작하는 내용으로 요청받은 원조를 월남공화국 정부에 제공하기로 결정 하였다고 진술하였습니다.

본인은 대한민국 정부가 월남전선을 한국의 안전과 직결된 대한민국의 제2전선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대한민국의 결정이 취하여진 것이라는 귀하의 설명을 유의 하였습니다.

본인의 정부는 월남에서 싸우고 있는 자유세계의 군대에 대하여 이미 고도로 효과적인  기여를 증거하려는 귀국정부의 결정을 충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본인은 대한민국의 안전과 발전에 있어서의 우리의 공동이익에 비추어 합중국은 한국방위의 안전이 유지되고 강화되며 또한 한국의 경제적 발전이 더욱 증진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릴 권한을 부여 받았습니다.
 

 

 

가.

군수협조

 

 

(1)

한국에 있는 대한민국 국군의 현대화 게획을 위하여 앞으로 수년 동안에 상당량의 장비를 제공한다.

 

 

(2)

월남공화국에 파견되는 추가병력에 필요한 장비를 제공하며 또한 파월 추가병력에 따르는 일체의 추가적 원화 경비를 부담한다.

 

 

(3)

월남공화국에 파견되는 추가병력을 완전대치하는 보충병력을 장비하고 훈련하는 소요 재정을 부담한다.

 

 

(4)

대한민국이 대간첩활동 능력을 지원하기 위하여 한ㆍ미 합동연구 결과에 따라 양국 정부에 의하여 필요하다고 결정되는 요구를 충족 시키는데 기여한다.

 

 

(5)

대한민국에서 탄약생산을 증가하기 위하여 병기창 확대시설을 제공한다.

 

 

(6)

대한민국 측 전용 통신시설을 제공할 것이며, 그 시설은 서울과 사이공에 있는 합중국 및 대한민국의 관계관에 의하여 합의될 것이다. 본 시설은 월남공화국 주둔 대한민국 부대와의 통신을 위한 요구를 충적할 것이다.

 

 

(7)

파월 대한민국 부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대한민국 공군에 C-54 항공기 4대를 제공한다.

 

 

(8)

막사 및 독신장교 취사, 식당 위생 및 오락시설 등 부대복지를 위한 제관련 시설을 개선하는데 필요한 재원을 군사원조계획 잉여물자의 매각대금에서 제공한다.

 

 

(9)

파월 한국군 전원에 대하여 1966년 3월4일 비치 장군 및 김성은 국방장관 간에 합의된 율에 따라 해외 근무수당을 부담한다.

 

 

(10)

월남에서 발생하는 전사상자에 대하여 최근 한ㆍ미 합동 군사위원회에서 합의된액수의 3배의 지불로 보상금을 지불한다.

 

나.

경제협조

 

 

(1)

이러한 추구병력이 월남국내에서 1개예비사단, 1개 예비여단 및 지원부대를 동원 유지함에 소요되는 순 추가비용의 전액과 동액의 추가 원화를  한국 예산을 위하여 방출한다.

 

 

(2)

상당수의 대한민국 병력 즉 최소한 2개사단 병력이 월남공화국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에는 군원 이관을 중지하며 동시에 1967 미(美)회계년도에는 1966 미 회계년도에 품목과 아울러 1967 미 회계년도 계획표에 있는 품목을 한국에서 조달한다.

 

 

(3)

파월 대한민국 부대에 소요되는 보급물자 용역 및 장비를 실행할 수 있는 한도까지 대한민국에서 구매하며 파월 미군과 월남군을 위한 물자중 결정된 구매 품목을 한국에 발주한다.

 

 

 

(가)

그 경우 다음과 같다.

 

 

 

 

1)

한국에 생산능력이 있을 경우

 

 

 

 

2)

한국이 규격과 납품 예정기일을 맞출 수 있을 경우.

 

 

 

 

3)

한국의 물품 가격이 극동의 기타 공급가능지 가격과 비등하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경우.

 

 

 

 

4)

기타 점에 있어서 구매가 합중국 국방성의 규정과 절차에 부합 할 경우 상기 경우에 배당되는 보급물자, 용역 및 장비는 자연 공급처가 표에 기재될 것이며 그 표에 의하여 비 한국생산자의 입찰을 배제하고 한국 공급처 안에 국한하여 구매할 것이다.

 

 

 

 

 

가)

합중국의 공급업자들과만 경쟁하는 원칙하에 AID가 월남공화국에서 농촌건설사업, 선무, 구호, 보급등의 사업을 위한 계획사업에 사용할 목적으로 구매하는 물자의 상당한 양을 한국이 적시 및 적가로 공급할 수 최대한까지 한국에서 구매한다.

 

 

 

 

 

나)

월남공화국에 의하여 허가되는 범위내에서 한국청부업자들이 합중국정부 및 미국청부업자들이 월남공화국에 있어서의 한국인 민간 기술자 고용을 포함하여 기타 용역을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한다.

 

 

(4)

수출진흥의 전반부문에 있어서 대한민국에 대한 기술협조를 강화한다.

 

 

(5)

1965년 5월 대한민국에 대하여 이미 약속한 바 있는 $1억5천만 차관에 추가하여 합중국 정부는 적절한 사업이 개발됨에 따라 $1억5천만 약속에 적용되는 동일한 정신을 위하여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추가 차관을 제공한다.

 

 

(6)

1966년도 재정안정계획의 시행결과에 따라 적당한 경우 월남공화국에 대한 수출의 지원 및 기타 개발목적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1천5백만의 프로그램 론을 1966년중에 제공한다.

각하에게 본인의 최대 경의를 표하면서 : 대한민국 주재 미국대사  원드롭 G. 브라운

 

 

 

 

 

 

 

Ⅵ.

韓ㆍ美 經理實務 約定書

 

 

제 1 부   총           칙

 

제1조

군사실무약정관계

 

 

본 경리약정은 1965. 9. 6일부터 주월한국군사령부(ROKF-V) 및 주월미군사원조 사령부 (UNMAC-V)간에 체결한 군사실무 약정 제 12항에 의거 주월미군사원조 사령부가 주월한국군에 제공한 경리지원 형태를 규정한 것임.

 

제2조

종전 경리실무약정과의 관계

 

 

본 경리 약정은 주월한국군사원조단, 한국군 이동외과병원, 한국 해군 수송부대 및 태권도 교관단 등에 대하여 주월한국군 및 주월미군사원조 사령부간에 체결한 모든 종전 경리실무약정과 대치한다.

 

제3조

경리 실무약정의 변경

 

 

본 약정에 서명한 어느측이든 상대방에게 서명후 90일전에 통고하여 본 경리 실무약정에 대한 상의를 개시하고 토의한 결과에 따라 변경을 가할 수 있도록 요청할 수 있다.

 

 

 

 제 2 부 직접경리지원

 

제1조

급      식

 

 

주월한국군에 대한 급식은 1965년 9월 6일부 주월한국군사령부 및 주월미군사원조 사령부 간에 체결한 군사실무약정 조항에 의거 지급되는 군량의 종류 및 가능성에 따라 1일 1인당 $1.05부터 $2.04범위의 $액 기준한도 내에서 지원된다.
상기 정액은 미군에 적용되는 부식비가 변경될 때에는 자동적으로 변경되는 대상이 된다.주월 한국군의 요청과 미군사원조 사령부간의 동의에 따라 미측에서 지급되는 군량을 보충하기 위하여 현지 구매를 할 수 있도록 피아스타 현금을 지불할 수 있다. 피아스타 현금에 의한 식량 구매는 위에 명시한 1일 1인당 기준 적용 범위내에서 할 수 있다.
주월한국군이 선택한 바에 따라 주월한국군 군량을 추가하기 위하여 월남공화국에 의하여 제공되는 급식품목에 대한 $상당액도 위에 명시한 기준 범위내에서 지급받는다.

 

제2조

월남국 내외에서의 출장

 

 

주월한국군 요원의 출장이 주월한국군 사령관에 의하여 승인되고 주월미군사원조 사령관이 이를 확인하면 미국 합동여행규정 및 주월미군사원조 사령부 지시에 의하여 수송편관 일당을 지급받게 된다. 출장명령 신청은 주월한국군 부대 자체에서 처리된다.
출장 여행을 위한 자급소요는 주월한국군 사령관 및 주월미군사원조 사령관에 의하여 합동으로 결정된다.경리관계 서류는 출장여행에 사용될 가용자금을 명시하기 위하여 분기별로 주월미군사원조 사령관이 주월한국군 사령관에게 통고한다.

 

제3조

전속여행

 

 

주월미군사원조 사령관은 개인별 기준에 의하여 월남으로 그리고 월남으로부터의 전속시 항공여행을 위한 일당과 수송비용을 부담한다. 일당을 지급해야할 여부는 주월미군사원조 사령관이 결정한다. 통상적으로 항공여행사는 미군사 항공수송기관 또는 기타 군사 항공편을 이용하게 된다.
한국으로부터 월남까지의 여행신청은 주한합동군사원조단에 제출괴어야 한다.

 

제4조

주요부대-소액 현지구매

 

 

주월미군사원조 사령관은 인가된 보급품이 긴급히 필요하거나 또는 군사실무약정에 명ㅅ한 보급계통을 통해서 통상적으로 구득할 수 없는 경우의 주요부대 및 소약현지구매를 위한 조달을 위하여 비용을 지원한다.
주월한국군 사령관의 요청에 의거 월남정부 피아스타 지불을 위하여 주월한국군 주요 부대에 AIK소액자금 현금출납관을 설치할 수 있다. 미국 영달자금과 관계가 있는 현지구매가 요구될 때는 미국 구매 및 계약기관을 통해서 구매가이루어져야 한다.
소액 현지구매 자금소요는 주월한국군사령관 및 주월미군사원조사령관이 결정한다. 소액 현지구매에 사용될 자금 한도를 표시한 경리관계 서류는 분기별로 주월미군사원조사령관이 주월한국군사령관에게 통보한다.
소액 현지구매에 대한 증빙서류의 구비는 최대한으로 가능한 범위내에서 주월한국군 자체내에서 처리되어야 한다.

 

제5조

계        약

 

 

주월한국군을 지원하는 모든 $화 계약은 미국 구매 및 계약장교를 통하여 실시한다.

 

제6조

특별활동 비용

 

 

주월미군사원조사령관은 심리전활동 정보활동 및 주월한국군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결정된 기타 적합한 활동과 같은 특별활동비를 지원한다. 자금소요는 주월한국군사령관 및 미군사원조사령관이 공동으로 결정헌다. 특별활동에 사용될 자금 가용한도액을 표시한 경리관계 서류는 분기별로 주월미군사원조사령관이 주월한국군사령관에게 통보한다.

 

제7조

현지 민간인

 

 

현지 민간인 고용경비는 주월미군사원조 사령관이 이를 담당한다.
민간인 소요는 주월한국군사령관 및 주월미군사원조 사령관이 공동으로 결정한다. 공동으로 결정한 민간인 소요는 고용을 하기전에 현지 민간인 T/O사의 인가 인원수로 전환된다.

 

 

 

제 3 부   화폐지원 및 재정관리

 

제1조

현금망실

 

 

주월군사원조사령관은 전투 또는 기타 불가피한 사유로 인한 현금망실을 보전하는 어떤 정당한 제도를 마련한다.(이 조항은 관계 미국기관과의 토의후 자세히 발전된다)

 

제2조

화폐사의 특권

 

 

주월한국군 요원은 미군에게 사용되고 있는 조건과 동리하게 미군표의 사용이 허용된다. 주월한국군이 보유하고 있는 공식 $화표시 유가증권은 주월한국군사령관의 요청에 의하여 지정된 미군 군사지출기관에서 군표로 환금할 수 있다.

 

제3조

주월한국군사령부 및 주월미군사원조사령부 재정관리 대표.
주월한국군사령부 관리부장 및 주월미군사원조사령부 관리부장은 양 사령부 간에 야기되는 모든 재정관리문제 해결을 위하여 각각 재정관리 대표로서 임명된다.

 

제4조

재정감독의 책임

 

 

주월한국군사령관은 본 협정에 명시된 지급정액 또는 가용자금을 초과사용 혹은 불명한 목적에 사용하지 않도록 하는 책임을 갖는다.
본 협정에 의거 지급되는 모든 가용자금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세심한 주의를 하여야 한다.
본 협정은 1965년 12월 15일에서 서명되었음

 

 

 

 

 

 

 

 

 

한국육군 준장       이      훈      섭

미육군소장    W.   B.   Rosson

 

 

 

주월한국군사령부     참모장      

주월미군사원조사령부    참모장

 

 

 

 


  감   사   의   말   씀

적지 않은 나이에 학문의 연구는 정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도록 지도편달을 아끼지 않으신 박수이 교수님, 곽무섭 교수님, 김석천 교수님, 오용석 교수님, 권   용 교수님께 감사드리오며 특히 본 논문의 시작부터 끝가지 지도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임종운 지도교수님게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논문 연구기간동안 많은 자료수집을 위해 갖가지 어려운 여건을 마다하지 않고 수차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김수영 형님, 김일근 형님, 그리고 김용선, 정두성, 이재호씨와 동생 권영욱의 고마움은 정말 잊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오늘이 있기까지 시간적으로 많은 배려와 격려를 아끼지 않은 부대장님이신 고재호 대령님과 홍성균 대령님, 손기중 중령님, 이남영 중령님, 그리고 근무를 함께 하고 있는 모든분들께 그 간의 배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를 친동생처럼 돌보아주신 강이규 형님과 홍창식 형님, 김영수 형님, 길중수 형님 등 임관 동기분뜰게도 감사드리며 대학원에서 함께 생활해온 선 후배와 뜻을 같이 했던 동료들과의 인간관계가 추억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 나이가 되어 공부하는 아들을 보실 때마다 예전에 공부를 다 시키지 못했음을 자기의 죄인양 가슴아파 하시며 고생만 하여 오신 저의 어머님과 건강을 해칠까봐 여러 가지로 마음써 주고 정성을 다하여 보살펴 준 사랑하는 나의 아내 그리고 성실하며 효성이 지극한 장녀 수정이, 믿음직하고 과묵한 장남 상호와 형님, 누나, 동생들 모두에게 감사드리며 이 모든분들께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1996.  2.

권    영    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