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베트남 전쟁시 한국군의 심리전과 대민지원 활동

 

3.  "백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

 

주월한국군이 월남전에서 이룩한 업적 가운데 큰 획을 긋는 것이 수 없이 많지만 그 가운데 심리전과 대민지원활동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주월미군이 성공시키지 못한 것 가운데 하나가 이 심리전 분야이다.

월남인과 피부색이 다르고 프랑스의 지배하에서 형성된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반감 탓도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미군이 원천적으로 심리전이나 대민지원에 대해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고, 오로지 군사작전의 승리만이 자유 월남을 보호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B-52 폭격기를 비롯한 전술 항공기, 최신형 헬리콥터 등으로 폭격과 기동, 적을 제압한다면 그리고 물량공세를 펴 무한정한 군수물자를 사용하면서 적을 압박하면 월남전에서 결판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군 당국이 월남전에서 패배한 원인은 바로 그와 같은 오산에서 비롯되었다.

미군 사단이 막강한 공중지원을 받아가며 최신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적의 목표를 공격하면 그들이 원한대로 점령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 점령지역에서 미군이 떠나버리면 불과 2일내지 3일 안에 원 상태로 회복되는 결과가 됨으로써 미군작전은 지역평정과 평화의 정착이란 관점에서 볼 때는 실패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군이 병력과 장비를 증강하며 군사작전으로 월맹과 베트콩에게 압력을 가하면 가할수록 상호 인명피해와 장비손실 그리고 파괴 등이 증가할 뿐 최종 승리는 더욱 멀어져 월남인으로부터 원성만 듣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월남전의 특징은 목표 또는 표적이 불확실성 때문에 어떤 파괴수단도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는 점에 있었다.

가령 파리를 때려잡는데는 파리채가 필요한 것인데 파리채가 아닌 야구 방망이로 파리를 잡으려면 오히려 파리보다 잡는 사람이 손해를 보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여하간 미군은 인명손실뿐만 아니라 막대한 군 장비와 보급품을 잃게 됨으로써 날이 갈수록 승산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주월한국군은 이와 같은 미군의 실책을 따르지 않기 위해 단독으로 묘안을 짜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기발한 명구(名句)를 찾아내어 주월한국군의 작전개념과 파병목적을 내외에 빛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명구는「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이다. 이 명구가 전 주월 한국군 부대에 정식 훈령으로 하달되자 각양 각색의 반응이 일어났다.

특히 주월 미군사령부 일각에서는 "한국군이 월남에 온 것은 싸우러 온 것인데 이 무슨 해괴한 훈령이냐"고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갔다.

미군 장성들 특히 주월 미군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정식으로 채명신 장군에게 "군사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정규군이 민간인 구호단체나 할 일을 우선 순위에 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항의하였다. 또한 주월 맹호사단이 위치한 퀴논 일대의 월남 중부지역을 관장하고 있던 미군사령관 라슨 장군은 더욱 강력하게 반박하면서 채명신 장군을 대놓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채명신 장군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그들을 설득하였다.

"월남전의 양상은 여느 전쟁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일정한 전선도, 목표도, 표적도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적은 월남의 양민 가운데 섞여 있기도 하고 어린 소년소녀를 내세워 그 뒤에 숨어 기습을 가하는 경우도 있어 이를 분리시켜 우리가 바라는 표적을 찾는 일이 심리전이라고 생각한다. 모택동이 주장한 물은 인민이요, 고기는 해방군이라고 일체감을 강조한 바로 그 고기와 물을 분리시켜야 하기 때문에 더욱 월남전에서는 심리전과 대민지원활동이 필요하다. 나는 월남전을 30% 군사작전, 70% 심리전으로 분류하여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미군 장성들은 채명신 장군의 논리 정연한 주장에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였지만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훗날 주월 미군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전역후 그의 회고록에서 당시 주월 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의「월남전의 이해」에 대해 경의를 표한바 있다. 여하간「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훈령은 굉장히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한편 월남의 영자지「사이공 포스트」를 비롯한 월남내의 각종 언론 매체들은 일제히 주월한국군 사령관의 훈령에 찬사를 보내며 주월한국군에 대한 각종 보도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군사작전 30%, 심리전과 대민지원활동 70%를 표방한 한국군은 실제 각 부대에서 당위성에 호응하며 전 지역에 걸쳐 민간인과의 접촉으로부터 그 서막이 올랐다.

그러나 예하부대들이 받아들이는 자세에는 각양각색의 이론이 있었다. 훈령이기 때문에 거기에 따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이행정도에 있어서 적극적이냐, 소극적이냐가 문제였다.

제1진 주월한국군의 전투부대는 맹호사단 보병 제1연대 및 기갑연대의 6개 대대와 해병 청룡여단의 3개 대대만이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초기 지휘관들은 전군에서 선발과정을 거쳐 전투경험과 지휘능력, 복무성적 등을 정밀히 심사했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의 작전개념과 지휘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1연대장 김정운 대령은 한국전쟁의 영웅이며 과묵하고 솔선 수범하는 전형적 야전지휘관인데 전투중심의 월남전 수행을 기조로 삼고 있었다. 문제의 그 훈령에 대해 회의를 가진 것은 어쩔 수 없는 그의 지휘철학 탓이었다.

기갑연대장 신현수 대령 또한 한국전쟁 초전에 육사생도로 전투에 참전했고 그 후에도 야전근무를 통해 나름대로의 지휘철학을 가지고 있었으니 문제의 그 훈령에 대해 공감하기가 힘든 입장이었다.

해병 청룡여단의 이봉출 대령 또한 한국전쟁시 명성을 떨친 야전지휘관이고보니 그 훈령이 못마땅하게 생각되었다. 더구나 공격위주의 해병이고 보니 심리전과 대민지원활동에 공감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이들 세 연대급 지휘관 외에도 대대장 9명 전원이 한국전쟁 참전 유경험자이고 보니 그 훈령에 납득하기가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이를 알아차린 주월 한국군사령부는 채명신 장군의 훈령을 이해시키고 설득하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검토된 것은 첫째, 월남전의 역사적 배경, 둘째, 월남과 월남인 침략을 받아오면서 형성된 정황과 민족성, 셋째, 비정규전 특히 게릴라의 활동에 있어서 물과 고기를 분리시켜야 된다는 이치, 끝으로 월남인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한국군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 등으로 집약하고「훈령에 대한 이해」를 공문으로 작성 하달하는 한편, 채명신 사령관이 직접 예하 부대를 방문하면서 중대장급 이상 전 지휘관 및 대대 참모 이상의 실무자에게 훈령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소신과 열정을 가지고 실시한 이 교육으로 말미암아 한국군의 지휘관 및 참모들은 상당히 공감하는데 까지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미군의 장성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미군 지휘관들은 이 훈령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빈정거림으로 일관하였다.

채명신 장군은 미군 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심리전과 대민지원사업을 월남전에서의 한국군 활동의 70%를 차지한다는 지휘방침을 세우고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당시 한국군은 충분한 보급품을 지원 받고 있었다.

미군 당국으로부터는 C-레이션(전투휴대식량) 그리고 월남당국으로부터는 쌀을 지원 받음으로써 어느 쪽이건 반은 여유가 생겼기 때문에 그 반으로 심리전을 위한 대민지원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여유물자를 보유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