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베트남 전쟁시 한국군의 전술교리와 작전

   2.  독자적 전술교리의 태동

 

 채명신 장군이 월남 도착과 함께 첫 작전회의에서 밝힌 그의 소신은 「한국군 독자적 전술교리의 발굴」이었다.

  특히 한국전쟁에서 소대장 또는 중대장으로서 지휘 경험이 있었던 맹호사단의 6개 보병대대장과 청룡여단의 3개 보병대대장들은 이와 같은 채명신 장군의 주장에 대해 한결같이 뜻을 함께 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공교롭게 맹호사단의 6개 보병대대장은 모두 진해에 있는 육군대학 교수 재직중 발탁되어서 그 동안 강의내용이 모두 미군의 교리였음에 한국적 전술교리의 발굴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미군 교리가 한국군의 체질과 관습, 정신적 영역면에서 어딘가 부족한 듯한 의문도 가지고 있었다.

  유럽이나 미 대륙과 같은 광활한 지역에서의 대규모 기동작전이 아니므로 한국의 산악이라던가 월남의 정글과 같은 특수지역에서는 동양인 특유의 인내력과 지구력, 재치를 가지고 대응하는 것이 보다 필요한 대응책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군 독자적인 전술교리의 필요성이 증대되어 가고 있었음은 한국군 발전을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한국군이 월남에 도착전 월남정부는 전국적으로 창궐하는 소위 인민해방전선(NFL)의 게릴라들을 소탕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따라서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벽촌의 주민들을 일정한 지역에 모아 대단위 부락을 조성하여 정부 통제하에 들게 하는 「전략촌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시행과정에서 계획상의 오류 그리고 베트콩의 방해가 심해져 지지부진 하다가 그 계획자체까지 중단되고 말았다.

  1965년 4월까지의 주월미군은 월남군을 돕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미군은 기지확보전략에 의거하여 연안지대의 주요 군사기지를 점령하고 병참 및 전투지원시설인 비행장과 통신소, 포진지 등을 방위하면서 이를 중심으로한 반경 50마일 이내의 범위 내에서 월남군을 지원하였었다.

이러한 틈을 이용하여 월맹군과 베트공이 합세하여 월남의 구석구석에 침투하면서 중부 고원지대 뿐만 아니라 지방의 도시를 제외한 거의 전지역에 영향을 미치게 됨으로써 월남전은 새로운 위기를 맞기 시작하였다.

  이에 주월미군사령관은 새롱운 작전개념을 세워 5월 8일 미 국무성이 새로운 권한을 부여하는 조치가 취해짐으로써 미군이 월남전에서 주역으로 바뀌게 되었다. 따라서 웨스트모어랜드 대장은 3단계로 구분된 공세이전(攻勢移轉)을 위한 작전개념을 세웠다. 그 3단계 작전개념은 다음과 같다.

  제1단계 - 기지를 확보한다.

  제2단계 - 기지의 방어를 위하여 105미리 곡사포 사정거리 이내에서 작전을 전개하며 월남군과 연합작전하에 원거리 전투정찰과 공격을 결행한다.

  제3단계 - 월남군이 필요로 할 때 기동타격부대를 지원하며 본격적인 반격으로 이행한다. 이와 동시에 해안선기지의 안전이 확보되면 내륙으로 이동하여 기지확보를 목표로 작전을 전개한다.

  위 3단계 작전개념을 미군당국은 수색격멸전략(Search and Destroy Strategy)이라고 이름 붙였다.

  미군의 전략에 대해 주월한국군사령부는 근본적으로 회의하는 눈초리로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채명신 장군은 미군과는 달리 독특한 구상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새로운 개념인 중대전술기지 개념이다. 특히 주월한국군의 규모가 적은 까닭으로 배당된 지역만을 우선 고려하여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최초계획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제1단계 - 전술책임지역(TAOR)의 방위를 위한 거점을 구축하는데 목표를 두고 부대를 배치하되 중대단위 전술기지를 설치하여 기지 주변의 전투정찰과 탐색을 실시.

  제2단계 - 공세로 이행할 발판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전술책임지역 내의 적의 지배지대를 수복, 평정 후 안정에 성공하면 전술책임지역 밖으로의 공격태세 완비.

  제3단계 - 대부대작전을 전개하여 전술책임지역을 점진적으로 확대하며 경계선 밖에 있는 적을 격멸시키는 한편 월남정부의 평정계획을 지원.

  위 3단계 작전계획하에 맹호사단, 청룡여단의 각 대대는 각 중대별로 전술기지 구축에 들어갔다. 이 중대전술기지 개념은 미군 당국과는 전혀 다른 한국군이 창안한 것이기에 초기 단계부터 미군 당국과의 견해차이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채명신 장군이 창안한 중대전술기지 개념은 다음과 같은 배경하에 한국군이 채택하게 되었다.

  첫째 고려요소는 베트콩과 주민을 분리시켜 게릴라의 온상을 파괴하는 한편 베트콩의 활동범위를 축소시킨다.

  둘째, 고립되고 약화된 적을 먼저 공격하되 상대적으로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투입한다.

  즉 위 두 중대전술기지 운영개념은 중공의 모택동 혁명이론을 교조로 삼고 그의 게릴라전법을 사용하는 베트콩의 근거지를 소멸하는데 역점을 둔 것이었다.

이 중대전술기지는 공격과 방어 및 민사심리전의 핵이 되는 기본 단위기지로서 주월한국군의 자주적 전술개념으로 계속 정착되어갔다.

채 장군은 중대전술기지 설치에 대한 일반지침을 다음과 같이 예하부대에 하달하였다.

첫째, 적의 연대규모의 공격에 48시간 이상 지탱할 수 있도록 진지를 구축하고 소요되는 탄약과 식량을 비축한다.

둘째, 중대전술기지는 포병의 지원사정권 내에 설치하며 기지와 기지간의 간격을 야간 매복과 탐색으로 보강한다.

셋째, 기지는 모든 작전행동과 월남당국에 의하여 추진되는 촌락재건계획을 지원하는 거점으로 활약한다.

지금까지 설명한 중대전술기지에 대한 모든 개념이 미군 당국에 알려지자 근본적인 개념상 너무나 차이가 있다고 항의하고 나섰다. 솔직히 이 중대전술기지개념은 주월미군과는 너무나 다른 작전개념이었다. 미군 당국자는 중대단위 규모의 기지로서는 적의 공격을 감당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공격으로 전환시 집중운영에 불편을 초래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미군 당국의 우려의 표시는 채명신 장군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어서 대대단위기지로 해보라는 미국당국의 권유도 묵살하였다.

사실상 이 중대전술기지개념은 세계 어느 나라의 전술개념에도 찾아볼 수 없는 주월한국군의 독특한 것이었다. 따라서 미군을 위시한 월남군 그리고 서방세계의 종군기자들이 호기심과 회의의 눈초리로 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군의 군사전문가들조차 월남의 험준한 지형에서 광범위하게 깔려 있는 중대단위 기지가 베트콩에 의해 참담한 결과가 초래할 것이라고 관망하고 있었다. 그 근거로서는 미군의 대대단위 또는 연대단위 기지가 종종 베트콩의 야간기습으로 손상을 입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월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가 할당된 전술책임지역에 전개하기 시작한 1965년 10월 이후 1966년 초까지에 걸쳐 이러한 염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이 증명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의 모든 전술책임지역내의 중대전술기지가 베트콩의 기습을 받고 있었으나 단 한번도 참담한 결과는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적지 않은 승전보가 사이공의 매스컴에 심심치 않게 보도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미군당국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소규모 기습을 견뎠지만 적의 공격규모가 커지면 중대전술기지가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있기 때문이었다.

미군당국의 비아냥 섞인 우려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기에 한국군의 각 지휘관들은 경계심을 높여가며 적의 기습공격에 철저히 대비하였다.

중대전술기지에의 첫 적과의 접촉은 맹호사단 1연대 1대대 3중대에서 있었다.

3중대의 위치는 월남의 중부 항구도시 퀴논에서 13K 떨어진 1번도로 해변쪽 고보이라는 곳이었다. 중대기지와 도로간에는 논이있고, 그 논두렁에는 잡초가 무성한데다 군데군데 습지가 있어 적이 접근하거나 도피하는데 유리한 엄폐물이 많은 지형이었다.

10월 29일 밤. 대체로 맑은 날씨였으나 가끔 구름이 끼었다. 그 날은 음력 10월 6일인지라 황혼에 이미 상현달이 떠 있었다.

중대장 장세동 대위는 중대의 경계지역을 구분하여 낮은 구릉 좌우 능선에 2소대를, 그 남쪽에 1소대를 배치하였다. 3소대와 화기소대 또한 중대전술기지 취약점에 보강하도록 조치한 후 평상시와 같이 경계근무에 임했다.

중대원은 전투경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월남의 이국 풍광에 익숙치 않아 밤이면 공포심에 휩싸이며 이를 견디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였다. 월남에 도착하기전 강원도 홍천에서 월남전에 적응하기 위한 모든 훈련을 마쳤지만 첫 전투를 치르기 전에는 어딘지 모르게 초조한 빛을 감출 수 없었다.

상현달이 중천을 넘을 무렵, 소총소대 경계병이 마을로부터 접근하는 한 떼의 움직임을 발견하였다. 이에 소대원은 비상태세에 들어가 그 무리의 행방을 응시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무리는 중대전술기지에 가까이 접근하자 산개하며 포복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때 설명해야 할 것은 중대전술기지에서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적을 근거리까지 유인, 조준사격이 가능한 유효사정권에서 사격해야 된다는 사격군기였다. 그러나 적이 가까이 올 때까지 견뎌야할 공포심의 극복과 인내심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소대원은 이겨내고 있었다. 소대원 전방 바로 앞 원형철조망에 적이 접근하는 것을 발견한 소대장은 사격개시를 알리는 소대장의 소총탄을 발사하였다. 이윽고 소대원의 화력이 적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접근하는 적은 엄폐물을 이용하여 쏜살같이 사라져버렸다. 이는 적의 양동작전(陽動作戰)이었다. 다음 기습을 위한 기도를 숨기기 위해 취해진 것이었다.

자정이 지난 후 상현달이 서산에 기울자 칠흙같은 어둠이 시작되었다. 이때 첫 접촉했던 소대가 아닌 3소대에서 이상한 움직임을 발견하였다.

소대원은 일제히 그쪽을 응시하며 경계심을 높였다. 칠흙같은 어둠이 갈렸으니 그 움직임이 적인지 혹은 짐승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바시락 바시락 뭣이 접근하는 소리임은 분명했다. 긴장과 공포심이 교차하는 가운데 어둠속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데 뭔가 총 끝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너무 긴장한 탓인지 격발이 되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는데 바로 뒤에 있던 고광배 일등병이 단발사격으로 1명을 사살하고 총구를 돌려 그 옆의 움직임을 향해 사격하였다.

이리하여 1차 탐색후 두 번째 기습을 감행하려던 베트콩은 소총병의 일격을 받고 황급히 도망쳐 논두렁에 엎드렸다. 그로부터 약 5분뒤 81미리 박격포 조명탄이 발사되어 일대는 대낮처럼 밝아졌다. 베트콩은 줄행랑을 쳤고 시체 두 구만 남기고 상황은 끝났다.

이 최초의 중대전술기지에의 베트콩의 기습은 불과 소대규모에다 국지적 접전이었으나 여기서 얻은 교훈은 다른 중대전술기지에도 전파됨으로써 중대전술기지에의 대비에 참고가 되었다.

첫째, 중대전술기지 철조망 밖에 적의 예상 접근로에 청음초나 매복조를 운영하지 않은 점이 지적되었고

둘째, 적을 지근거리까지 유인할 수 있었던 공포심의 극복과 인내심의 결과로 적 두 명을 사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야간전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훈련이 안된 사병들은 적을 지근거리까지 유인하지 못하고 먼 거리의 적에게 사격을 집중하는 경향이 흔하다. 따라서 교전의 쌍방은 기(氣) 싸움과 같은 공포심의 극복과 인내심의 발휘 결과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

아마 베트콩은 하찮은 전투였지만 한국군의 훈련정도가 매우 높았다는 결론을 얻었을 것이다. 맹호사단 1연대의 각 대대 전술책임지역내의 중대전술기지는 이와 같은 베트콩의 시험적 기습이 계속 이어졌으나 단 한 번도 베트콩이 마음먹은 대로 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를 유린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당국은 소규모의 베트콩이기에 극복했던 결과라며 맹호사단의 중대전술기지에서의 승전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미군당국의 주장은 그런대로 일리가 있었다. 그들처럼 물량공세에다 한국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크고 많은 장비를 가지고 있는 조직을 전제로 생각할 때 한 개의 중대가 적의 공격을 48시간 버틴다는 논리는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고 또한 중대가 48시간 적과 대응하여 싸울 탄약 등 전투에 필요한 물량을 확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군은 그 모든 난제를 극복할 수 있는 조직과 능력 그리고 정신력 무장이 되어있었다.

아마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미군당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대전술기지로 부대를 전개해 놓고 혹시나 유린당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세계 어느 군사학 교리에도 없는 개념을 적용해 놓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중대전술기지개념의 실시로 긍정적인 효과가 하나하나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첫째, 물과 고기를 분리시키는데 크게 기여하게 된 것이다. 중대단위로 각 전술지역에 산개시켜 놓고 보니 대민접촉이 빈번해져 정보수집이 용이해졌다. 따라서 작전수행시 정확한 정보를 활용함으로써 많은 전과를 올리는 한편 평정지역 확장에도 편리하였다.

둘째, 월남인들이 한국군을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하여 미군과는 달리 「따이한」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어지면서 심리전 수행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셋째, 아군의 피해를 결정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적에게 있어 공격할 큰 목표가 없고 중대별로 산개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군에 대한 공격에 필요 이상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해졌다. 따라서 적의 공격의 예봉이 덩치가 커 기습에 용이한 미군쪽으로 지향하는 경향으로 흘렀다.

월남전에 참가한 모든 장병은 자유와 평화를 위한 우방국 지원에 보람을 느끼고 있었지만 한국군이 월남땅에서 필요 이상의 피해를 입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자가단속을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분단국의 비애를 겪은 우리기에 남의 전장에 와서 아군이 되었건 적이 되었건 살상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적의 섬멸보다는 귀순을 유도하여 훗날 상호 월한관계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일단 적이 공격을 가할 때는 강력한 충격행동으로 적과 맞섰고 때에 따라서는 응징과 보복으로 적의 기도를 분쇄하기도 서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주월한국군의 장교 특히 지휘관들은 한국에서와 같이 미군 지휘하의 군대라는 자주적 자존심에 손상을 입어가며 근무하는 경우와는 달리 한국군의 자주적 위상을 높이며 긍지를 굳혀가는 살맛나는 군대생활을 체험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각개전투에서부터 분대 소대 및 중대전투 그리고 특수작전에 이르기까지 미국식 교리에 의존하지 않고 새 영역을 개척하는 기상을 키워나갔다. 그 성과는 바로 중대전술기지개념으로부터 태동되었다.