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베트남 전쟁의 특수성과 민간인 피해의 진상

 

4 .  베트남 참전군인에 대한 당국의 미해결 과제

<목    차>

(1)베트남 참전군인에 대한 용병 및 양민학살    시비종결

 1)소모적인 자가비하, 이제 그만

 2)현실적 대응전략의 모색

(2)베트남의 대외정책 특히 대미관계에
    부응하는 우리의 입장정립

(3)베트남전쟁 철저 연구 및 시행착오의
    비판적 수용

 1)정직하지 못한 일부의 전과 및 피해보고

 2)비교전자에 대한 무공훈장 수여

(4)고엽제 피해자를 위한 합당한 대책마련

 1)베트남전쟁의 실제 희생자들

 2)고엽제 후유증 및 후유의증 환자의 요구

 

   (1)베트남 참전군인에 대한 용병 및 양민학살 시비 종결

 

    1)소모적인 자기 비하, 이제 그만

 

 1975년 3월 베트남의 패망으로 10여 년간 지속된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패배로 끝난지도 벌써 4반세기가 지났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을 주도했던 미국에서는 아직도 베트남전쟁의 개입과 전쟁수행 과정에 대한 전당성과 합리성  시비 논란이 계속되고 있으며 미
군의 10% 전도에 해당하는 병력을 베트남전쟁에 파병 유지했으며
8년여의 전쟁기간 중 미군과 거의 동률의 전사상자를 감수해야 했던 주월 한국군을 폄하하여 용병이라고 몰아부치고 베트남 전쟁의성격과 특수성을 전제할 때 불가항력적으로 발생 가능한 일부대민

피해를 양민학살이라는 굴레를 씌워 범죄 집단시하는 친북 이적 단체들이 특히 6.15선언이후 그 기세를 올리고 있음은 물론, 국군의 존립가치와 위상에 심각한 흠집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앞장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국군이 베트남에 참전한 그 당시 한국국내에 있는 모든 전투작전 부대는 전평시를 막론하고 주한미군 사령관 겸 유엔군 사령관의 작전통제를 받고 있었지만 한국 국방부의 독자적인 행정 및 작전지휘를 받도록 제도화되어 있었으며 주월 미군과는 수평적인 협력관계에 있었으며 종속적인 배속이나 작전통제 관계에 있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단지 미군으로부터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제한된 군수지원과 우리가 갖지 못한 항공·함포지원이나 수송 지원을 받으면서 상호간에 전투정보 교환과 작전계획의 협조 및 협동을 도모한 연합군 체제였다. 그러나 우리와는 달리 남베트남군은 대대급까지 주월 미군의 각급 사령부에서 파견된 고문관에 의해 모든 전투작전의 계획 및 실행을 실질적으로 지휘통제 받는 수직적 종속관계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주월 한국군을 돈받고 팔려간 용병이라고 하는 것은 후안무치한 일이다.

그러면 이와 관련하여 베트남 양민학살 시비의 본질을 살펴본다. 전쟁당시 자유진영의 우방국이고 우리의 피지원국으로서 피해 당사자였던 남베트남은 전쟁종식과 함께 국가주권이 소멸되어 버리면서 북베트남에 의해 사회주의 국가로 흡수통일된 것이다.

현 시점에서 역사적으로 볼 때, 통일베트남은 수세기에 걸쳐서 중국, 프랑스, 일본,미국 등 외세와 결사항쟁하여 민족자존을 지켜 온 과정에서 자국민이 당하였던 엄청난 피해를 인식하지만, 전쟁이란 불가항력적인 무차별 폭력행사로 말미암아 빚어진 피로 점철된 외세에 의해 입은 민족적 상흔을 일일이 다 따져 시비를 가린다는 것은 국제법적으로나 국제정치적으로 불가능하며 국가 이익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한 나머지 가해국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체념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이 오늘날 국제정치에 있어서 양육강식의 권력정치 속성이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의 양민학살 문제가 제기된 노근리 사건을 매듭 짓는 양국의 합의문에서 "민주주의의 가치실현과 인권의 중요성 인식을 통한 한·미 간의 유대강화에 기여한다"는 한 차원 높은 대의 명분을 쌍방이 수용하였다. 그리고 사건당시 피난민 대열에 혼재한 적군의 정확한 선별이 어려웠으며 전차를 앞세운 적군의 진격에 중과부족으로 후퇴 중이던 미군으로서 자위책의 일환으로 행하여진 항공 폭격과 지상포화 및 지상군의 대응사격으로 불가피하게 민간인 피해가 야기된 것은  인정하지만 이것이 의도적 사살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피해자측에서 제기한 양민학살이라는 용어는 합당치 않음으로 이를 양 당사국이 언급하지 않고 있음이다.

현재 베트남전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차원이 아닌 정치선전공세 이주의 공통된 논조는 다음 3가지로 집약하겠다.

첫째, 베트남에 파병된 국군은 독재자 박정희의 대미 신뢰획득과 정권 안보를 위한 도구로서 오용되었으며 미국의 강압에 못 이겨 저렴한 피의 대가로 팔려가 미국의 종속 고용된 용병이었다. 주월 한국군 파병이 한국의 국익과 경제발전에 기여한 바가 별로 없다.

둘째, 주월 한국군은 독자적인 작전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던 바, 미군에게 종속되어 그 주구 노릇을 하면서 주로 비 전투 기간중에 공공연하게 의도적 집단양민학살을 일삼았다.

셋째, 양민학살은 베트남전쟁의 특수성을 내세운 상황논리로 면죄부를 받을 수 없으며 국제법상 전쟁범죄 소멸시효가 아직도 살아있는 바 가해 국가가 솔선수범하여 진상을 규명해 피해국가의 도덕적 사과와 보상을 함으로서 한국군의 명예회복이 가능하다.
 

     < 표1>'한겨레21'이 보도한 한국군 양민학살 기사제목 (2000. 10. 30.현재)

01.  인권운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동권제325호,1998. 6.발행)

02.  이 작은 불씨가 햇불이 되길(325호)

03.  푸엔성 병원건립 공동추진위원회 학정(325호)

04.  용기있는 고백 그 뒤…9325호)

05.  전사의 일기장, 30년만에 공개되다.(325호)

06.  하필 경찰관 부인을 살려 보내…(324호)

07.  그것은 미친 짓이었다.(324호)

08.  도의적으로 합당한 일.(323호)

09.  진정한 명예를 위한 긴급제안(323호)

10.  그 눈부시도록 빛나는 양심.(322호)

11.  죄의식이 평생을 따라 다녔다.(321호)

12.  미국선 참전군인들 평화운동 활발.(320호)

13.  박정희 신전이 부끄러워라.(319호)

14.  정말 미안해요 베트남(317호)

15.  진실은 전복될 수 없습니다.(317호)

16.  아주 특별한 사죄의 무대.(316호)

17.  푸엔성에 병원을 짓겠습니다.(314호)

18.  우리를 전율케 하는 것들.(313호)

19.  피 흘리는 아시아는 이제 그만.(314호)

20.  땅굴의 악몽을 지울 수가 있을까(313호)외 281호까지 소급한다면 1998년
      부터 2001년까지 3년여간에 걸쳐 총 55회를 연재함.

(자료 출처:webmaster@news.hani.co.kr)

그리고 이를 적극 지원하고 대변자 역할을 하는 언론매체가 바로 한겨레신문이고 특히 동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월간지인 '한겨레21'은 <표-1>에서 보듯이 지난 3년간 무려55회에 걸쳐 베트남 전쟁 양민학살보도를 내 보낸 바 있다. 그런데 이 보도기사는 구수정이라는 한 운동권 출신의 통신원이 베트남에서 역사학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 현지에서 입수한 자료인데 주로 전직 베트콩 간부들이나 정서적인 동료집단(peer group)으로부터 수집한 검정되지 않은 정보를 언론사가 넘겨 받아 이를 금과옥조로 믿고 픽션처럼 각색하여 만든 가공적인 내용이 바로 '한겨레21'과 한겨레신문에 보도된 문제의 글인 것이다.

이에 대해 참전군인들은 물론 당국은 은인 자중하되 국군을 폄하하는 이들 이적 단체와 어론매체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기 위한 스스로의 정당성 그리고 논리성을 갖추어 무장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울러 당국은 이들 불순세력에 대하여 현행법에 의한 법적 제도적 규제와 제재는 물론, 정부는 참전군인의 전투 간 대민 피해에 대한 개연성은 인정하되 비 전투기간중의 의도적 조직적  집단 양민학살을 자행한 사실이 결코 없음을 온 국민이 납득 인정할 수 있도록 유권적 해석의 상황 설명과 함께 공식적으로 문서와 영상매체를 통하여 전 국민에게 공포해야 할 것이다.


◇베트남 공산화 이후 시가를 점령한 월맹군의 탱크

역사적으로 근세사에 자행된 집단적 양민학살이라고 한다면 제2차대전시에 나치 독일에 의한 유태인 500만명 살육, 러시아 혁명후 스탈린이 1,500만명의 민간인을 혁명의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처형,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북한 당국에 의하여 끌려 가거나 전장이나 수용소에서 처형된 수 미상의 민간인, 중국의 문화혁명시 희생당한 85만명, 우간다의 아민 대통령을 반대하다 처형된 50만명,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서 학살당한 민간인 250만명, 베트남의 공산화된 다음 처형당한 200만명, 아프카니스탄의 정권 반대로 처형된 100만명 등이 대표적인 양민학살 사례인데 전쟁중 전장에서 처형한 경우는 소수이고 대부분 정치적 목적달성을 위해 후방지역이나 전후에 집단 살육한 것이었다.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소 규모의 장단기 전쟁중에 피아간의 교전상황에서 사망한 민간인은 군인의 숫자를 초월한다. 그러나 이를 양민학살이라고 무조건 몰아부친 역사기록은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민간인 피해라고 집계할 따름이다.

       2) 현실적 대응전략의 모색

용병과 양민학살의 문제는 사실의 규명도 중요하지만(이를 주장하는 자들은 사실을 입증 못하고 현상을 잘못 이해하고 있음) 국내외 언론에 의해 대서 특필로 보도되고 일부 시민단체에 의해 쟁점으로 부각됨으로서 군은 물론 참전자와 그 가족에게 심각한 타격과 불 이익을 주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국가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국가와 군의 실추된 위신을 되찾고 참전자와 그 가족의 권익을 증진하면서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기본권도 향유하는 방향으로 현실적인 최적 처방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전항에서 지적한 바 있지만 국군의 베트남전쟁에서의 대민피해는 국제법적으로 양민학살의 범주에 속하지 않으며 양민학살이 사실로 입증되지 않는 한 처벌이나 보상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단지 인도적이고 도덕인 문제로 접근한다해도 이 문제의 확대를 원하지 않는 다는 공식입장을 표명한 베트남 정부에 대하여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특히 베트남 전쟁의 특수성과 관련하여 베트남 역시 공산정권의 수립과정에서 해방전쟁을 치른 이상 개인의 희생을 강요했으며 반체제 분자를 무자비하게 숙청한 장본인인 이상 이미 지구상에서 그 이름이 소멸되고 없는 베트남정부 존립시에 야기된 문제를 체제와 제도 그리고 가치관이 달라진 현실에서 도덕적 인권과 관련되는 사안을 자유의지에  따라 처리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함을 안다면 우리나라의 일부 언론과 동조세력이 제기하고 있는 과거사 반추가 결코 베트남에게 고마울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쟁당시엔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은 한국군이나 미군이 적이었으며 한국군이나 미군이 베트남의 주민에게 입힌 피해 못지 않게 그들이 적대적인 남베트남정부 통제하의 동족에게도 엄청난 희생을 강요했던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들이 자행한 대민피해를 사실규명 과정에서 미군이나 한국군의 소행으로 본의 아니게 전가하려 할 때 더 큰 국제문제로 비화될 개연성을 안고 있음을 그들 스스로가 예상하기 때문에 혹 떼려다 혹 부치는 불이익이 자업자득으로 초래될까봐서라도 이 민감한 사안을 냉각 회피하면서 관용과 인내를 보이고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 정부가 취해야 할 몇 가지 대응 전략을 생각해 본다.

첫째, 양국정부의 양해에 의한 공식적인 종결선언.

이는 구태여 쌍방의 잘 잘못을 따지고 책임소재를 규명하는 등 비 생산적인 노력을 일체 배제하고 무조건 과거사가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상처였음을 시인하고 미래지향적으로 협력 발전할 것을 다짐하는 내용을 외교적 절차에 따라 공동성명으로 양국 정상회담을 통해 발표하는 순수를 밟으면 가할 것이다.

이는 그 시기가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현재 같이 어정쩡한 상태로 서로 눈치를 살피는 불편한 관계를 청산하고 수난의 역사와 미곡 및 한문문화권의 동질성을 지닌 민족으로서 새로운 화합의 계기를 마련함으로서 대승적인 관계개선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비록 국가발전 수준이나 국력으로 봐 우리보다 한수 밑이지만 인구가 남북한과 해외동포를 합한 수 보다 더 많은 8천5백만을 상회하며 국토 면적도 한반도보다 훨씬 넓고 석유를 비롯한 천연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비교적 발전 잠재력이 있는 유망한 미래 시장인 바, 베트남에 진출한 다수의 우리 기업들이 활력을 찾도록 해주는  차원에서라도 서둘러야 할 것이다.

둘째, 언론 및 시민단체 순화(馴化)

금번 월드컵 4강 성취 과정에서 대-한민국을 외쳤던 500만 시민들의 함성이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재확인 표출한 것이지 붉은 깃발이 상징인 공산주의를 지지한다는 표현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신세계질서의 3대 공유가치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협력적 안보를 승화 발전시켜 선진 민주 복지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국민적 결의의 다짐일 수 있다. 이는 친북, 용공, 좌경, 반미, 반군 사상을 가진 반국가적 반체제적 시민단체나 언론을 국민의 정서상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 다는 가치설정이며 우려했던 대한민국의 정체성 위기극복의 청신호이기도 하다.

국민의 기본권인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해주는 언론의 자유는 매우 소중한 민주주의의 척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 거짓을 사실인양 왜곡 굴절 보도하거나 진실 확인도 없이 이를 학원가나 신세대에 증폭 확산 전파하는 소행은 언론의 자유를 창달하기 보다는 저해하는 악성 바이러스 같은 존재로서 만인의 공적이다.

한국과 베트남 양정부가 문제의 종결선언을 한 다음에도 언론과 시민단체들이 소영웅주의에 젖어 국가 안보와 국가 이익에 배치되는 문제제기에 의한 정치쟁점화의 반복적 악순환을 자행하지 못하도록 당국은 이들을 설득 이해시키고 끝가지 순응치 않을 경우엔 제도적 장치에 의한 물리적 강제력 행사도 최후의 수단으로 국가 안보적 차원에서 준엄하게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들을 변화 시키려면 무엇보다도 순화를 전제한 단계적 계도와 교육훈련이 필요할 것이며 특히 참전 전상자와 고엽제 피해자들이 처한 비참한 실상을 이른 바 민주 유공자들에게도 진솔하게 알려 줌으로서 스스로가 정략적인 보상 및 우대책에 의한 떳떳하지 못한 수혜자임을 깨닫고 부끄러워 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진정한 언론은 사회의 목탁이란 본연의 사명의식을 갖고서 불특정 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하여 이러한 비뚤어진 것을 바로 잡도록 공정하고 객관적인 그리고 적시적인 보도를 함으로서 개방과 이해 그리고 경청이란 커뮤니케이션의 대 원칙을 지키면서 언론자유를 올바르게 향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셋째, 베트남 참전 단체의 통합 단일화

이 같은 베트남 참전군인에 대한 국가의 푸대접과 더불어 초래된 일부 국민의 냉소적 시각을 더욱 왜곡시키는 자업자득의 요인이 있다. 다름이 아니라 베트남참전단체의 난립과 상호 대립 및 불화관계 조성 분위기라고 하겠다. 현재 중앙과 지방에 20여개의 법인체 또는 임의 시민단체로 난립되어 있는 이들 베트남 참전 유관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던지 이를 동할 관장하는 중앙 단일기구가 설립되어야 한다는 데는 모두가 공감한다. 그리하여 이 통합기구는 베트남 참전자의 명예회복과 고충처리를 주도하는 대 정부 단일 창구의 역할을 하면서 참전전우들 특히 고엽제 후유증 및 의증환자들의 권익 신장과 지원을 위한 강력한 대 국민  대 정부 호소와 설득을 담당할 수 있는 공신력과 위상을 갖춘 비정치 공익 단체가 되어야 할 것이란 것이 이들 참전전우들의 한결같은 바램이다.

불행 중 다행히 2001년 초에 이러한 취지에 따라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과 전 국방부 장관이며 현 재향군인회 회장인 이상훈 장군이 주축이 되어 다수의 참전단체 대표들과 관련 인사들이 베트남참전단체의 단일화 내지 통합조직 창출을 위한 작업을 재향군인회를 중심으로 하여 현재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있어 늦어도 최단 시간 내에 소망스러운 결실이 가능하리라 본다.

이는 6.25 참전단체들이 난립해 있다가 하나로 뭉쳐진 선례를 교훈삼아 무리 없이 이뤄질 것으로 전우들 모두가 기대를 갖게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용병이니 양민학살이니 하는 천추의 한이 되는 불명예를 씻고 천지신명과 국가와 민족 그리고 자기 가족에게 떳떳한 위상을 회복함은 물론 고엽제 피해자들은 베트남 참전자로서 국가로부터 응분의 희생대가를 받기 원하는 제반요구를 수렴 반영할 수 있는 대변자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단법인의 비영리 비정치 공익 단체로서 참전전우들의 복리를 증진하고 권익을 향상하는데 봉사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 따라서 이조직을 설립하는데 허가하는 중앙관서인 국가 보훈처는 다수의 유사명칭 단체를 엄정심사하여 옥석을 가린 연후에 서둘러 큰 하나가 되기위한 법인체 설립 여건을 갖추게 하여 뒷받침해주고 설립허가와 동시에 법원에 등기절차를 속히 필하여 공신력을 확보토록 적극적으로 행정 절차를 지도 조력해 줘야 할 것이다.

베트남 참전전우회가 단일화되고 재정비 강화될 경우 정부의 문제 종결선언에 발맞춰 다수의 참전노병들이 베트남으로 민간교류 여행을 갈 수 있도록 정부에서 보조해 줌으로써 옛 전적지를 답사하고 주민들과 우의를 돈독히 하는 한편 진정한 화해를 나누게 함으로서 양국국민의 우정어린 감정교류가 민간차원에서 무리없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국민화합과 국제우의 증진을 위해 대북지원의 10%만이라도 베트남 참전단체에 지원한다면 한국과 베트남간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분야에 있어서 후속 파급효과가 연동적으로 일 게 될 것이다. 특히 30여 년 전   따이한의 군대가 자유수호를 위해 공산주의자의 침략에 공동 대응하고자 연합군의 일원으로 원정 투입되어 떨친 명성과 함께 맞은 베트남 특수를 이제는 전쟁이 아닌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신세계질서에 부응하여 한국의 민간기업이 선도하는 제2의 특수 창출이 참전전우들의 전적지 방문에 의한 베트남과의 친선도모와 유대를 통하여 실현될 결정적 계기가 마련될 수도 있을 것이다.

 

       (2)베트남의 대외정책 특히 대미관게에 부응하는 우리의 입장 정립

알려진 바와 같이 베트남은 1991년부터 "모든 국가와 우호관계를 맺고 대외정책을 다원화한다"는 외교전략을 표방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하여 베트남은 같은 해에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하였으며 그로부터 4년후에 Sean에 가입하였고 미국과의 관계정상도 이룩하였던 것이다.

베트남 공산당의 보수주의 자들은 이제 중국에 편향하여 이념적 지원과 정당성의 근원을 중국의 실용주의 노선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할 정도로 변화를 시현하고 있다. 당 개혁세력은 asean의 회원국이 되고 미국과 밀첩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서 더욱 다양한 대외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만족해 한다. 실제로 베트남은 2001년 중반까지 asean의 상임위원 국가로서 asean을 대표한 미국과의 대화 동반자였던 것이다.

2001년 9월에 phan van khai 수상이 러시아를 방문하여 양국간의 골치 아픈 채무관계를 해결함으로서 러시아에 진 17억 달러의 빚을 향후 23년간에 걸쳐 10%는 현금으로 나머지는 상품과 용역으로 연장 상환키로 합의 서명했던 것이다.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200년3월에 미국 국방장관 William Cohen과 Bill Clinton 대통령이 같은 해 11월에 하노이를 방문하여 7월에 체결된 쌍무 통상협정에 대한 후속조치와 관련된 문제의 협의였다. 클린턴에 앞서 베트남을 방문한 코헨 국방장관은 베트남 전쟁중 발생한 미군실종자 약 2000명에 대한 규명이 최우선 과제이며 이와 관련하여 상호 안보 유대와 군사협력 및 교류를 증진하기 위한 함정 교환 방문을 할 것이라고 원칙을 표명하였다.

그리고 고엽제(orange agent)와 풍토병에 대한 군진 의학적 연구와 천재지변시의 재난구조 지원을 제공할 의향을 보인 것이다. 특히 코헨 장관은 전쟁당시 해군 조종사들이 추락한 지점에 대한 유해 발굴 현장까지 방문하여 실종자의 확인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베트남측에서도 약 30만명의 실종 군인들 확인작업이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양국이 화해와 협력으로 안보유대를 강화함으로서 새로운 역사와 번영의 역사를 창출할 것이고 이를 위해서 양국은 과거사를 투명하게 제시하여 상호 오해나 오산이 없도록 하자는데 동의했다는 사실이다.

그후의 클린턴 방문시에도 같은 맥락에서 상호 협력이 수용되었으며 특히 클린턴은 베트남의 미래 발전을 위한 자결(self-determination) 의지를 촉구하였던 것이다.

베트남의 대외 정책이 신세계 질서를 부정하는 북한과는 달리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도 개방과 개혁을 추구하면서 특히 대미관계에 있어서는 과거의 아픈 상처를 회고하는 것 보다는 미래의 국가발전을 위한 국익 증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협력과 양보를 아끼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 10년간간의 전쟁에서 베트남이 입은 피해는 실로 천문학 적이다. 물론 초강대국인 미국이 지접 전비 1,500억 달러(간접비용까지 합산시는 2,400억달러이며 현 화폐가치로는 8천억 달러 상당)에 5만 5천명 전사자에 30만명의 전상자를 내기도 했지만 베트남에 비하면 약과다. 베트남이 입은 피해는 전사자 300만명에 민간인 피해자가 400만명이며 행방불명자만 30만명에 이른다.설상가상으로 고엽제 피해자가 100만명을 초과하며 정신질환자가 600만명이고 피난민이 1천만명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재산 피해액은 무려 3,500억 달러가 넘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전쟁을 미국은 Never Again War라고 한다. 클린턴 대통령도 하노이를 방문하여 '양국이 공유하는 아픔'이라고 베트남전쟁을 역사적으로 평가하고 이 상처를 아물게 하는데  함께 노력하기를 다짐했던 것이다.

베트남은 전후 미국과의 국교정상화 문제가 제기되자 항미구국(抗美救國)전쟁에 승리하였으나 국토부흥을 위해서는 미국과 관계개선을 해야 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서는 미국의 경제 제재에도 불구하고 47억 5천만 달러의 전시 배상청구를 관철하려면 미국과 손잡을 수 없다는 진퇴양란의 고민끝에 결국 대미 배상청구를 철회하고 미국의 경제 제재를 풀게 하였던 용단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에 대하여 절대로 비굴한 자세를 보이거나 전쟁중 발생한 대민 피해에 대하여 자국의 대의명분과 정당성에 대해서는 정권이 바뀌어도 일관된 국익 우선의 논리를 견지하고 있다.

실제로 베트남의 대민 피해규모가 확대 과장됐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숙명여대 최동주(국제학)교수는 "한국군은 시종일관 선무공작의 대상이 됐다면서 "당시 한국 참전을 반대했던 미국 좌파 학자들의 현지 조사를 보더라도 최근 일각에서 주장하는 피해 규모는 과장됐다"고 말했다.

더구나 한국군 전사자 5,000여 명중에는 양민복장을 한 베트콩에 의해 희생된 장병도 상당수 포함돼 있는데 베트남측 일방이 주장하는 피해자들이 베트콩이 아니라 민간인이라는 전이 입증되 않았다.

특히 참전용사들은 양민 학살 문제가 한국군이 펼친 각종 대민 사업까지 호도해서는 곤란하다는 입장이다.한국군이 참전기간중에 베푼 대민지원 및 봉사는 진료 352만3,364명, 식량제공 1만 9,640톤, 의류 제공 46만 1,764점, 농기구제공 6,406대, 가옥 및 교실 신축 3,319동, 교량건설 132개, 도로신설 394km, 태권도 보급 90만 2,060명, 경로 및 어린이 잔치 6,848회, 연예공연 2,304회 등 평정사업과 동시에 대민 선무 심리전을 펼쳤던 것이 사실이다.

◇사진左(上)한국군이 양곡을 전달하고 있다. (中)전달한 양곡을 가가호호까지 방문 전달하는 맹호.(下)한월친선 노래경연대회를 열고 열창하는 한월 어린이들.
  ◇사진右(上)맹호의료진이 출장진료를 나가서 주민들을 치료하고 있다.(中)한국군에게 태권도를 배운 베트남 유단자들이 시범을 보이고 있다. (下)한국군이 철수한다고 하자 "한국군이여 좀더 머물러 주오. 이땅에 진정 평화가 올 때까지 당신들이 떠나면 오늘밤부터 어찌 잘 수 있겠오"라는 현수막을 들고 주민들이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베트남 정부도 당장 확인도 안되는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발설않도록 함구령을 내렸다고 한다.호치민의 한 언론인은 한국 언론의 양민학살 보도를 인용한 '투호이제' 등 일부신문에 대해 보도자제 요청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 정부는 이 문제가 자칫 민족감정을 자극, 자국에 제2위 투자국인 한국과의 관계발전에 찬물을 끼얹을까 우려하고 있다. 더구나 베트남 정부는 이 전쟁을 부도덕한 미국과의 전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한국, 태국, 호주 등은 그저 미국의 추종자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도 이제는 이 같은 베트남의 대국적인 시각과 새로운 대외정책 기조는 물론 미국이 베트남에 접근하고 있는 협상자세를 타산지석으로 삼고, 우리와 전쟁사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대미관계에 있어서 동류집단의식과 동질성이 적지 않은 베트남 임을 전제로, 과거지사의 아픈 상처를 다시 파헤쳐 확대 쟁점화하기 보다는 정부차원과 민간 차원에서 전쟁중 일어났던 불행한 일을 국제법과 관례의 범위내에서 상호 이해하고 수용함으로서 미래 지향적인 방법으로 원만하게 치유하고 매듭짓도록 서둘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앞에서 말한 문제의 선의에 의한 종결 선언인 것이다.

정부 당국이 일부 함량미달의 선동에 의한 민간단체들의 일방적인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물론 이를 무작정 방치하거나 무 대응으로서 외면함으로서 사태가 자동 냉각 소멸될 것으로 기대함은 직무유기나 태만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들 용병론이나 양민학살 주장을 펴고 있는 자들의 목소리가 북한의 대남선전 선동과 목소리를 같이 하고 있다면 이는 분명히 현행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것이다. 이 점에 유의하여 국가 이익과 국가안보에 심각한 역기능을 초래하는 허무 맹랑한 논리를 잠재우기 위한 다각적인 대책 마련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한미 공조적 이해관계의 일치 차원에서 처방모색을 위한 의견 교환이 요청된다. 미국은 약10년간 연인원 300만여 명을 투입하였으며 우리는 약 8년간 연인원 30여만 명을 투입하였는데 전사자는 미군이 5만 8천여 명, 한국군은 5천여 명이었으니 동률의 피해인 바, 이 같은 맥락에서 대민 피해의 진상과 그 대응논리에 대하여 의견교환을 해 볼 만하다.

대략 미군의 10% 규모의 한국군 병력이 투입되었고 희생당한 비율도 비슷한 바, 전쟁기간중 약 200만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본다면 이중에 일부는 포격과 폭격 또는 지상군의 공격작전 간 불행하게 희생된 경우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미연합군은 전장에서 상호 지원과 협력에 의한 연합작전을 빈번히 했던 바 민간인 피해 문제와 관련해서도 공감적 이해가 가능할 것으로 보아진다.

문제는 그 가해자가 누구냐 하는 것을 싫증적으로 절대 밝혀 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왜냐 하면 전쟁의 고유한 속성과 베트남 전쟁의 특수성 때문이다. 가해자는 전술 임무수행을 위해 항공폭격이나 함포사격 또는 지상 교전을 명령 지휘한 한국과 미군의 제대별 책임자가 될 수도 있고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피아 불명의 민간인으로부터 피해를 당하여 대응하거나 접적 이동 및 교전한 말단의 전투원이 될 수도 있다.

또한 당시의 베트남군과 베트콩 또는 북베트남군이 작전 행방요인으로 간주한 나머지 민간인에게 가해 행위를 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공간적으로 상황이 바뀐 지금 당시의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한 서로 어긋나는 주장이 서로 양립되게 마련이며 국제법에 의해서도 그 시비를 가릴 수 없는 법 논리나 현실간의 괴리와 모순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선의 대안은 미국과 베트남간의 문제해결 절차를 원용한 접근 방법으로 어두웠던 과거를 더 이상 묻지 말고 밝은 미래를 위해 상호 협력하는 창조적인 역사의 장을 열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불확실하고 감상적인 지난날의 사건을 재 거론하여 시비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국력과 경제력이 한단계 위인 우리가 북한에 베푼 시혜의 일부분이라도 베트남에게 베풀 것을 전재로 하여 상대방에 대한 포괄적인 관용과 인내를 구하면서 과거 청산의 종결선언을 통해 상호 유대를 도모한다는 나름대로의 입장정리라고 하겠다.

      (3) 베트남전쟁 철저 연구 및 시행착오의 비판적 수용

충무공의 난중일기가 조일 7년전쟁(임진왜란)연구에 있어서 사건일지(chronology)로서 가장 확실한 사실자료가 되고 있음은 물론, 일본의 하기하라 료가 쓴 조센센쇼(朝鮮戰爭)에 의하면, 한국전쟁 최대관심사인 김일성의 남침계획과 작전명령의 근거 단서를 미군이 노획한 인민군 병사들의 수첩이나 일기장에서 찾았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전쟁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가치있는 가용 유관자료의 철저한 비교분석과 판단 평가는 물론 이들 자료를 영구 보존함으로서 역사적 유물로서 후손들의 연구를 위해서 제도적으로 폐기하지 못하도록 하고 연구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당시 주월한국군에게 지급된 수첩

 한국전쟁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유엔군(미군)에 귀속된 상태에서 대미 의존적으로 수행되었으며, 당시 국방예산 편성마저 미국의 군사 원조로 편성되었던 바, 당국의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전사자료의 기록정리 및 보존관리의 동기부여가 미진하였음은 사실이다. 그리하여 휴전 이후 상당기간이 지날 때 까지 한국전쟁에 대한 당국의 공간사가 발간되지 못하고 있다가, 국방부가 늦었지만 주로 미국이나 일본의 방대한 민간기록과 자료는 물론 뒤늦게 공개된 미국과 중국의 외교문서를 접수 정리하여 전 6권의 "한국전쟁사"를 펴낸 것이 1990년대 초였다.

그리고 그동안 잊혀지고 있던 한국전쟁이 1997년 미국에 세워진 한국전쟁 기념탑 및 조형물의 설치와 함께 국제적으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는 한국전쟁 반세기 기념사업이 한미간에  2000년도부터 시작됨으로서 더욱 활성

화되고 있는 것이다. 6.25전쟁이 비록 미국의 입장에서는 무승부로 끝났지만 서방측의 40여년 간의 걸친 냉전을 종식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음은 남베트남과는 달리 한국이 전쟁의 피해를 극복하고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은 모범적인 사례를 보임으로서 탈 냉전시대의 신세계질서 창출을 위한 사방측 국가들의 길잡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완패한 전쟁으로 끝났기 때문에 아직도 개입 동기와 실행과정에 대한 비판적 논쟁이 국내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만약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여 베트남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는데 성공했더라면 베트남전쟁에 대한 오늘의 평가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며 전쟁사례연구도 더욱 활성화되었을 것이다. 미국은 비록 패한 전쟁이었지만 전쟁관련 기록과 자료를 철저히 연구, 분석, 평가하여 실패의 악순환을 예방하기 위한 교훈 도출에 인색하지 않고 있음을 본다. 그리하여 걸프 전쟁에서 대승을 할 수 있는 노하우를 창출하여 실전에 작용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많은 민간 영구단체나 개인의 베트남 전쟁 연구를 정부당국이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도 한국과 전혀 다른 군사문화 풍토라고 하겠다.

한국의 경우, 독자적인 작전권을 행사한 국방부 직할의 합동기동부대가 8년여에 걸쳐 베트남에 주둔했던 바, 제반 전쟁관련 기록과 가용자료 및 문헌을 충분히 체계화하고 정리 및 집대성하여 보관, 보존해 오고 있을 것으로 보는데, 베트남 전쟁이 끝난지 30년이 가까워 오지만 현재까지 당국이 편찬한 공신력 있는 베트남전쟁 공간사가 나오지 않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단지 주월 한국군사령부에서 만든 『월남전 종합연구』와 녹취록 그리고 야전부대에서 제출한 전투상보의 합철본 등 전술작전 차원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하여 국방부가 편집 발간한 불완전한 내용의 단행본 몇 권을 제외하고는 국가차원의 총체적 전쟁경과를 수록한 좀더 권위있고 신뢰성있는 전쟁기록문서가 나와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전쟁일지(war chronology)가 먼저 만들어져 그 부록으로 첨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중구난방의 비 공인사건 기록의 오류를 바로 잡도록 해야 한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국방부 군사 편찬 연구소의 베트남전 담당 연구관 1명으로서는 역부족이다. 적어도 3-4명의 상근 또는 비상근 연구원을 고정 배치하여 베트남 전쟁사를 재조명 및 재음미하여 종합 체계적인 연구가 착수 되도록 서둘러야 할 것이다. 아울러 현행 군사 기밀 보호법 상 기밀로 분류되어 있는 귀중한 군사사(軍事史)자료를 등급 저하와 동시에 소각 폐기 처분하도록 하지 말고 이를 연구 목적을 위한 사료로 영구보존 비치 및 활용하도록 하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베트남전쟁사가 정확성과 신뢰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공간사로 편찬 발간된다면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용병과 양민학살 시비도 가릴 수 있게 될 것이고 고엽제 황자와 그 의증환자를 포함한 참전군인에 대한 위상제고와 권익신장을 위한 당위론적 논거를 제공하고 참전군인을 폄하 매도하고 있는 반국가 이적 단체와 언론 매체에 대한 공박과 제재조치를 위한 객관적 동기 여부와 시민사회의 공유가치형성에 일조할 것이다.

우리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평가는 지나치게 자기 주관적, 자기 과시적 그리고 무비판적 과도합리화에 치우쳐 있으며 역사적 진실보다는 홍보 및 보도차원의 미화나 각색의 경향이 없지 않다. 베트남 전쟁 수행 과정에서 도출된 성공과 실패의 진솔한 교훈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며 객관적, 개방적 그리고 건설적 비판도 표출될 수 있는 성숙한 민주사회의 군사문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동안 법과 제도 그리고 관행으로 굳어진 한국군의 폐쇄적 경계선 보존 속성은 민군과의 상호투과를 차단하고 정보의 교류를 군사보안이란 명분으로 봉쇄해 옴으로서 조직 발전에 저해요인이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베트남전쟁의 실상이나 일화가 초,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 소개된 것이 거의 없고,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나 연극은 물론 소설이나 수필도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만큼 국가와 국민의 관심이 멀어져 있기 때문이며 심지어 용병이나 양민학살 같은 극한적인 허위기사가 장기간 언론매체를 석권하여 국민의 뇌리에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정보사회의 도래와 함께 현재 국내의 10여 개 인터넷 검색 포틀 사이트들에 입력되어 있는 베트남전쟁 관련자료가 대부분 정확성, 신뢰성, 객관상 그리고, 보편타당성이 결여된 오류투성이 일 뿐 아니라 양민학살이나 용병을 주장하는 단체들의 일방적 편중 주장만을 싣고 있음은 중대한 문제이다. 당국은 이들 사이트를 검색하여 적절한 대응조치를 속히 취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베트남전쟁에 대한 오도된 부정적 이미지는 회복 못 할 정도로 급속히 확산될 것이며 참전전우들의 고통과 좌절은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베트남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한국군이 매우 잘못한 두가지 공개되지 않은 시행착오와 정책적 오류를 적시하고 이에 대한 자성과 시정을 촉구하고자 한다. 물론 필자도 베트남전쟁을 체험한 입장에서 공동책임을 느끼면서 사생결단의 전장에서 이러한 문제는 하나의 낭만으로 받아드려 질 수 있고, 동서고금의 보편적으로 야사의 한 장면을 차지할 사안일지 모르지만 이성과 자아 그리고 본능의 통합적 융합은 물론 정반합(正反合)이란 변증법적 역사발전을 추구한다는 차원에서 베트남전쟁과 관련한 한국군의 당면과제 극복을 위해 이를 기탄없이 제시해 보려는 것이다.

       1) 정직하지 못한 일부의 전과 및 피해보고

베트남전쟁에서 각급 전투부대나 전투지원부대의 지휘관이 가장 신경을 쓴 것이 전과보고였다. 전쟁도 손익계산을 하는 경제적인 비용 대 효과의 분석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부하를 덜 죽이고 많은 전과를 올리는 지휘관은 유능한 전투지휘관으로 평가 받고 또한 부하로부터 존경받으며 수훈 대상이 될 수 있고 차후 승진과 보직에도 혜택이 돌아가게 마련이다. 이는 주월 미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군은 정직한 사실 그대로의 전과나 피해보고가 생활화 되어있기 때문에 지휘관이 보고절차나 내용에 과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아는 사실을 가감없이 진솔하게 원칙에 맞추어  보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한국군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특히 전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명피해를 입은 경우엔 문책이 따르고 지휘관 자신의 신상에 불이익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정직한 전과와 피해보고의 발상이 나오게 된다.이러한 여건하에서 일부 부대에서 허위 내지는 조작보고는 지휘계통을 통하여 상향식 짜 맞추기로 전달되고 이것이 관행으로 길들여진 경우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 제동을 가하는 요인이 있었는데 한국부대의 각급부대의 항공, 함포지원이나 작전협조차 파견된 미군요원들은 나름대로 자기의 지휘계통에 따라 현장에서 목격한 전과를 보고 하기 때문에 훗일 최고 사령부에서의 집계 상호 불일치가 갈등을 증폭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월 한국군의 전과 및 피해보고는 이들 파견 또는 배속된 미군요원에 의한 견제와 감시의 순기능 때문에 바로 잡혀지기도 하였다. 특히 청룡부대의 경우 미 해병대의 항공, 함포 연락중대(ANGLICO)요원으로서 대부분의 장교 2명과 사병4명, 중대의 사병2명이 상시 배속되어 있었던 바, 항공 및 함포의 지원이 매우 효과적으로 이뤄졌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의 전투 군기확립에도 소금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잘못된 전장에서의 두 가지 유형의 허위 내지 왜곡 보고가 있었으니 그 하나는 비전투 간의 안전사고에 의한 사상자 발생을 즉각 보고치 않고 작전시에 발생한 것으로 미루어 합리화 시킨 다음 보고 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 기간부터는 주월 미군과 한국군이 다 같이 전과보고 시에 적 사살의 경우 반드시 개인화기나 공용화기가 일정 비율로 수반되도록 한 '전과 피해 실산 제도(Body Count System)'에 의한 보고가 의무화됨으로서 허위 과장 조작 보고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대응한 반작용으로 일부 한국군 부대에서 비록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부패한  베트남군이 암시장에서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과 물물교환하여 얻은 개인화기가 한 단계 넘어 한국군에게 쌀이나 달러와 교환되는 비밀거래가 교묘히 이루어져 전과 보고 노획품으로 둔갑되는 사례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거짖말 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한국군의 피해보고이다. 주월 미군의 경우 전사자(KIA)와 전상자(WIA) 그리고 행방 불명자(MIA)와 전쟁포로(POW)가 정확하게 구분 집계된 보고를 제시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공식 발표한 피해를 보면, 전사자 47,244명과 비 전투손실 10,446명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데 반하여 주월 한국군의 공식 발표된 피해 보고는 비 전투손실이 구분되지 않고 전사자 4,960명으로 포괄 보고되어 있음을 볼 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전쟁에서 실제로 소수이지만 적과 싸우지는 않았다 해도 개인의 실수나 전투군기 위반행위로 또는 우군간의 오인사격이나 오폭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이들을 전투손실로 허위 조작하여 보고 하느냐 아니면 정직하게 비전투 행정 손실로 보고 하느냐 하는 것이다. 한국군의 경우 규정을 어기고 후자를 택한 사례가 부지기 수였던 바 오늘날의 공식통계가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왜 전투 손실과 비전투 손실이 구분되어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외국군 당국에서 제기하면 할말이 궁색해 진다.

이러한 허위보고 및 왜곡보고 관행은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 이는 일시적으로 피해 당사자나 부대 그리고 지휘관에게 이익을 도모하고 사자에 대한 관용을 미덕으로 아는 동양의 유교사상에 따라 인지상정으로 별로 저항 없이 받아 들여 질 수도 있다 해도 분명히 규정위반이며 범법 행위일 뿐 아니라 군의 전투력과 사기에 역기능을 초래하고 국가 재정손실을 가져오는 비애국적인 처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지휘관 역시 양심과 욕구 그리고 현실간에 심한 갈등을 빚게 되고 건전하고 창의적인 리더십 발휘에 장애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2) 비 교전자에 대한 무공훈장 수여

태극, 을지, 충무, 화랑, 인헌 순의 훈격인 한국의 무공훈장은 상훈법에 의하면 인헌 무공훈장을 제외하고는 적과의 교전현장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자에 한하여 수여하도록 하고 있으며 수훈자는 국가로부터 수훈에 따른 일정액의 보상을 받도록 되어 있다.

베트남전쟁 기간중 이 5개 훈격의 훈장이 무려 33,953개가 수여되었는데, 문제는 일부 훈장은 비교전자에게 행정적으로 수여되었으며, 특히 최고 훈격인 태극무공훈장은 미국의 의회명예훈장(congressional medal of honor)처럼 전쟁영웅에게만 수여됨으로서 그 희소가치와 국가의 권위를 지키도록 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수여된 이 훈장 16개중에서 5개는 당시의 지휘관 및 외국군 지휘관에게 의례적으로 주어졌음은 무공훈장 본연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시행착오였다.

 전항에서 언급한 바 있는 일부 소수의 허위 조작 보고된 전과가 아이러니하게도 무공훈장으로 연계 결착되어 당사자는 물론 주위의 그 내막을 알고 있는 자 들을 곤혹스럽게 만든 경우도 있었음을 전제할 때, 부정직한 전쟁수행 과정에서 빚어지는 역기능적 부장용이 엄청난 파급효과로 개인과 조직 그리고 국가에 미치게 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무공훈장수여와 관련되는 진중실화가 후일 현역을 떠난 다음에 참전군인과 민간인들 간에 무용담이나 일화로 소개 전파되는 경우엔 왜곡 증폭 과장되어 심각한 후유증을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이는 민군관계를 악화시키고 군의 대 국민 신뢰를 손상시켜 종국적으로 국민개병제도의 거부나 안보불감증 확산 같은 극단적인 오늘의 현상을 자초하게 만든 것이다.

 무공훈장의 수여는 엄격한 심사와 절차에 따라 받을 가치가 있는 자에게 국한되어야지 오늘날처럼 전쟁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장기근속 유공자에게는 근무공로를 인정하여 표창이나 물질적 보상 등 다른 방법으로 시혜를 행하여야지, 접적(接敵) 교전을 전제한 전투행위 유공자에게 주어져야 할 무공훈장이 이런식으로 평시에 논공행상의 인상이 짙은 선심공세나 지휘관의 인기관리수단으로 전락 남용되고 있다는 비판을 속히 불식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시정조치가 이뤄져야 할 것은 전쟁시 외국정부로부터 받은 무공훈장의 행정처리 문제이다. 연합작전시엔 연합군의 국가원수로부터 무공훈장을 받게 되는데 그 희소가치나 권위는 자국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주권국가간 상호 주권존중은 물론 동맹국 간에 있어서는 유대강화란 차원에서 상호 무공훈장을 주고 받는 것이 국제관례로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의 상훈법이 잘못되어 외국무공훈장은 상훈대장에 기록도 하지 않으며, 전혀 수상당사자에게 혜택을 주지 않도록 되어 있는데 이는 국제사회에서 우방국가간 호혜 도모 원칙에 어긋나며 수여국가에 대한 모독이다.

 당국은 외국 정부가 정당하게 수여한 무공훈장을 국내 무공훈장과 똑같이 인정하도록 필요한 조치를 소급하여 취함으로서 무공훈장의 가치고양과 해당자의 사기진작으로 민군관계 개선은 물론 국제친선 유대강화에 일조하게 될 것이다. 특히 2002년 후반기부터 무공훈장 수여자 중 65세 이상자에게 보상금이 매월 소액이지만 지급됨으로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4) 고엽제 피해자를 위한 합당한 대책 마련

       1) 베트남 전쟁의 실제 희생자들

베트남전쟁이 끝난지도 30년이 가까워온다. 그런데 최근 베트남전쟁의 비극을 상징하는 두 건의 고소가 미국에서 제기되었다.

 한 건은 DDT사용금지 투쟁을 벌인 바 있는 롱아일랜드의 한 법률가에 의한 집단소송이었다. 내용인 즉 다이옥신 때문에 종신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수 천명의 미군병사를 대표하여 기형아출산 등 유전상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워싱턴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의 전 미 귀환병 법률센터에 의한 고소인데, 고엽제(orange agent)에 의한 신체장애를 호소하는 귀환병들을 위한 특별정책을 마련해 달라는 대 정부 청원이었다.

 이 두건의 소송압력때문에 미 공군에서는 고엽작전에 참가한 요원 1천 2백명에 대한 후유증을 6년 계획으로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조치가 취해졌다. 그러나 아직도 "다이옥신이 남성의 유전자에 염색체 이변을 일으켜 기형아를 낳게 하는가"에 대하여 과학적 근거에 의한 법정심리를 끝내지 못하고 미결상태에 있다고 한다.

미국정부는 LSD의 실험에 참가하여 손해를 입은 병사들에게 1인당 1백만 달러 이상의 보상금을 지불한 전례가 있어 만약 이들 고엽작전에 참가한 수천명이 고엽제에 의해 유전학상의 피해원인이 확정된다면, 법률상의 최종결정이 어떻게 될지 심히 궁금하다.

 일설에 의하면 GB와 VX신경제를 비밀리에 하와이에 있는 월남전 훈련장에서 실험한 바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VX는 남베트남의 다낭과 투이호아 기지에 비축하고 있었는데, 만약 이 두 기지가 점령당하게 되면, VX를 사용하려고 계획했다는 것이다. 비엔호아기지에는 GB를 저장해 놓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1970년 8월 8일자 스웨덴의 일간지 '디켄스 니에다'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도하여 우리를 놀라게 한 바 있다.

 "사이공의 주월 미군사령부는 캄보디아 영내의 북베트남군에 대하여 강력한 신경가스를 사용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극비밀리의 실험계획으로서 '폭포계획(project-waterfall)'이란 익명의 작전으로 행하여 졌는데, 목표지역에 VX 1백 파운드 들이 상자가 다수 들어있는 컨테이너 2개를 항공투하하자, 사전 투입된 특수부대 요원에 의해 미지의 지역으로 운반되어 성공적인 실험이 끝났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의 고엽제와 폭동진압제 사용에도 불구하고 승산없이 1970년대를 맞게 되었다. 특히 1969년에 닉슨 대통령의 후기정권이 들어서자, 국론이 분열되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비판은 절정에 달했다.

 국내의 반전운동이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가공할 만한 독극물을 전장에 비축 사용하고 있다는 외신보도와 함께, 이에 대한 인도주의적 시비와 군 내부에서 화학무기의 전술적 효과성 여부에 대한 논란도 고조되고 있었다. 요란하게 선전했던 고엽제가 기대했던 바와 같은 전술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시험할 당시처럼 베트남이나 베트콩의 거점이 고엽제에 의해 완전 노출되는 일은 없었고, 농작물에 피해를 주기는 했으나, 베트콩이 지방주민의 지원을 받는 한 그들의 보급추진에 별로 큰 고통을 가중시키지 못하였다.

또한 폭동진압제는 악전고투하던 미군부대를 궁지에서 탈출케 하고, 완강한 적병을 은신처로부터 노출시키는데 부분적으로 기여했을지라도, 정치·전략적으로는 오히려 역기능을 미쳐 미국의 국가이익에 손상을 입힌 것이다.

 그 당시 미 의회에서는 다수의 여야의원들이 1925년의 제네바의정서를 반세기가 지난 지금이라도 비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그후 1975년에 포드 정권시에 생물·독소금지조약과 동시에 제네바의정서를 비준함).

그리고 상원 외교 위원회는 베트남에 있어서 미국의 화학작용제 사용을 비난하는 유럽의 대세에 편승하여 폭동진압제나 제초제를 치사성 화학무기 조항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결의안 체결 움직임까지 보이게 되엇다.

이러한 대외적 압력에 못이긴 닉슨 대통령은 1969년 11월25일 치사성 화학·생물학 무기의 선제사용을 일방적으로 금지하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는 지금도 유효하지만 미국은 폭동진압제와 제초제는 치사성 화학무기가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적이 사용하면 사용한다는 조건부 사용유보 규정일 뿐인 것이다.

닉슨의 이런 유명 무실 한 선언에 관계없이 소련은 화학 무기의 대량생산에 박차를 가했으며 예멘, 라오스, 캄보디아, 아프카니스탄, 이란, 이라크 등에서 독가스가 월남전이 끝난 다음에도 사용된 것은 배후에 크렘린의 마수가 작용했을 것임을 시사한다.

'빈곤국의 핵무기로 불리우는 화학무기는 국제조약이 이행되지 않고 있는 상황하에서 미·러가 금세기 초가지 보유량의 절반을 폐기하기로 합의한 바 있으나 그 실행 여부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화학무기는 현재 제3세계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정부급 이하의 테러 집단 수주에 들어갈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다. 특히 탈 냉전세계에서 미·러의 지도력이 저하됨에 따라 다원화된 신세계질서의 불확실성과 모험 때문에 일부 화학무기를 가진 국가가 광적인 행동을 하도록 허용되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화학무기는 저렴한 가격으로 간단히 대량생산할 수 있고 은닉, 사용 및 운반이 용이하여 현재 20여개 국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물리적 파괴없이 인간만을 살상하거나 일시적 기능을 상실·저하시켜 정복할 수 있으며 정밀유도무기와 같은 현대적 투발 수단에 의해 정확하게 목표까지 도달하게 할 수도 있는 이점이 있는 것이다.

앞으로 포괄적인 화학무기의 금지조약이 시행된다 할지라도 이를 철저하게 금지·검증할 신뢰성 있는 국제장치가 존재하지 않는 한 핵무기처럼 상대방의 화학전 능력을 억제하기 위한 대응·방호수단을 계속하여 보유하려고 할 것이다.

한국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약 3개사단 규모의 전투부대를 장기간 베트남 전쟁에 참가시켰던 바, 9천여톤에 달하는 엄청난 CS계열제초제가 살포된 정글의 전장에서 활동하였던 병사들이 알 게 모르게 다이옥신에 오염되지 않았을 이 없다.

현재 제기되고 있는 8만여 명의 고엽제 후유증 및 후유 의증에 의한 고통과 피해를 호소하는 파월요사들에 대하여 과학적인 역학조사와 피해 입증 자료를 수집하여 보상을 위한 조치를 국가적 차원에서 강구해야 할 것이다.

       2) 고엽제 후유증 및 후유 의증 환자의 요구

베트남참전 연 병력이 32만여 명으로 집계되고 있는데, 물론 이중에는 2회 이상 참전한 자도 일부 포함되어 있는 바 이를 감안해도 4만8천여 명의 병력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대략 1년단위로 교체함으로서 베트남 전쟁터를 거쳐간 인원은 대략 32만명이 될 것으로 본다. 이는 미군의 전쟁기간은 한국군보다 약간 길었지만 최고 병력규모가 55만여 명까지 이르렀으며 연 인원 300만명을 투입했던 것과 비교하면 대략 비슷한 비율이 된다고 하겠다.

현재 국가 보훈처에서 고엽제 후유 의증 환자 지원에 관한 법률 및 동 시행령에 의해 등록신청을 접수하여 환자로 심사 판정한 인원이 <표2.에서 보듯이 (2002년9월말 현재)후유증 15,949명, 후유 의증 41,990명, 2세환자 36명, 합계 57,976명으로 나와 있으니 베트남 참전자 연 인원 30만며의 약 19%가 고엽제 후유증 및 후유 의증 환자란 놀라운 사실을 뒷받침하는 통계가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표2>고엽제 후유증 및 후유 의증 환자 현황

구     분

후  유 증

후  유  의  증

2 세  환  자

합     계

판정결정인원

15,949명

41,990명

36명

57,976명

 자료출처 : 국가 보훈처 통계, 2002년 9월말 현재.

 특히 여기에서 후유증 환자15,949명은 그 상태에 따라 8개 등급으로 나눠지는데 대부분이 병상에서 투병하면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일종의 지발성 원자병이나 암 환자의 말기 현상 같은 비참한 증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제2세 가운데 36명이나 유사증세가 발견되어 고엽제 환자로 판명됨으로서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1993년 3울 10일 법률 제4547호로 제정된 '고엽제 후유 의증 환자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후유증 환자는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규정한 바에 준하여 국가 유공자로 인정받아 한국전쟁 전상자와 같은 수준으로 의료혜택과 제반보상 및 대우를 국가로부터 받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후유 의증 한자는 분명히 전상자임에도 불구하고 보훈 병원에서 무료진료를 받을 수 있으되 그 보상과 혜택 및 대우는 국가유공자가 아니므로 이들과는 완전히 달리 장애등급에 따라 소액의 수당을 받는데 그치고 있다.

현행 관계법과 동 시행령에 의하면 이들 의증 환자는 고도 장애의 경우 월 43만원, 중도 장애의 경우 월32만원, 경도 장애의 경우 월21만원을 국가로부터 장애자 보상금으로 지급 받고 있으며 등급기준 미달 판정자  2만7천여 명은 이 소액의 수당 마져 못받고 있음으로 크게 좌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4만 1천여 명에 달하는 후유 의증 환자는 고엽제로 인하여 발병한 고혈압, 당뇨병, 중추신경장애, 다발성 신경마비, 자극성 피부염, 간 질환, 고지혈증 등 악성 질병 때문에 엄청난 심신의 장애를 받고 있으며 이들의 대부분이 성인병과의 직장종사나 건강유지가 어려워 생계에 막대한 타격을 받고 있다.

당연한 사회문제의 심각성은 이들 고엽제 환자나 의증 환자들이 정당한 국가의 부름을 받고 베트남의 대공전선에 투입되어 목숨을 걸고 싸운 역전의 용사들인데도 일부 단체들이 용병과 양민학살의 원흉이나 범죄집단으로 몰아 부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당국에서는 이들을 제재하지 않고 수수방관하고 있으며, 후유 의증 환자의 경우 그 고통을 외면한 채 겨우 월 21-44만원의 보상으로 책임을 다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는 당국에 대한 불평과 불신의 증폭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다 같은 전쟁 피해자이고 장애자이며 전상자인데 국가 유공자로서의 법적 인정을 못받고 있음을 불만스러워 한다.

설상가상으로 최근에 제주 4.3사건과 5.18광주 민주화 운동 피해자에게 정부가 수억원의 일시금 보상을 해주면서 민주 유공자란 명예까지 부여한데 대하여 이들 고엽제 의증 환자들은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이들이 받는 월 보상금을 평균 30만원이라고 전제한다면 1년에 360만원, 10년에 3,600만원, 30년에 1억원이 된다. 국가 정책이 불특정 다수의 행복이 아니라 특정 소수의 특혜에 편중되어 있다면 형평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현행 제도대로라면 소위 민주 유공자란 자들의 일시금으로 받는 최저 액수를 고엽제 피해자들이 30년에 걸쳐 받을  자격밖에 없는 무가치한 존재 인가하는 반발이 나올만 하다.전상자인 이들 환자들은 건강이 악화 일로에 있어 10년이상 존재할 자가 많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국가의 보상시책은 무정견하고 불평등한 파격적 편중 특혜에 의한 중차대한 시행착오를 자행하고 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지난날 휴전선 남방한계선 인접 지역에 살포했던 고엽제의 피해가 최근에 와서 불거져 나오고 있어 우리를 긴장 시키고 있다. 이미 518명을 신고 받아 역학조사를 통해 86명을 후유증 또는 후유 의증 환자로 판별하였다. 물론 이들 군인과 민간인의 피해도 베트남 전쟁시의 고엽제 후유증과 같은 차원에서 국가가 사후관리를 하고 있지만 앞으로 환자가 계속 증가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 당국의 고충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건군 이래 무려 20만여 명이나 되는 무공훈장 수여자도 국가 유공자로 지정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요구가 제기되고 있어 그 무마책으로 이들에게 2002년부터 고령자에 한하여 국가에서 일정액의 상훈 수당을 지급하게 된 것은 국가의 재정능력 범위 내에서 취한 가당한 조치인 줄 안다. 그러나 전항에서 지적했듯이 비 교전수훈자가 다수포함된 훈장 남발의 시행 착오가 오늘의 희소가치 희석과 국가재정부담 가중을 초래하는 부작용임을 당국은 올바르게 인식하되 무공수훈자중 참전수훈자의 특별우대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베트남전 고엽제 후유 의증 환자는 발암성이 강한 독극물인 다이옥신이 다량한유된 고엽제에 노출 또는 이를 흡입, 흡수하여 생긴 자발성 불치병이다. 현재 이병에 걸려 신음하는 심신 장애자로서 참전자들은 국가가 이들을 유해물질에 노출되도록 명령한 당사자로서 결자해지의 원칙에 따라 응분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데도 당국은 이들을 국가 유공자로 대우하는데 인색하며 정치적 배려로 민주 유공자에게 특혜를 베푼 것은 언어도단이란 비난은 설득력이 있다.

베트남 전쟁기간 중 무려 700만 리터의 고엽제가 베트남 전선의 지상 및 공중 살포되었고 현재 베트남에는 약 300만명에 달하는 고엽제 후유증 및 의증환자가 고통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다이옥신이 인체에 미치는 효과를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전장에 살포한 책임도 정부 당국에서 제기해야 될 것임은 물론, 역대 정권이 미국의 고엽제 제조 회사인 다우 케미칼사에 대한 국제배상청구소송 제기를 우유부단하게도 유보시켜 온데 대한 합당한 해명도 있어야 할 것이다. 고엽제 의증 환자들에 대한 응분의 보상요구를 해 달라는 요구가 수용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이들은 1999년 말에 미국의 다우 케미칼사를 상대로 피해자 1만 7천여명이 1인당 3억원씩 5조1천억원의 피해 보상청구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2년8개월만인 지난 5월23일 원고 청구 기각 판결이 내림으로서 1심이 종결되었다.

원고 측에서 지난 6월 25일 항소를 제기하였지만 정부당국의 방관적 무성의와 이적 단체들의 양민학살 주장으로 이 국제소송이 벽에 부딪치고 있음을 당국은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하의 소송판결문은 베트남전쟁의 특수성이나 고엽제가 인체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 싫증적 조사와 과학적 검증 없이 고엽제가 피해자와 인과 관계가 없다는 결정을 내린 요지인데 이는 한마디로 8만여 명의 고엽제 후유증 및 의증환자에게는 청천벽력이며 언어도단인 것이다. 지금도 갖가지 전쟁후유증으로 말미암아 육체적 정신적 피해와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어불성설의 탁상공론이며 파행적 결정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